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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모네

〈연작 시리즈〉

빛과 색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그림 작업은 과학자의 연구 과제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는 1889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근 40년간 계절, 날씨, 시간은 다르지만 한 장소에서 같은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탐구하였다. 과학자의 탐구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상당히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 연구과제명 : 분광분석법에 의한 물질 표면의 색채학적 연구
• 연구책임자 : 클로드 모네
• 연구기간 : 1889~1926년
• 연구방법 : 분광분석법
• 실험기기 : 모네의 눈

체계적인 연구로 탄생한 연작

모네는 불혹에 접어들면서 그림이 별로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때 파리 백화점 부호인 에르네스 오슈드와 친해지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파리에 가면 오슈드의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결국에는 그의 아내 알리스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1878년 오슈드의 백화점이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하였다. 그러자 모네는 파리 서북쪽 센 강가의 베퇴이유에 있는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하여 마침내 두 가정이 한집에서 살았다.

1879년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알리스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떴다. 시름에 잠겨 붓을 못 잡던 모네는 알리스의 위로로 생기를 되찾고, 1883년 지베르니에 정착하며 다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지베르니는 파리 서북쪽에 있는 센강과 에프트강이 만나는 아름답고 작은 동네이다.

1891년 오슈드가 사망한 뒤 모네는 알리스와 재혼하였고, 이후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1926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연작 연구에 몰두하였다.

같은 장소,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간에 그리는 연작 시도는 1878년 베퇴이유에 이주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연작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건초더미〉, 〈포플러〉, 〈루앙 대성당〉 연작을 세 점씩 살펴보도록 하자.

〈건초더미〉 연작
모네, 연작 시리즈, 〈건초더미〉 연작, 1889~91년경(그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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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연작 시리즈, 〈건초더미〉 연작, 1889~91년경(그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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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연작 시리즈, 〈건초더미〉 연작, 1889~91년경(그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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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연작
모네, 연작 시리즈, 〈포플러〉 연작, 1891년(그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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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연작 시리즈, 〈포플러〉 연작, 1891년(그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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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연작 시리즈, 〈포플러〉 연작, 1891년(그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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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대성당〉 연작
모네, 연작 시리즈, 〈루앙 대성당〉 연작, 1892~94년경(그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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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연작 시리즈, 〈루앙 대성당〉 연작, 1892~94년경(그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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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연작 시리즈, 〈루앙 대성당〉 연작, 1892~94년경(그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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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색채 탐구

모네는 이미 그렸던 장소가 또 다르게 느껴지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경이를 접하고 그 느낌을 화폭에 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여기에 제시한 세 점의 〈건초더미〉 중에서 그림1은 그림자로 보아 늦은 여름 오후 해질녘의 풍광으로 그림자가 녹색으로 표현되었다. 그림2는 같은 계절이지만 아침의 맑은 햇살을 듬뿍 받은 것이고 그림자는 붉다. 그림3은 그림2와 같은 아침 시간이지만 겨울에 눈이 내린 모습이다. 눈은 하얗지만 그림자를 파랗게 그렸다. 눈이 부시게 하얀 겨울 아침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이 그림들을 그리던 당시에는 이미 모네의 명성이 대단하여 전세계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몇 점이라도 사기 위해 줄을 서곤 했다. 모네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족했기 때문에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현대 추상화의 대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에서 추상 개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북쪽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플러 나무는 모네의 그림에서 마술 같은 매력을 나타냈다. 멋있게 줄지어 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은 모네가 보려고 하였던 바람, 햇빛, 물의 영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프랑스에 소개된 일본인 화가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 1760~1846)의 〈후지산 36경〉 연작 판화는 모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준 것 같다.

〈후지산 36경〉 연작
호쿠사이, 〈후지산 36경〉 연작 중 6경, 1825~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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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 〈후지산 36경〉 연작 중 6경, 1825~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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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 〈후지산 36경〉 연작 중 6경, 1825~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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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 〈후지산 36경〉 연작 중 6경, 1825~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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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 〈후지산 36경〉 연작 중 6경, 1825~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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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 〈후지산 36경〉 연작 중 6경, 1825~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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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에게는 자연뿐 아니라 인공 건축물도 연구 대상이 되었다. 지베르니에서 가까운 루앙의 대성당을 자주 그렸다. 그림7은 흐린 날씨에 그린 것이며, 그림8과 그림9는 햇빛을 잘 받을 때 그린 것인데 시간과 날씨에 따라 성당의 돌벽은 분홍빛, 금빛으로 나타난다. 이미 오랫동안 풍화 작용에 의해 고유한 반사체를 만든 돌벽은 모네의 눈앞에서뿐만 아니라 그림을 관람하는 우리 눈앞에서도 막 풍화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당시에 이 연작에 대한 지식인과 언론 들의 찬사는 가히 성인에 대한 숭배에 가까웠다. 이제 같은 작업을 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은 모네에 대한 질투를 넘어서 그를 동료라기보다는 넘을 수 없는 스승처럼 인식하였다. 사람들은 날씨와 빛에 따라 변화하는 대기와 물체의 표면을 파악하는 모네의 특별한 색채감각에 완전히 홀렸다.

인상주의에 대한 오해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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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앞 일본식 다리가 있는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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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진 모네는 지베르니 집의 정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일본식 다리를 놓은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었으며, 정원에는 대나무·벚나무 등을 심어 일본풍으로 꾸몄다.

그리고 집에서 정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리도 나타내는 등 연못의 전체적인 경치를 그렸으나 점차 화면이 좁아지고 나중에는 물의 경계도 없이 수련만 남았다. 이제 수련은 모네의 특허품이 되었다.

모네, 〈지베르니 정원〉, 1900년, 캔버스에 유채, 81×92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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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대중적 인기로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1895년 친구처럼 지내던 베르테 모리소가 사망하고, 1911년에 두 번째 아내인 알리스도 그의 곁을 떠났다. 또 1903년에는 피사로, 1917년에는 드가, 1919년에는 르누아르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모네는 완전히 혼자 남았다.

1914년 아끼던 큰 아들 장이 매독으로 세상을 뜨는 것을 지켜본 모네는 자신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고 친구인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 총리에게 자신의 그림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1920년 파리 중심가에 있는 튈러리 공원 내 오랑제리에 모네의 수련 그림을 위한 미술관을 기공하여, 1927년 모네가 사망한 지 몇 달 뒤에 완공하고 개관하였다. 타원 벽에 맞춰 제작한 그의 마지막 대작들이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 폭은 모두 2미터이며 길이는 벽에 따라 2미터, 4.25미터 혹은 6미터가 되는 것도 있다.

모네, 〈수련〉, 1906년, 캔버스에 유채, 93×90cm, 미국 시카고 미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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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탄생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사회의 주체와 그림의 주요 고객이 왕족과 귀족에서 새롭게 대두한 시민계급으로 이행함으로써 인상주의가 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당시의 시민계급은 급격한 신분상승의 결과로 오히려 왕족과 귀족을 흉내 내려 하였다. 그래서 초기 인상주의는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으며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인상주의 화가 중에는 부자 출신이 많았다. 그림으로 먹고 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당시 발명된 사진이 초상화 시장을 빼앗았기 때문에 사진처럼 사실적이지 않은 그림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연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제1회 인상주의전이 사진작가 나다르(Gaspard Felix Tournachon, 1820~1910)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것을 보면 인상주의 작가와 사진가 들이 오히려 가까운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인상주의는 사실 당시에 막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과학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투명한 빛이 모든 색으로 분광될 수 있으며, 물체가 고유한 색을 지닌 것이 아니라, 빛이 물체에 닿고 투과하고 반사하면서 파장이 다른 스펙트럼에 의해 색이 결정된다는 것을 과학이 알려준 것이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의 향연을 병치혼합 기법으로 재현하면서 인상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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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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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연작 시리즈〉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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