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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가 예술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순전히 로트렉(Henri-Marie-Raymonde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 덕분이다. 우선 포스터 상단과 하단에 나타난 글의 내용을 보자.
상단 : Moulin Rouge, Concert Bal, Tous les Soirs, La Goulue
물랭루즈 카바레에서 매일 저녁, '라 글뤼'라는 댄서의 무대가 있다.
하단 : les Mercredis et Samedis, Bal Masque
수요일, 토요일마다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미술 애호가의 수집품이 된 유흥업소 포스터
1889년 조셉 올러(Joseph Oller)와 샤를 지들러(Charles Zidler)가 르누아르의 그림에도 나오는 갈레트 풍차 바로 옆에 카바레 겸 무도장 물랭루즈를 개장하였다. 물랭루즈는 '빨간 풍차'라는 뜻이다. 이곳은 곧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의 밤의 명소가 되었다.
라 글뤼'(La Goulue : '욕심이 많다'는 뜻)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스 웨버(Louise Weber, 1866~1929)라는 댄서는 나중에 프랑스 캉캉 춤의 전형이 된 '샤위'(chahut)라는 춤을 춰서 유명해졌다. 샤위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다리를 계속 머리 위로 쳐들다가 마지막에는 두 다리를 곧게 앞뒤로 펴서 바닥에 주저앉는 동작으로 끝나는 열정적인 춤이다.
'뼈가 없다'는 뜻의 '르 대조세'(Le Desosse)라는 별명을 가진 발랑탱(Jacques Renaudin 'Valentin', 1843~1907)은 코, 턱, 광대뼈가 뾰족한 독특한 외모에 반짝이는 중절모와 양복을 입고 다니며 춤을 대단히 열정적으로 추었다.
이 포스터는 발랑탱과 라 글뤼가 춤추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당시 석판화로 약 3,000장을 제작하여 파리 전역에 붙였는데, 독특한 색채와 예술 감각으로 수집가들이 뜯어가 버리는 일이 빈번하였다.
로트렉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며 중요하다. 그에 의하여 일러스트 혹은 포스터라 불리는 장르가 예술로서 대접받게 되었고, 석판화도 비로소 기법적 완성을 보아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로트렉은 석판화 포스터를 만들기 전에 효과를 보기 위해 그림을 먼저 그렸는데 크레용, 파스텔, 유화, 수채화 등 거의 모든 재료를 동원하였다. 특히 수채화를 진하고 두껍게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전에는 없던 기법이다. 포스터는 인쇄 효과가 나야 하기 때문에 광택이 있으면 안 되므로 유화나 수채화를 쓸 수 없었다.
이후 디자이너즈 가슈(Designers' Gouache)라는 첨단 화구가 탄생했다. 쉽게 말하면 무광 불투명 수채물감이다. 이것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포스터컬러라고 부른다.
로트렉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상업미술가가 아니라 순수미술을 하는 화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포스터들을 보면 마케팅에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물랭루즈(Moulin Rouge)라는 글귀를 세 번 반복하여 시선을 모음으로써 보는 사람의 뇌 속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춤추는 사람들로 만든 검은색 배경은 밤의 축제를 잘 나타낸다. 전체적인 색은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된 라 글뤼의 환상적인 춤 자태와 발랑탱의 독특한 실루엣이 보는 사람들의 기억 속을 파고든다.
액자 속 미술을 미디어로 끌어내다
로트렉은 1,000년 이상을 내려오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인 알퐁스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몸이 허약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로 올라와 열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불행하게도 로트렉은 열세 살과 열네 살 때 두 번에 걸친 사고로 하반신 발육이 정지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다리가 짧고 키가 152cm밖에 안 되는 기형적인 외모를 갖게 되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신체에 대한 열등감과 귀족 신분으로서의 자존심이 묘하게 뒤섞여 사회에 반항적이고 관습에 따르지 않는 외곬의 성격이 되었다. 아마도 스스로 말했듯이 다리의 장애가 없었다면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로트렉은 모네, 고흐, 드가 등과 함께 후기인상파 시기에 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화풍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많은 인상파 화가와 교류가 있었으나 공부를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들의 이론에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었다. 반항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주위의 염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와 술에 빠져 지냈다.
로트렉은 평생 인물만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사회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과 내면의 슬픔을 그만의 독특한 필치로 그려냈다. 무대는 대개 카바레, 술집, 빈민가 등이었다.
로트렉은 포스터만 그리지는 않았다. 〈세탁부〉는 초기의 유화 작품으로, 그의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일하는 장면이 아닌 쉬는 장면에서 진짜 피곤함을 잘 드러냈다. 탁자에 손을 짚은 어깻죽지에 힘이 들어가 있고, 왼쪽 골반도 힘을 줘서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꽤 오랫동안 서 있었기에 다른 한쪽 발의 힘을 빼고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 다문 입과 방향이 없는 무표정한 시선에서 절망감과 내면의 슬픔에 녹아 있는 분노까지 보이는 듯하다. 로트렉의 또 다른 명작 〈로자 라 루스〉는 그가 즐겨 그렸던 소재인 거리의 카르멘을 그린 것이다.
1885년 로트렉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거리 몽마르트르에 정착하였고, 이후 '몽마르트르의 영혼'으로 불리었다. 그곳에서 그는 카바레와 술집과 창녀촌을 들락거리며 환락가의 내면 모습을 그렸다. 그는 수많은 포스터를 석판화로 제작하며 파리를 정복해 갔고, 술은 그를 정복해 갔다. 서른이 넘어서는 알코올중독에 의한 정신이상 증세까지 생겨 요양소에도 들어갔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지극한 돌봄도 소용없이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로트렉의 사후 남아 있던 그림들은 그가 태어나 자란 알비의 미술관에 기증되었고, 미술관은 이름을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으로 바꾸었다.
37년의 짧은 세월에 삶도 모범적이지 않았으나 로트렉이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그는 평생 거의 책을 읽지 않았으나, 그를 연구하고 그를 묘사하는 책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출판되었다. 그는 액자 속에 있던 미술을 미디어의 세계로 이끌어 낸 선구자로서 어쩌면 현대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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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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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물랭루즈 라 글뤼〉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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