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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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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아달라이사금 31) |
본명 | 박아달라(朴阿達羅) |
국적 | 신라, 한국 |
재위 | 154년∼184년 |
능묘 | 경주 배동 삼릉(慶州 拜洞 三陵),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 |
요약 신라 제8대 왕이자 일성이사금의 장남으로 성은 박, 이름은 아달라, 칭호는 이사금. 재위 기간동안 소백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이어지는 계립령길과 죽령길을 개통했는데 이 길은 이후 신라가 고구려 남동쪽과 백제의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는 주요한 통로가 마련되었다. 왜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여 왜인 및 왜국 사신의 내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는167년과 170년 2차례에 걸쳐 충돌이 있었으나 왕이 직접 8,000명을 이끌고 한수에 다다르자 사로잡았던 주민들을 돌려보내고 화친했다고 한다.
신라의 제8대 왕. 아달라왕이라고도 한다. 일성이사금의 큰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며, 비(妃)도 박씨로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키가 7척이며 코가 크고 얼굴 모양이 기이했다고 한다.
156년 계립령, 158년에는 죽령의 길을 개통했다. 재위중에 왜인과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158년 왜인의 방문이 있었고, 173년에는 왜국 여왕 히미코(卑彌乎)의 사신이 내방한 적이 있다.
한편 165년에 반역을 도모하다 도망한 아찬 길선을 백제가 돌려보내지 않은 뒤로 167, 170년 2차례에 걸쳐 백제와의 충돌이 있었다. 특히 167년 충돌 때에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1,000여 명의 주민을 사로잡아가자, 일길찬 흥선을 시켜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고 왕이 직접 기병 8,000명을 이끌고 한수에 다다르니 백제가 주민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했다고 한다. 아직 사로소국 단계의 신라가 원거리까지 출병하여 백제와 충돌한 점에서 이를 남하하는 과정의 석씨 집단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도상의 문제를 들어 아달라이사금대의 연도를 보다 뒷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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