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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명승기
섬 속의 낙원을 알지 못하였구나

윤선도 원림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명승 제34호
소재지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완도에서 가기도 하지만 해남반도의 땅끝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보길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땅끝에서 보길도까지 뱃길로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지금은 노화도의 산양항까지 약 30분이면 된다. 산양에서 다시 육로로 10여 분 정도 달려 새로 만든 다리를 넘어가면 보길도 윤선도 원림에 다다른다. 보길도는 섬으로 이루어진 완도군의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격자봉을 중심으로 말굽 모양의 산줄기가 굽어 흐른 아늑한 곳에 윤 고산이 만든 윤선도 원림이 펼쳐진다. 이곳은 신선의 경역이다. 고산은 어찌하여 이렇게 외딴 섬에 그토록 아름다운 별천지를 조성했을까?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이라고 칭했다.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으며,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으로
芙蓉城是芙蓉洞
옛날 꿈꾸던 부용의 절경을 얻었네
今我得之古所夢
세상 사람 신선이 사는 섬 알지 못하고
世人不識蓬萊島
단지 기화와 요초만 찾고 있구나
但見琪花與瑤草

윤 고산이 부용동이라 부른 보길도는 중국의 부용성 선유고사(仙遊故事)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윤선도 원림은 신선이 노니는 선계가 분명하다. 본래 섬이란 소금기 묻은 해풍과 운무가 서리는 곳이다. 하지만 부용동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에 위치한 계곡임에도 불구하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청정한 땅의 기운과 시원한 들이 있고 파도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곳이다. 고목의 동백나무 숲이 무성하고,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에는 천연림이 울창해 깊은 산속을 연상케 한다.

고산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음유시인이다. 그는 〈오우가(五友歌)〉를 비롯해 〈만흥(漫興)〉, 〈조무요(朝霧謠)〉, 〈하우요(夏雨謠)〉 등 수많은 시와 노래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이곳 부용동에서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보길도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부용동 원림을 소재로 한 〈희황교(羲皇橋)〉, 〈석실모연(石室暮煙)〉, 〈소은병(小銀屛)〉, 〈귀암(龜岩)〉, 〈낙서재(樂書齋)〉, 〈낭음계(朗吟溪)〉, 〈미산(薇山)〉 등은 보길도 원림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정랑을 비롯해 호조, 예조 등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 50세 되던 해에 병자호란(1636)을 겪게 된다. 인조는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이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향리의 자제와 집안의 노복 수백 명을 모아 배를 타고 서해를 올라가 강화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는 청나라 군대에게 함락된 후였고 귀향하는 뱃길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울분으로 가득 찬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을 결심으로 제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수려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 보길도를 보고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고산은 보길도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격자봉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라 이름 지어 본제로 삼았다. 67세 되던 해에는 무민당(無悶堂)과 정성당(靜成堂)을 짓고 정자를 증축했으며, 큰 연못을 판 후 꽃나무를 심어 원림생활을 즐겼다. 윤 고산은 1671년 8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부용동을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고산이 주로 생활한 공간은 낙서재였다. 낙서재 뒤에는 소은병을 두었다. 이는 주자가 고향으로 낙향해 경영한 무이구곡에 자리한 대은봉(大隱峰)과 마주한 소은병을 본뜬 것이다. 당시 조선의 선비사회에는 주자의 은일철학을 흠모하고 세상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간에 은둔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낙서재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처음으로 주택을 짓고 생활하던 곳으로 풍수적으로도 혈처에 해당하는 길지다. 앞으로는 가까이에 조산이 나지막히 보이고 멀리는 동천석실이 조망되는 곳으로 최근에 건조물과 정원 시설이 복원되었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산은 낙서재 앞의 산인 미산(薇山)의 이름을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미산 옆의 산봉우리인 혁희대(赫羲臺)는 굴원의 옛 고사로부터 가져와 명명했다. 그는 부용동에서 생활하는 자신의 모습을 신선으로 승화시켜 중국의 선인인 희황(羲皇)에 자신을 비유하기도 하였으며, 승룡대(升龍臺)에 올라앉아 우화등선(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하는 기분으로 시가를 읊기도 했다.

낙서재 입구에는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고정원을 축조한 고산의 기발한 조경가적 수법을 볼 수 있다. 개울에 구들 모양의 판석으로 보를 막아 못을 만드는 특별한 방법으로 조성했는데 자연형의 계담(溪潭)과 사각의 방지(方池)가 세연정을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고산은 바다를 바라보며 〈어부사시사〉를 짓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가야금을 타며 계담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기도 했다.

세연정과 계담

계류를 판석보로 막고 자연의 형태로 조성된 계담과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다. 계담 주변은 활짝 핀 배롱나무, 가장자리에 식재되어 있는 수목과 세연정의 모습이 서로 어울려 매우 아름답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연지에서 1km쯤 올라가면 낙서재터 건너편 산중턱에 동천석실이 있다. 해발 100m 정도에 위치한 이 석실에는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 유적이 있다. 동천석실은 부용동 원림의 중심건물인 낙서재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앞산의 우거진 숲 사이에 자리한 바위 위의 조그마한 단칸 정자가 날듯이 올라앉아 있는 동천석실의 모습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이곳은 정자에 올라 부용동 전경을 내려다보는 전망 위치로도 으뜸이다.

부용동 원림은 고산의 조경에 대한 높은 안목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명승이다. 고산은 우리나라 조경사를 통해 볼 때 가장 기발한 작가이자 당대 최고의 조경가라 평가할 만하다. 천재적 안목을 지닌 조경가 윤 고산은 따사로운 봄날을 맞아 그가 정성들여 조영한 부용동 원림에서 보길도 앞바다를 향해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앞산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은 먼빛이 더욱 좋다

날씨가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낚싯대는 쥐고 있다 술병은 실었느냐
- 〈어부사시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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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펼쳐보기

출처

우리 명승기행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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