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우리 명승기
염퇴의 강직한 기품이 흐르는

월연대 일원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명승 제87호
소재지 경남 밀양시
한원에 오래 머무름이 본래의 뜻이 아니니
久直鑾坡非宿志
신무문에 관을 걸고 언제나 돌아갈거나
掛冠神武幾時歸
임금님의 모자람을 바로잡지 못할 바에는
補闕拾遺嗟未得
고향에 돌아가 낚시하고 나무하는 것만 못하리
莫如歸去任魚樵
머리 돌려 바라보니 반산이 낙조를 머금었네
回首半山含落照
여윈 망아지 바삐 타서 갈기 잡고 채찍을 더하리라
促騎羸鬣强加鞭
- 〈한원직려회향(翰苑直廬懷鄕)〉

한원(翰苑)이란 한림원과 예문관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주이씨 가문 출신인 월연 이태(李迨, 1483~1536)는 중종 5년(1510)에 문과에 급제한 후 불과 3년 만에 예문관 봉교(정7품)로 고속 승진했다. 예문관 봉교는 당시에 세칭 ‘8한림’으로 불렸던 엘리트 관료가 맡았던 요직이었다. 월연은 경화(京華)의 명문거족 출신이자 영남의 사림이었던 인물로 문벌과 학식을 겸전한 사람이었다. 양녕대군의 외손인 이증석(李曾碩)이 그의 할아버지였고 세종대왕은 이증석의 작은 외할아버지, 즉 외5촌 숙부였다. 이처럼 월연은 한양의 화려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더불어 밀양박씨 박거겸의 딸인 할머니, 밀양에서 활동했던 진사 류자공의 딸이었던 어머니까지 진외가와 외가가 모두 밀양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월연도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남사림에 속하게 되었다.

월연이 벼슬에 있었던 중종대는 훈구세력과 신진세력이 대립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훈구세력의 엘리트 그룹에 속했던 월연은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다. 기묘사화 이후 권력을 농단한 권신 김안로가 보병(寶甁)에 글씨를 청하자 “내 팔이 어찌 권세 있는 사람 집의 병풍으로 인해 더럽혀질 수 있겠는가!” 하고 거절한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중종 14년(1519) 당시 함경도도사였던 월연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밀양으로 귀향했다. 미래에 재앙이 닥쳐올 것을 예감한 그는 과감하게 귀거래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그를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 칭하게 된다. 월연이 기묘완인이라 불리게 된 것은 기묘사화로 인해 많은 벼슬아치들이 화를 입었는데 그는 신체나 명예, 그 어느 것도 다치지 않고 전혀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에 월연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벗인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은 “삼공의 지위를 주어도 바꾸지 않을 월연(不換三公有月淵)”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월연은 밀양 지방의 학문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그가 밀양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한 곳이 바로 월연대였다. 월연은 본래 서울에서 출생한 후 부모를 따라 외가가 있는 밀양(당시 응천)으로 이거하여 자랐다. 따라서 밀양은 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기묘사화의 조짐을 예견하고 돌아온 그는 고향의 아름다운 강변에 노후를 보낼 거처를 마련한다. 1520년(중종 15) 월연은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를 짓고, 자신을 ‘월연주인(月淵主人)’이라 칭한다. 그는 이곳을 지극히 사랑했다. 날마다 이곳 쌍경당과 월연대에서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여생을 즐겼다.

밀양부의 공루였던 영남루에서 밀양강을 따라 상류로 3k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단장천과 밀양강이 합류하는 곳이 있는데, 이 지점 바로 아래 강변에 월연대가 위치한다. 밀양의 배후를 점하고 있는 추화산(243m)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여 그 앞으로 흐르는 밀양강을 향해 시야가 확 트여 있는 전망 좋은 누대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월연대 전경

월연대는 일원의 가장 북쪽에 자리하여 중앙에 구들방을 1칸 배치하고 주변에 마루를 두른 형태의 정자다. 특히 가파른 경사지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밀양강을 조망하기 좋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월연대는 본래 월영사(月影寺)라는 절이 있던 곳에 지어진 건물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사찰 자리가 서원이나 별서 등 유교문화를 나타내는 시설지로 바뀐 사례가 많았다. 사찰이 위치했던 자리는 대부분 경관이 뛰어난 명당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리에 유교를 상징하는 건물이 많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월연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에 위치했던 사찰의 이름과 나중에 지어진 누대의 명칭이 모두 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찰의 이름인 ‘달의 그림자(月影)’와 누대의 명칭인 ‘달이 비치는 못(月淵)’은 모두 월연대 앞을 흐르는 강물로부터 유래되었다.

월연대 편액

고향에 돌아온 이태가 지은 월연대의 편액이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밀양의 아름다운 경승지 12곳을 일컫는 ‘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 중 하나인 ‘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킨다. 비개인 맑은 밤하늘에서 교교한 달빛이 쏟아지는 월연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매월 보름이 되면 밀양강에 비친 둥근 달의 모습이 길게 달빛기둥을 이룬다 해서 이때의 모습을 월주경(月柱景)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월주가 서는 날인 기망일(旣望日)에 월연대에서는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또한 월연대의 빼어난 승경 12곳을 일컫는 ‘월연대십이경’에도 ‘징담제월(澄潭霽月)’을 제일로 들고 있는데, 이것은 거울 같은 못에 맑은 달이 비치고 있는 월연대의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월연대 별서 일원의 풍경은 정말 수려하다. 이 별서는 쌍경당과 제헌(霽軒), 월연대 등의 건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로는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이 물줄기는 ‘영월간(迎月澗)’이라 하여 ‘달을 맞이하는 실개천’이라는 뜻이다. 본래 영월간은 과거에 있었던 개울을 뜻한다. 현재의 개울은 20세기 초 철도가 부설되면서 지형이 변화되어 문중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밖에도 월연대 일원에는 다양한 경관 요소들이 있다. 쌍청교(雙淸橋), 수조대(垂釣臺), 탁족암(濯足巖), 행단(杏壇), 죽오(竹塢), 한림이공대(翰林李公臺) 등이 별서정원을 구성하고 있다.

쌍청교는 월연대와 쌍경당 사이를 흐르는 실개천 위에 놓인 다리를 말한다. 본래 목교로 만든 것이었는데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가 되었다. 또한 수조대는 월영연(月盈淵)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반석으로 낚시를 즐기던 자리다. 탁족암은 《맹자》에 나오는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탁하면 발을 씻는다(淸斯濯纓 濁斯濯足)”는 구절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외에 행단은 월연이 심었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이며, 죽오는 쌍경당 서쪽의 언덕 위에 자라는 죽림으로 현재는 오죽이 심겨져 있다. 한림이공대는 월연대 동쪽 벼랑 끝에 있는 반석으로 월연이 시를 읊던 장소인데 후세 사람들이 이름 지은 곳이라 한다. 이처럼 월연대 주변에는 별서정원 요소가 매우 풍부하다.

월연이 살았던 시대는 ‘중종반정’과 ‘기묘사화’라는 두 가지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그는 선비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이러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특히 출사 이후에 겪은 기묘사화로 많은 동료와 스승을 잃었다. 사화 이후에도 다시 한 번 복직하여 경세(經世)의 뜻을 품기도 했으나, 김안로의 방해로 지방관으로 좌천되자 완전히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월연은 과감하게 귀거래함으로써 염퇴(恬退)사상의 명철(名哲)로 평가받는 인물이 되었다. 염퇴란 관직에 있다가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을 뜻하는 말로 청렴결백하고 고절(高節)한 사대부가 도를 함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월연은 염퇴하여 도를 지킴으로써 온전히 품은 뜻과 몸을 보전하여 기묘완인이 될 수 있었다.

밀양강

월연대 일원에 세워진 월연정에서 바라본 밀양강의 풍경이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밀양강의 월연대에서 자신의 뜻을 강직하게 지키며 소요했던 월연 이태는 대나무를 특히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고절한 대나무의 기상을 흠모하며 지은 〈속세를 떠난 삶(幽居)〉이라는 시 2수를 남긴다.

터를 잡아 가꾼 정원 열 장만 한데
地卜芳園十丈寬
꽃과 나무를 심고 사계절 바라보네
只栽花木四時看
나그네 오거든 생활이 비천하다고 웃지 말게나
客來莫笑生涯薄
창밖에는 새로이 몇 그루의 대나무를 심었다네
窓外新添竹數竿

새해에 물가에서 친구를 만나보니
湖上新正逢故人
정이 깊어 내 가난을 비웃질 않네
情深應不笑家貧
내일 아침 이별하고 다시 문을 닫으면
明朝別後門還掩
긴 대나무 천 그루와 병든 나뿐이리
脩竹千竿一病身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펼쳐보기

출처

우리 명승기행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우리나라 명승지

추천항목


[Daum백과] 월연대 일원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