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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다른 표기 언어 申砬 동의어 신임, 申臨, 입지, 立之, 충장, 忠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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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46년(명종 1)
사망 1592년(선조 25)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신립은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립

ⓒ Whd9596 / wikipedia | CC BY-SA 3.0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관은 평산.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경력·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왔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邊協)과 함께 출진했으나, 5, 6일이 지나도 적의 기척이 없으므로 철수했다.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해 10월 갈파지보(乫波知堡)에서 수졸(戍卒)을 참형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592년에는 변방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아 경기·황해 지방을 돌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岉)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安敏)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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