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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석벽을 깎아 만든 벼랑길
토끼비리
문화재 지정 | 명승 제3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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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문경시 |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이다가 남하하는 도중에 길을 잃고 말았다. 수직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절벽 앞에 이르러 군사들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났다. 그 토끼를 쫓아가니 험하기는 했지만 길을 낼 만한 곳이 나타났다. 토끼가 지나간 벼랑을 잘라 길을 내고 왕건은 힘겹게 진군할 수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영남대로 중 가장 험하다는 토끼비리. 여기서 ‘비리’란 ‘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의미한다. 길을 찾던 왕건에게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여 이 길을 ‘토천(兎遷)’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과 문경새재에서 흘러오는 조령천이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S자형으로 산간 협곡을 파고돌면서 동쪽 산지에 형성된 벼랑에 가까스로 깎아 만든 길이다. 토끼비리는 영강의 하천변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벼랑길을 잔도라 한다. 길이는 약 2km에 달한다.
문경시 마성면에 위치한 석현성의 진남문 아래에는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이 성벽을 따라가면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의 경사면에 다다르게 된다. 이 경사지는 거의 수직절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겨우 한 사람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좁고 험한 토끼비리가 개설되어 있다.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 관갑의 사다리길)’라고도 하는 이 길은 조선시대 주요 도로였던 영남대로의 한 구간을 이루고 있는 특별한 옛길이다.
잔도(棧道)는 험한 길을 의미하는 어휘다.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벼랑길과 사다리길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경사가 급한 곳에 험한 길을 많이 만들었다. 사천성에서 지구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티베트로 가는 길에도 험로가 많다.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역하던 ‘차마고도’ 역시 매우 험난하다. 이 험로는 대부분 잔도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에도 잔도가 등장한다. 《초한지(楚漢志)》의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를 피해 잔도가 유일한 통로인 파촉(巴蜀)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잔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포중에서 남정까지의 길은 촉도난(蜀道難)의 시작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중턱에 굴을 파듯 길을 내어 한두 사람이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해 걸을 만큼의 길을 열어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예 홈을 파고 통나무를 박아 사다리를 산중에 뉘어놓은 것 같은 구름다리를 만든 곳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천길 높이 수직절벽의 벼랑에 붙여 만든 사다리길과도 같은 잔도를 오늘날에도 많이 설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잔도는 충주 남쪽의 달천변, 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 용추 부근, 양산의 황산천, 밀양의 작천 등에 조성되어 있다. 지리학자 최영준은 영남대로에 여러 곳의 잔도가 있는데 그중 가장 험한 길이 관갑천과 작천의 잔도라 말하고 있다.
영남대로는 과거 한양과 동래를 이어주던 도로 중 가장 넓고 짧은 길이었다.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보다 무려 100여 리 이상 짧았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으나 문경에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토끼비리가 있다. 그러나 이곳도 20세기 초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폐도가 되어버렸다. 토끼비리의 벼랑길 노면 위에는 우리 선조들이 드나들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 바위의 표면이 닳고 닳아 돌길이 반질반질한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 옛날 이곳을 왕래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조들의 발걸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토끼비리는 영강의 수면에서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세 가지 공법을 이용했다고 한다. 첫째 구간은 경사가 매우 심한 암벽 지역으로 석벽을 깎아낸 후 토석을 다져 노면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축대를 쌓아 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간 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지역으로 바위를 절단하여 길을 낸 흔적이 뚜렷한 곳이다. 잔도의 폭이 갑자기 좁아지는 위치에는 축대를 쌓아 길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여 길을 억지로 넓힌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다음 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형성하는 곳으로 암맥이 돌출한 부위는 인공으로 암석을 깎아 말의 안장과도 같은 암석안부(巖石鞍部)를 만들었다. 이곳은 영남대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토끼비리는 고모산성에서 날개처럼 뻗은 석현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모산성은 4세기 말 신라가 영토확장에 열중하던 시기에 축조되었다. 이곳은 경북팔경 중에서도 제일의 풍광으로 손꼽히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을 조망하는 장소다. 진남교반이란 주변 산야의 숲이 울창하고 푸른 강물이 흐르는 영강 위로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 철교, 옛 다리, 새로 놓은 다리가 나란히 하고 있어 자연과 인공 요소가 잘 조화된 풍광을 가리킨다.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진 진남교반은 문경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문경은 영남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하늘재, 새재를 비롯하여 근세에 차도로 개설된 이화령까지 여러 개의 고갯길이 자리한다. 또한 고모산성 아래에 이르면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토끼비리와 같은 험로도 위치하고 있다. 길은 물과 산과 계곡을 건너 계속되는 하나의 긴 노선이다. 평지를 지나고 높은 산을 넘고 시원한 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길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반드시 끊기지 않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토끼비리와 같은 잔도는 길의 연결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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