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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명승기
백사실계곡의 원림 유적

백석동천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명승 제36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한양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을 지나 북악산 산마루를 넘으면 백사실계곡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연못터, 주초석만 남은 건물터 등 고정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주인이 누구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원림 유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정국을 맞았을 때 소일차 들러 관심을 보이기도 했던 곳으로 문화재 지정명칭으로는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이다.

백사실계곡

북악산의 산마루를 넘어 북사면으로 흘러내린 능선이 아래위로 갈라져 그 사이에 깊고 안온한 계곡이 형성되었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백석동천’은 백사실계곡에 자리하고 있는데 인근 주민들에 의하면 ‘백사실’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관련된 지명이라고 한다. 백사실 정원 유적은 백사의 별장지 혹은 그가 어린 시절 공부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백사실의 지명이 이항복의 호와 유사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 지도에 백석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계곡의 상부에 위치한 바위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암각된 글자가 있어 처음에는 ‘백석실’이라 부르다가 ‘백사실’로 바뀌었다고 한다.

백석동천은 백사실 원림 유적을 포함한 계곡 일대의 지역을 지칭한다. 신선의 경역을 일컫는 동천은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 안팎의 경승지에까지 명명되었다. 청운동의 도화동천, 가회동의 청린동천, 인왕산 자락의 청계동천, 부암동의 백석동천, 성북동의 쌍류동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의 도시화로 도화동천, 청린동천, 청계동천 등은 옛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쌍류동천은 성락원이 보존되면서 경내에 해당하는 동천 지역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백석동천은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 후면에 있기 때문에 각종 규제를 받아 오히려 자연 상태로 경역이 유지되었다. 건물터와 연못 유구가 위치한 동천의 중심에서 보면 사방이 계곡과 자연만 조망되어 서울에 있는 동천 중에서는 그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려면 본래 세검정 방향의 하천을 건너 암반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동령폭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곳을 통해야만 신선의 경역으로 들어가는 느낌과 그 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지금은 북악스카이웨이 방향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길이 있어 위쪽에서 동천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진입로다. 물론 세검정 방향 역시 진입부의 아름다운 바위 근처에 분위기를 해치는 볼품없는 건물이 다수 지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과거 수려했던 동령폭포 주변의 경관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동천의 초입에 위치한 동령폭포의 너럭바위를 지나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좌측에 자리한 고정원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이 유적은 남북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측에 둥근 연못이 있고 연못의 남단에는 지금은 사라진 육각형 정자의 주초석만 남아 있다. 연못의 북쪽에는 주변보다 3.7m 정도 높게 단을 조성하여 이 위에 건물을 지었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한옥으로, 특히 사랑채에서 연못이 바로 아래로 보이도록 조망위치를 고려해 건축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계곡물을 수원으로 한 원형의 연못이다. 높은 곳에 지어진 건물에서 문을 열면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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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동천 내에는 동천을 상징하는 글자가 바위에 각자되어 있다. 건물지에서 계류를 건너 서측 계곡을 따라 오르면 볼 수 있는 커다란 바위의 수직면에 ‘백석동천’이라고 음각했다. 백석이라는 명칭은 흰 바위라는 뜻으로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북악(백악)의 후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백악에서 취한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각자

‘백석동천’ 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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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원 유구의 맞은편 서쪽 산마루 근처 바위에도 월암(月巖)이라는 각자가 음각되어 있다. 월암의 위치는 건물터에서 정서쪽으로 매월 초승달이 뜨는 방향이다. ‘월출어서(月出於西)’라 하여 달이 서쪽에서 떠오른다고 했다. 사랑채에서 월암 방향으로 떠오르는 초승달을 감상하는 것은 매우 멋진 풍광이었을 것이다. 월암은 그런 의미로 새겨진 각자로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혹시 월암이라는 호를 가진 인물과 관련이 있는지 학자들이 추적을 해보았으나 특별히 밝혀진 사실은 없다.

정원 유적

연못과 건물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규모로 보아 별장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랑채의 앞부분과 마주 보이는 연못 남단에 위치한 정자의 주초석이 장주(長柱)로 되어 있어 두 건물의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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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동천은 서울에 남아 있는 고정원 관련 유산 중 주변의 현대적인 인공 시설과 격리되어 자연 경관이 잘 보존된 원림 유적이다. 또한 현재 상태와 지대의 조건으로 보아 전통정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고정원으로의 복원이 가능한 대표적인 곳이다. 지금 유적의 원형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는 이미 진행되었고, 건물의 복원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려는 상황이다. 그러나 단순히 건물과 정원 유구의 복원에만 치중하여 사업이 진행된다면 졸속을 면하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백석동천의 복원사업은 동천 전체를 대상으로 접근하여 본래의 경관을 살려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진입부의 폭포 주위에 난립한 불량 건축물을 정리하여 아름다운 암반 경관을 회복하고, 계곡부의 석축을 전통적인 기법으로 복원하는 등 우리 고유의 동천 경관을 철저하게 복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국내외에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전통정원으로 백석동천이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백석동천의 원형을 찾아 복원하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주인을 찾는 작업이다. 근래에 백석동천의 별서를 추사 김정희가 소유했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아직 학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사실이 증명된다고 해도 이는 추사가 죽은 해인 1856년(철종 7) 이전에 해당하는 역사일 뿐이다. 이 별서정원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추사 이후에는 누가 소유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 백석동천의 진정한 복원은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는 연구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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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펼쳐보기

출처

우리 명승기행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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