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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명승기
죽죽이 개척한 대재

죽령 옛길

명승 제30호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명승 제30호
소재지 경북 영주시

신라의 8대 임금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은 영토확장을 위해 소백산맥 너머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라고 죽죽에게 명령한다. 왕명을 받은 죽죽은 소백산 서쪽의 계곡을 따라 산맥 능선의 안부를 넘는 고갯길을 개척했다. 바로 죽령 옛길이다.

죽령 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이다. 큰 고개라는 의미로 대재라 부르기도 하는 도솔봉(1,314m)과 연화봉(1,394m) 사이의 가장 낮은 산허리를 넘어가는 길이다.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158)에 죽령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다”고 전해진다. 죽령 옛길은 충주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하늘재보다 2년 늦게 개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두대간은 강원도 동쪽 해안을 따라 흐르다가 태백산을 지나 내륙으로 향하면서 영남과 호서, 호남을 가르는 큰 산줄기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예로부터 대간의 산줄기를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는 양쪽 지방 사람들은 큰 산을 넘어야만 비로소 교류할 수 있었다. 죽령 옛길은 영남과 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고갯길 중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옛길로 고갯마루가 689m에 이른다. 따라서 개척 또한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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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옛길

죽령을 지나는 차도가 별도의 노선으로 개설된 후 옛길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영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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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지역으로 분쟁이 매우 심했다. 그래서 이 고갯길 역시 군사적인 목적으로 처음 열린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551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에 있는 열 개 고을을 탈취했다는 것과, 590년 고구려 영양왕 때 명장 온달(溫達)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죽령 지역이 그 당시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죽령은 한강과 낙동강 수계의 분수령이다. 동쪽사면은 낙동강 수계의 하나인 내성천 유역으로 내성천의 지류인 서천의 상류로 통하고, 서쪽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죽령천의 상류로 이어진다. 경상도에 해당하는 동쪽사면은 침식에 의해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하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죽령 옛길은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20세기 초 차도가 개설되기 전까지 죽령 옛길은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경상도 동북 지방에서 서울을 왕래할 때는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길에 올랐던 젊은 선비, 온갖 물산을 나르던 보부상들이 해마다 사시장철 넘나들던 길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이곳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과 마방들이 길목을 차지하게 되었고 죽죽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방상으로 매우 중요한 고갯길인 죽령은 삼국시대 이래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과거길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죽령 옛길을 넘어가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영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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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내륙을 종단하는 중요한 길들은 모두 죽령을 지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차도가 개설되었는데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경사를 유지하기 위해 등고선을 따라 굴곡이 심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1941년에는 죽령을 통과하는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죽령 구간은 지하로 4,500m나 되는 긴 터널을 뚫어 통과하고 터널의 동쪽에는 희방사역, 서쪽에는 죽령역이 개설되었다. 이 철도는 경사가 심한 고개를 통과하는 바람에 원형의 ‘또아리굴(금대2터널)’을 파서 360도 회전하며 내려간다. 이와 같은 두 개의 큰 터널 외에도 죽령의 양쪽 경사면을 통과하는 중앙선 철로는 많은 굴을 지나간다. 또한 20세기 말에는 중앙고속도로가 만들어졌는데 이 역시 죽령 구간을 터널로 통과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지나는 죽령은 우리나라 내륙의 중앙부를 종단하는 중요한 길이다.

다양한 교통로

죽령에는 옛길, 철로, 신작로, 고속도로 등 매우 다양한 도로가 있다. 이곳이 교통의 요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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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의 등장으로 죽령 옛길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경사가 심한 구간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이 별도의 노선으로 개설되면서 옛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옛길의 문화 경관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문화재청에서는 죽령 옛길을 비롯한 다수의 옛길을 명승으로 지정했다.

옛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잘 활용한 사례는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9세기에 주로 이용되었던 중앙부에서 서부에 이르는 산타페 마차길(Santa Fe Trail)이 유명하다. 1880년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사용된 길로 옛 교통수단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에는 옛길을 복원하고 단절 구간을 연결하여 만든 자연보도가 있다. ‘도카이 자연보도’는 총연장이 1,697k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초 ‘조국순례 자연보도’라는 명칭으로 옛길을 찾아 단장하는 사업을 일시적으로 시행한 적이 있다. 죽령 옛길도 이 사업의 일환이었는데 당시 옛길을 정비하고 안내판, 편익 시설 등을 조성했으나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따르지 않고 활용 프로그램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는 등의 문제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일회성 전시행정의 표본과도 같은 사업이었다.

죽령 옛길의 명승지정은 옛길이 지니고 있는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국가에서 인정한 것으로 옛길의 품격을 문화재, 국가유산으로 격상시킨 것을 의미한다. 국민의 문화의식이 매우 높아져 있는 현시점에서 볼 때 옛길은 선조들의 발자취와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보존과 활용이 필요하다. 옛길 주변에 있는 자연 경승은 물론 다양한 문화 경관과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 특히 주변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희방사역, 죽령역, 죽령폭포, 도솔봉, 연화봉 등과 효율적으로 연계하여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문화재 활용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할 것이다.

장승군

죽령 옛길 고갯마루에 위치한 장승군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노변 점경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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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펼쳐보기

출처

우리 명승기행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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