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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삼한시대의 저수지
의림지와 제림
문화재 지정 | 명승 제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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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북 제천시 |
인류의 문명은 농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농업혁명은 사람들의 거주방식을 이주(移住)에서 한 곳에 머물러 사는 정주(定住)의 형태로 바꾸었으며 집단의 규모 또한 크게 확대시켜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만들어냈다. 농업의 시작은 고도의 문명사회로 가는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농업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의 기술 발전에 기인한다. 바로 제련과 토목기술의 발전이다. 제련기술은 농기구의 발전을 가져왔고 토목기술은 관개수로의 조성을 통한 수리의 안전을 이룩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큰 강을 끼고 있다. 강 주위로는 큰 농경지가 일구어져 있고, 이는 강을 막는 댐과 관개수로 등의 수리 시설에 의해 연결되었다.
제천의 의림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 수리 시설 중 하나로 만수면적이 151,470m2이며 최대 저수량이 661만m3에 달하는 인공저수지다.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제천현지도(堤川縣地圖)》, 《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 조선시대 고지도에도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의림지는 조성된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문헌을 근거로 삼국시대설, 고려시대설도 제기되었으나 2009년 제방과 호수 바닥의 퇴적물을 시료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서기 100년 전후라는 결과가 나와 2,000년 전, 즉 삼한시대에 이미 의림지가 못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의림지의 조성에 관해서는 전설에서 그 유래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의림지는 최초로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700여 년이 흐른 다음 이곳에 현감으로 부임한 박의림(朴義林)이 제방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3대 수리 시설인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중에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곳은 오직 의림지뿐이다. 벽골제와 수산제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호서 지방’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충청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데, 호서(湖西)는 ‘의림지의 서쪽’이라는 의미의 어휘다. 충청 지역을 일컬어 의림지의 서쪽 지역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의림지는 유서 깊은 저수지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의림지를 신라 때 ‘의림’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의림지에 위치한 정자인 경호루(鏡湖樓)의 〈경호루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의림지는 원래 ‘임지(林池)’라 하였는데 고려 992년(성종 11) 군현의 이름을 개칭할 때 제천의 지명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泉)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어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의림지는 역사도 깊지만 그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명소였기 때문에 많은 시인묵객이 즐겨 찾은 곳이기도 했다. 의림지를 탐방한 문인과 화가들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 산수화가 이방운의 서화첩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에 묘사된 의림지는 특히나 아름답다. 예로부터 의림지는 단양사군(丹陽四郡, 청풍, 영춘, 단양, 제천) 중에서 제천을 대표하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방운의 산수화 〈의림지〉에는 제방 위에 아름다운 수목이 빙 둘러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주종인 산수화 속의 수림은 의림지의 호수와 잘 어울려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의림지의 제방에는 오늘날에도 노거수 숲이 있어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의림지는 제방에 위치한 숲과 함께 ‘제천 의림지와 제림’이란 명칭으로 명승이 된 것이다.
의림지의 명칭에 ‘수풀 임(林)’이 들어간 것도 예전부터 항상 의림지 제방에 숲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고문헌을 살펴보면 하천이나 저수지의 제방을 축조할 때 반드시 수목을 식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목의 뿌리가 서로 얽혀 제방을 튼튼히 해주고 토양의 유실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의림지의 제방에는 노송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군락을 이뤄 제방의 기능을 보완하고 곳곳에 위치한 정자와 어울려 수려한 풍광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의림지는 용두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원을 이룬다. 평상시에 흘러오는 물은 저수지에 가두고, 홍수 때 실려오는 흙과 모래는 서쪽의 용추폭포를 통해 홍류동 쪽으로 보내는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특이한 얼개를 갖고 있는 의림지는 예전에도 저수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사를 시행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러한 기록의 하나로 조선 세조 때 체찰사(體察使)로 이곳에 왔던 정인지는 3도의 병력 1,500명을 동원하여 의림지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다고 한다.
의림지 제방과 호안 주변에는 진섭헌(振屧軒), 임소정(臨沼亭), 호월정(湖月亭), 청폭정(廳瀑亭), 우륵대(于勒臺) 등 많은 정자와 누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호정(映湖亭)과 경호루만이 남아 있다. 영호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1807년(순조 7) 이집경이 처음 건립했고, 6·25전쟁으로 훼손된 것을 그의 후손인 이범우가 1954년에 중건했다. 경호루는 해방 이후인 1948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규모로 지어진 누각이다.
의림지에는 제비바위라는 연자암이 있다. 이 바위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연암, 용바위 또는 우륵대라고도 불린다. 충주의 탄금대와 더불어 우륵의 자취는 이곳 의림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현재 의림지의 우측 도로변 녹지에는 우륵의 자취를 재현하여 우륵정이 새로 지어졌으며, 탐방객을 위해 의림지 주변을 정화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설이 삼한시대부터 이어진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의림지의 문화 경관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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