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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만년불패의 터전
두륜산 대흥사 일원
문화재 지정 | 명승 제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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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남 해남군 |
온 나라가 죽음의 땅이 된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로 1,500명의 승군을 이끌었던 서산대사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이겨낸 인물이었다. 그는 묘향산의 암자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였던 사명대사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는 유언을 남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천년 동안 어떠한 병화도 미치지 않은 터전이요, 만년이 지나간다 해도 끝내 허물어지지 않을 불패의 땅이라고 일컬어진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에 모셔진 것이다. 그 후 조그마한 사찰이었던 대흥사는 크게 부흥하여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대찰이 되었다.
대흥사가 위치한 두륜산은 ‘만년불패지지(萬年不敗之地)’라며 서산대사가 극찬한 곳이다. 한반도 서남단, 해남의 땅끝 가까이에 우뚝 솟은 두륜산은 능선이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와불(臥佛)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능선의 모습 때문인지 혹은 주위를 겹겹이 두르고 있는 산세에 위요된 아늑하고 안온한 절의 입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흥사는 어떠한 외세의 침입이나 굶주림, 돌림병도 없었다. 서산대사는 대흥사를 두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이 돌아갈 곳(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이라 평했다.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전서에 국가적인 큰 변란이 있을 때 안전하게 삶을 도모할 수 있는 땅이라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그중 하나가 바로 두륜산 대흥사다. 두륜산은 산속에 대흥사(대둔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둔산 또는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둔산의 ‘대둔’은 큰 산을 뜻한다. 본래 크다는 뜻의 ‘한’에 산을 의미하는 ‘듬’을 합쳐 ‘한듬’으로 부르다가 한자 이름인 ‘대둔’으로 고쳤다. 그래서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렸다고 한다.
두륜산은 해발 703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기저부의 높이가 해면에 가깝기 때문에 산 자체는 비교적 높아 보인다. 주봉인 두륜봉을 중심으로 가련봉,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 등의 봉우리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소백산맥의 남단인 해남반도에 솟아 있는 두륜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멀리 완도와 진도 등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아름답고 시원하게 펼쳐진다. 두륜산의 동쪽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서쪽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난대성 상록 활엽수와 온대성 낙엽 활엽수가 주종인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어 경관이 뛰어나고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절경을 이룬다. 봄에는 신록과 만개한 꽃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이,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겨울에는 동백이 아름답다. 특히 약 2km에 이르는 고목의 동백나무 숲과 붉은 동백꽃, 가을에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의 넓은 지역에 펼쳐지는 억새밭은 장관을 연출한다. 아울러 곳곳에 위치한 능허대, 백운대, 구름다리, 극락대, 학사대, 대장대, 금강굴, 흔들바위, 여의주봉 등도 수려한 조망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경승지들이다.
대흥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로 많은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다. 426년(구이신왕 7)에 정관존자(淨觀尊者), 514년에는 아도화상, 895년에는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둔사지(大屯寺誌)》를 집대성한 혜장(惠藏, 1772~1811)은 이 모두가 신빙성이 없으며 다만 신라 말에 창건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흥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춘 사찰다운 사찰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1607년(선조 40) 이곳에 자신의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전공으로 배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의 억불 분위기 속에서도 탄압을 피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대찰로 발전한 것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는 북원과 남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남원에는 극락전, 대장전, 지장전 등 12개소, 북원에는 대웅보전, 나한전, 시왕전 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규모를 보면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기 때문에 이 기록은 어딘가에 잘못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흥사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중심으로 절집들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으며 지금도 남원, 북원이라 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 일곽의 남원, 그리고 초의선사가 중건한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 등 세 곳의 경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흥사에는 귀중한 문화재가 많다.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보물 제320호 응진전전삼층석탑과 국보 제308호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또한 여러 점의 탱화와 서산대사의 유물, 그리고 역대 명필(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등)의 편액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서산대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스님들의 부도와 탑, 한국 다도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는 초의선사와 관련된 시설과 흔적도 보존되어 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선일여(茶禪一如)’, 즉 다도와 참선은 하나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흥사는 한국 다도의 본산으로 일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대흥사의 대웅전에서 700m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다도를 위해 조성된 다원인 일지암이 위치하고 있다. 전라남도 무안에서 출생한 초의는 16세에 승려가 되었는데 수행과 더불어 차를 직접 재배하고 만들었으며, 차를 끓이고 마시는 예절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일지암에서 40년 동안 수행을 한 초의는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유학(儒學)과 시문을 배우고, 해동 제일의 명필 추사 김정희와도 친교를 나누었던 폭넓은 지식인이었다. 초의는 차에 관한 저술로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했다. 《다신전》에는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 끓이는 법, 차 타는 법, 차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로 나누어 제다(製茶)와 다도(茶道)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 제29송에서 다도의 정신을 이렇게 읊고 있다.
비록 물의 체(體)와 차의 신(神)이 온전하다 해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을까 두려우니
중정을 잃지 않는다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으리라
이처럼 남도의 차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빼어난 자연 경관과 문화적 의미 등이 인정되어 1975년에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8년에 사적 및 명승 제9호로 다시 지정되어 명승에서 삭제되었다가 2009년에 또다시 명승 제66호로 재분류된 자연유산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후 명승에서 삭제되고 또다시 명승이 된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곡절이 많은 명승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명승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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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두륜산 대흥사 일원 – 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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