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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신선이 사는 도심 속 정원
성락원
문화재 지정 | 명승 제3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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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 성북구 |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인 동소문(혜화문)을 나서면 곧바로 맑은 성북천이 흐른다. 삼선교 아래를 흐르는 개울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차도로 바뀌었지만 이 시내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선잠단이 위치하고, 다시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락원이 있다. 의친왕이 35년 동안 사용했던 별장이다. 별장이란 제2의 주택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사대부가 소유했던 별장은 별서라 불렀고 제왕의 별장은 별궁, 혹은 이궁이라 했으니 아마도 별궁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이 좌절된 후 평생 배일정신을 잃지 않고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았던 의친왕은 이곳에 머무르며 어떤 소회에 젖었을까?
성락원(城樂園)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심상응(沈相應)이 지은 별서다. 낙산 아래 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계류가에 조성한 별서정원으로,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위치한다고 해서 쌍류동천이라 불렀다. 동천이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어휘로 심산유곡의 경치 좋은 곳에 붙여지는 명칭이다.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계곡이 깊고 산수가 아름다워 옛날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그들은 수려한 이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몸과 마음을 수양했다.
성락원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별서정원으로는 비교적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고정원이다. 옛 문헌과 그림, 지도를 보면 도성의 내부는 물론 근교에도 다수의 고정원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성 안에 자리했던 북촌의 옥호정을 비롯해 인왕산 계곡의 빼어난 동천은 모두 훼손되었으며, 도성 밖에 조성되었던 백석동천도 유구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과 함께 성락원은 서울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정원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성락원의 내원 바위에는 ‘청산일조(靑山壹條)’라고 새겨져 있고, 각자된 시문 중에는 ‘청산수첩(靑山數疊)’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소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여 있는 성락원 일대의 아름다운 산세를 표현한 글이다. 지금은 주변의 산야가 모두 고급주택으로 점유되어 성락원은 담장 안의 정원이 되어 버렸지만, 쌍류동천이라 칭했던 신선이 사는 땅의 산천경개가 얼마나 청아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성락원은 동천으로의 진입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 계곡이 모두 도시화되어 골목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담장으로 구획된 그 안의 별장만을 감상할 수 있다. 성락원은 크게 세 곳의 소정원 구역으로 구분된다.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 등 자연 지형에 따라 조원된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성락원의 정문을 통해 정원으로 진입하면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이 전원이다. 이곳에는 두 줄기의 계류가 하나로 모여 흘러내리는 계곡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은 과거에 차도를 만드는 바람에 깊은 도랑처럼 되어 있어 전원으로서의 옛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차도를 폐쇄하고 도로를 보행로로 고치면서 고정원의 모습을 많이 되찾게 되었다. 이곳 암벽에 쌍류동천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전원 공간은 정원의 진입부다. 옛날에는 어렵게 계곡을 거슬러 올라와 성락원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을 통과하는 감동이 매우 컸으리라 생각된다. 쌍류동천 각자가 있는 전원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그 안쪽에 위치한 내원은 용두가산이 가로막아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계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용두가산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신선의 경역인 성락원의 비경이 펼쳐진다. 용두가산은 성락원의 내원을 아늑하게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해 만든 인공조산(人工造山)이다. 이 위에는 고목으로 된 느티나무, 음나무, 참나무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내원은 계곡의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계원이다.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의 암벽 아래에 소(沼)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이 영벽지다. 소의 주변은 자연암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졌으며, 물이 흘러내리는 북쪽 암벽에는 인공수로를 파고 3단의 폭포를 만들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깊은 산의 계곡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맑은 소리를 낸다. 폭포의 좌측 암벽에는 전서체로 ‘청산일조’라고 각자되어 있다. 소의 서쪽 암벽에는 ‘장빙가(檣氷家)’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겨울에 고드름이 달려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완당(阮堂)이라는 호가 옆에 새겨져 있어 김정희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장빙가’가 각자된 암벽 위에는 ‘영벽지 해생(影碧池 海生)’, ‘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 가끔 강호놀이를 하네. 계묘 5월 손문학 씀(百泉會不流 爲沼碧闌頭 自吾得此水 少作江湖遊 癸卯五月 孫文鶴書)’이라고 새겨져 있다. 연대를 나타내는 계묘는 1843년(헌종 9)으로 추정된다. 이 바위에는 전서체로 내려쓴 또 하나의 각자가 있는데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네. 푸른 산이 여러 겹으로 싸여 있고 이곳에 있는 나의 오두막을 사랑한다(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盧)’는 의미다.
영벽지 동쪽 언덕 위에는 한옥이 있는데 원래 별서의 본채로 의친왕이 기거했던 곳이다. 이 한옥을 지나 숲 속의 돌계단을 오르면 또 하나의 못이 만들어져 있다. 못의 동쪽에는 근래에 지은 송석정(松石亭)이 있고 북쪽 계류가에는 ‘송석’이라는 각자가 있어 본래 이곳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늙은 소나무가 푸른 가지를 드리운 성락원의 못가에서 저물어가는 노을과 함께 의친왕은 쓸쓸히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망명사건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줄기차게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한 의친왕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 후로 10년이 지난 1955년 의친왕은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이곳 성락원에서 7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성락원은 의친왕의 한과 숨결이 느껴지는 고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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