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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나 다시 돌아가리라
만휴정 원림
문화재 지정 | 명승 제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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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안동시 |
나 돌아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 짓고
아홉 이랑 콩밭 일구어 꿀벌 치면서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시다. 그가 고향 슬라이고 근처 호수 속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로 돌아가고자 부른 망향가 〈이니스프리의 호수섬(The Lake Island of Innisfree)〉이다. 이 시는 서양의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불리고 있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중국 진나라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41세에 팽택현의 지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경을 〈귀거래사〉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귀거래사〉는 도연명이 세속과 결별하고 은일을 결심한 선언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후에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낱 동물에 불과한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두고 그곳을 그리며 죽는다 했다.
자신의 삶을 주제로 중국 문학사에서 ‘전원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도연명은 귀거래 후 노년을 산골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말 그대로 가난을 벗 삼아 은거한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은거생활을 통해 청고함, 은일, 탈속과 같은 은자(隱者)문화의 상징이 되었고, 후세의 사대부가 지향하는 삶의 모범이 되었다. 귀거래를 통한 그의 소박하고 청빈했던 삶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의 선비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향수(鄕愁)는 다른 말로 회향(懷鄕)이라고 하는데, 고금을 막론하고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시름이다. 향수가 깊어지면 마음의 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를 노스탤지어(nostalgia)라 부른다. 노스탤지어는 귀향, 귀거래를 뜻하는 노스토스(nostos), 괴로움과 고통을 의미하는 알고스(algos)가 합쳐진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작게는 옛집을 그리워하고, 크게는 고향을 포함한 고국을 그리며 산다.
조선시대에도 학문을 닦은 후 조정에 출사해 유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선비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 속세를 잊고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말년에 귀거래하여 지은 정자다. 김계행은 17세에 진사가 되고 50세 되던 해 식년시에 급제하여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다. 연산군 때 대사간에 올랐으나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처음에는 풍산사제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칭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를 보백 선생이라 불렀다. 보백이란 재물에 대한 욕심 없이 곧고 깨끗함을 뜻하는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는다는 의미다. 1501년 고희를 넘긴 보백 선생 김계행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일찍이 마련한 지금의 ‘보백당 종택’에 정착하고, 산속 계곡의 폭포 위에 만휴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만휴정(晩休亭)이란 ‘늦은 나이에 쉰다’는 뜻으로 김계행이 말년에 얻은 정자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다. 만휴정은 김계행의 장인 남상치(南尙致)가 지어 처음에는 쌍청헌(雙淸軒)이라는 당호로 불렀다고 한다. 김계행이 만년의 늦은 나이에 이곳을 은거생활의 장소로 즐겨 사용한 것에서 이름이 만휴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김계행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전형을 보여준 올곧고 강직한 선비였다. 그는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했으나 청렴을 제일로 하는 청백리의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나의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오로지 청백뿐이다(寶物惟淸白).” 이토록 청렴하고 결백한 그의 삶에 대한 정신은 자신의 호이자 종택의 당호인 ‘보백당’의 의미를 담은 시에도 잘 나타난다.
만휴정 원림은 독서와 사색을 위한 정원이다. 묵계리에서 길안천에 놓인 하리교를 건너 지류를 따라 올라가면 송암계곡에 다다른다. 이곳을 지나면 먼저 암벽의 단애 위로 흰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송암폭포의 시원한 모습이 보이며,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암반 위를 흐르는 물길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움푹 파여 들어간 곳에 만휴정이 자리하고 있다. 만휴정은 이 계류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데 마치 외나무다리와 같이 폭이 좁은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다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만휴정은 석축 위 끝단에 가로세운 낮은 담장 안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만휴정의 마루에 오르면 계자난간 앞으로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내려다보이고, 고개를 들면 앞산의 산허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무르게 된다. 또 위쪽으로는 암반 위를 흘러내려 이룬 소와 계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고졸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쪽 소의 큰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만휴정은 인공적인 원림 요소가 극히 절제된 구성을 보여준다. 이곳을 짓기 위해 축조한 석축과 담장, 소박한 정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원림의 전부다. 본래 우리나라의 원림은 인공적인 일본의 정원이나 과장된 중국 민가정원과는 달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자연 요소를 모두 소재로 차용해서 정원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만휴정 원림은 이러한 한국 고유의 소박한 원림 형태를 잘 보여주는 고정원이다.
만휴정에서 귀거래의 늦은 삶을 여유롭게 보낸 김계행은 천수라 할 수 있는 87세까지 살았다. 그는 자신의 처소인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항상 돈독한 우애와 지극한 효심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절대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는 청백리의 삶을 후손에게 유지로 남겼다. 1706년(숙종 32) 안동 지방의 유림들은 보백당 김계행, 응계 옥고(玉沽) 선생의 학문과 청백리 정신을 높이 기려 묵계서원을 짓고 이들을 주향자로 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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