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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선비의 기개와 절의를 품은
일사대 일원
문화재 지정 | 명승 제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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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북 무주군 |
무주는 진안, 장수와 함께 ‘무진장’으로 불리는 전라북도의 산간오지다. 그런 무주에서도 구천동은 우리나라 산골의 진수를 보여준다. 북한의 삼수갑산과 함께 무주구천동은 깊은 산골의 대명사다. 옛날에는 구천동을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는데 ‘둔’은 험한 곳을 의미하는 글자다. 구천동계곡은 정말 ‘구천둔’이라는 표현이 꼭 맞을 정도로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구천동에 관한 지명은 연산군 때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유림의 한 사람이었던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덕유산을 오른 후 지은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 구천둔이란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허목은 〈덕유산기(德裕山記)〉에서 돌무더기가 수없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구천뢰(九千磊)로 표기했다. 윤명제(尹明齊, 1629~1724)는 《유광로산행기(遊匡蘆山行記)》에서 구천동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이후로 이 계곡을 구천동으로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구천동이 깊은 산골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산골짜기에 위치한 구천동계곡은 그야말로 심산유곡이다. 깊은 산속의 물줄기를 따라 구절양장으로 굽이굽이를 이루고 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원당천인데 무주와 무풍 사이를 지나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으로 흘러간다. 구천동계곡은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던 나제통문이 위치한 설천면 소천리에서부터 삼공리를 지나 덕유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을 말하며 그 길이는 무려 30km에 이른다.
이처럼 길게 형성된 구천동계곡은 굽이치는 물과 깎아지른 석벽, 울창한 송림 등 곳곳에 많은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경승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명칭과 수식어도 많다. 구천동계곡에는 주자가 경영했다는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모방하여 ‘무계구곡(武溪九曲)’이라 부르는 곳도 있고, 계곡 내에 있는 아름다운 절승지 33곳을 선정해 ‘구천동 33경’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구천동 33경은 9,000굽이를 돌아간다는 계곡의 굽이굽이에 학소대, 일사대, 추월담, 수심대, 수경대, 인월담, 청류동, 구월담, 금포탄, 청류계, 구천폭포 등의 경승이 늘어서 있는 것을 일컫는다.
구천동 33경 중의 하나인 일사대는 구천동계곡 3대 경승의 하나로도 손꼽히는 명소다. 다른 이름으로는 수성대라고도 하며 나제통문에서부터 약 5km, 학소대에서는 300m 정도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암반 위로 흐르는 하천을 건너면 서벽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맞은편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 마치 배의 돛대와 같은 형상의 거대한 이 기암이 바로 일사대다. 구천동 33경 중에서 제6경에 해당한다. 수십 길 낭떠러지의 석벽과 그 꼭대기 머리 위에 푸른 창송을 이고 있는 일사대는 원당천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단애로 이루어져 있다.
일사대는 거유(巨儒)로 칭송받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관련이 깊은 경승이다. 그는 송시열의 후손으로 1836년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학행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일찍이 서연관, 경연관의 벼슬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송병선은 오로지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 구한말 쇠퇴하는 국운을 주시하며 지냈다. 그는 고종의 스승을 지내기도 한 학자였다.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고종으로부터 18번이나 대사헌의 벼슬을 받았으나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춘추대의의 선비정신을 지녔던 송병선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통탄했으며, 1905년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을사조약으로 식음을 전폐했다. 그는 수많은 상소를 올려 나라를 팔아먹은 적신들의 죄를 엄히 다스리고 조약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임금 앞에 나아가 “폐하의 앞자리가 곧 제가 죽을 자리이니 주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05년 유소(遺疎)를 쓰고 자제, 문생, 전국 유림에게 고하는 유서를 만든 다음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처럼 송병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된 위기에도 굳건히 절의를 지키다 순절한 우국지사였다.
일사대는 송병선이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은거하며 서벽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무주를 중심으로 한 이 고장 선비들은 대나무와 같은 기개로 절의를 지키고 순국한 송병선을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 즉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 일컬었다. 일사대라는 명칭은 ‘동방일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푸른 바위의 깨끗하고 의연한 모습이 마치 송병선의 기품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병선은 구천동의 아름다움에 취해 계곡의 명소 아홉 곳을 선정해 무계구곡이라 불렀다. 무계구곡은 구천동 33경 중 계곡의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경승에 설정한 연계 경관으로 일사대는 제4곡에 해당한다. 일사대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한 바위에는 ‘무이동(武夷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선이 사는 무이의 동천이란 의미로 성리학을 중시한 송병선이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가 귀거래한 후 은일생활을 했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무계구곡의 중심에 위치한 서벽정은 주자가 경영한 제5곡 무이정사에 해당한다. 송병선은 이곳에서 후진 양성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과 이에 동조하는 무리, 당시의 어지러운 세태를 비판하고 분개했으며 영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기도 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 가장자리에 위치한 바위에는 “인간사를 영원히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인다(永棄人間事 吾道付滄洲)”는 송병선의 선대 할아버지 우암 송시열의 글이 각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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