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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곰을 상징하는 백제의 중심지
공주 고마나루
문화재 지정 | 명승 제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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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남 공주시 |
곰은 백제를 상징하는 토템으로 백제인은 곰족의 후예다. 곰은 ‘고마(固麻)’로 발음되기도 하는데 ‘고마나루’는 곰나루, 즉 백제를 상징하는 동물인 곰에서 취한 지명이다. 곰을 의미하는 지명은 백제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백제 초기 한강 유역에 축조된 몽촌토성의 몽촌(夢村)은 고어로 ‘곰마을’을 뜻하며, 금강 유역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새로 정착한 도읍지에 고마나루,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고 지명을 부여했다. 고마나루는 웅천주(熊川州)라 부르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 곰주, 즉 공주(公州)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의 상징 동물인 곰은 일본으로도 건너갔다. 백제인들이 많이 이주한 일본의 규슈에는 곰과 관련된 지명으로 쿠마(곰)모토, 쿠마가와 등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고마나루가 곰의 본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문주왕은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성을 공격하자 한강 유역을 버리고 금강 유역의 요충지였던 고마나루(웅진)로 천도하게 된다. 고마나루는 이때부터 538년(성왕 16) 사비(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길 때까지 약 6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그러나 도시 이름이 공주로 바뀌면서 오늘날 고마나루는 강변의 나루 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고마나루는 금강이 공주시 유역을 굽이돌아 흘러가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금강의 짙푸른 물길과 고운 백사장, 그 위로 길게 조성된 소나무 숲, 강 건너에 우뚝 솟은 연미산이 모두 고마나루의 권역이다. 연미산의 중턱에서 바라보는 고마나루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푸른 강물, 흰 모래밭, 창송이 아주 절묘한 형태로 어우러진 빼어난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고마나루는 웅진시대 백제의 행정, 군사, 교통의 중심지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의 장수인 소정방이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주둔한 곳으로 백제 멸망 이후 웅진도독부가 설치되기도 했다. 1010년 고려의 현종도 거란의 침략으로 나주로 피난할 때 고마나루를 이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고려시대 이후로도 고마나루는 우리나라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고마나루에는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의 터가 남아 있다. 웅진단은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다. 이 제사를 웅진단제라고 하는데 이제 국가제의는 아니지만 여전히 지역민을 중심으로 곰사당(웅신단)에서 매년 음력 3월 16일에 행해지고 있다. 계룡산 산신제와 함께 유교식으로 지내는 수신제로 중사(中祀)의 규모인데, 소사(小祀)인 산신제보다는 절차가 복잡하고 제수음식도 다양하다고 한다.
고마나루의 건너편에는 연미산(燕尾山)이 자리하고 있다. 연미산은 산의 끝부분이 제비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고 높이가 192m이며 공주시에서 보면 서쪽 방향에 위치해 있다. 공주시를 관류하는 금강이 북서에서 남서로 방향을 바꾸는 곳이다. 연미산의 지세는 고마나루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미산(余美山)이 서쪽 3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연미산이 여미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연미산에도 곰에 관한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연미산 주차장에서 100m 정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안내표지판이 서 있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약 350m 정도 더 가면 곰굴이 나온다. 공주시의 향토문화 유적으로 지정된 이 곰굴은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머리를 마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높이가 138cm, 길이는 120cm다. 1980년대까지 연미산에는 고마나루 전설과 관련된 곰굴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파괴되었지만 등산로에서 멀리 떨어져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그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의 바위굴이 전설상의 곰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총각과 처녀곰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옛날 한 총각이 연미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바위굴에 들어가 쉬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게 된다. 총각은 처녀와 굴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후 며칠을 지내는 동안 매일 굴 밖으로 나가 음식을 가져오는 부인을 이상하게 여기고 따라간 총각은 그녀가 곰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 부자연스러워진 남자를 의심하게 된 암곰은 그를 굴속에 가두고 살았지만 자식을 둘이나 낳은 후에 남자는 도망쳐 금강을 건넜다. 상심한 암곰은 자식을 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 후 이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으로 뒤집히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강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는 전설이다.
1972년 고마나루에서는 6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만들어진 곰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곰상은 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출토된 자리에는 사당인 웅신당(熊神堂)을 지어 곰을 숭배하고 있다. 백제와 공주는 정말 곰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고마나루에는 강변의 백사장과 모래 언덕 위에 솔숲이 조성되어 있다. 공주시를 굽이치는 금강에 큰물이 질 때마다 상류에서 급류에 실려온 깨끗한 모래가 고마나루에 긴 백사장을 형성한 것이다. 연미산 방향에서 보면 백사장의 흰 모래가 강변을 따라 길게 청정한 모래밭을 이루어 소상팔경에서 말하는 평사낙안의 명승지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모래밭 언덕 위로는 연륜이 오래된 소나무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나루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솔숲은 과거에 더 규모가 크고 길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마나루의 명승적 가치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20세기 들어 근대적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수운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고마나루도 1933년에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강교가 건설되면서 금강을 통한 수운이 급격히 쇠퇴했고 나루로서의 기능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마나루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문화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2006년 12월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고마나루는 근래에 크게 훼손될 위기를 맞았었다. 최근에 4대강 사업이 시행되면서 ‘금강살리기’ 계획의 일환으로 공주보가 고마나루의 바로 아래에 건설될 예정이었다. 이곳에 공주보가 건설되면 나루 주변의 수위가 크게 높아져 전통적인 모습이 크게 훼손될 상황이었다. 문화재청과 문화재 전문가들은 공주보의 위치를 옮기도록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당초보다 800m 정도 아래에 건설하도록 계획이 조정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고마나루는 사업으로 인한 영향이 최소화되어 명승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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