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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들을 시간의 역사에 따라 훑어 오다가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만나면 누구나 깜짝 놀라게 된다. 갑자기 나타난 생생한 색감과 놀라운 테크닉 때문이다. 이전의 그림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화려한 색채와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표현을 보고 "1400년대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었을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그림과는 너무도 다르므로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엄청난 놀라움을 안겨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 까닭은 바로 물감에 불포화지방산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불포화지방산이 물감에 이용된 까닭
유화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이크(Jan van Eyck, ?~1441)는 식물성 불포화지방산인 아마인유(linseed oil)를 이용하여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정교한 붓질이 가능한 유화 기법을 완성하였다. 지금도 대부분의 유화 물감에는 아마인유가 포함된다. 불포화지방산은 지방산 사슬 중에 불포화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녹는점이 낮아 상온에서 액체 상태이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불포화기가 가교결합을 하며 굳어져 단단한 도막을 형성하는데, 바로 이 점을 그림물감에 이용한 것이다.
유화의 발명 이후로 거의 모든 서양화는 유화를 사용하게 되었다. 유화 이전까지는 이 역할을 달걀노른자로 한 템페라로 그림을 그렸으며, 그 이전에는 석고 위에 수성 물감을 스미게 하는 프레스코로 그렸다. 프레스코는 스미고 번져서 색감이 뿌연 데다 정교한 묘사가 불가능했다. 템페라는 붓질이 좀 나아지고 광택도 약간 있었으나 유화에 비해서는 많이 떨어졌다. 이 그림의 강아지를 보면 털 하나하나까지 손에 잡힐 듯 정밀하게 묘사되었는데 템페라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정교함이다.
유화는 당시 수요가 가장 많은 그림 장르인 초상화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다른 그림보다 광택이 뛰어나서 그림의 주인공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효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에이크가 처음으로 유화를 사용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 의하여 유화가 제대로 성과를 나타내고 기법이 집대성되었기에 흔히 그를 '유화의 창시자'라고 한다.
에이크는 1441년에 죽었으나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술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대가이지만 1422년 이전의 그의 생활과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어디서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1420년경 갑자기 화려하게 등장하여 플랑드르 지방의 강력한 지배자였던 부르고뉴 필립 공작(Phillippe Le Bon, duc de Bourgogne, 1396~1467)의 궁중화가로, 시종무관으로 상류사회에 얼굴을 알렸다. 외교 수완이 뛰어나 공작을 대신하여 중요한 외교 회담을 맡기도 하였다. 형 후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1370~1426)도 화가인데 형이 시작한 벨기에 겐트의 〈성 바보 성당의 제단화〉를 동생 얀이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자의 시선으로 그림 속 소품을 읽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이전까지 그려진 대부분의 이탈리아풍 그림과 달리 대단히 사실적이고 소품 하나하나까지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어느 소품도 우연히 들어가진 않았으며 치밀한 계산과 상징을 담고 그려 넣은 것이다. 원래 이 그림에는 제목이 없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그린 그림이란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 아주 많이 들어 있어 〈아르놀피니의 결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우선 그림의 한가운데에 가장 밝게 강조해 그린 것이 맞잡은 손이다. 남녀가 손을 맞잡은 것은 결혼을 나타낸다. 더구나 남자는 오른손을 들고 서약하는 자세까지 취하고 있다. 가운데 위쪽의 샹들리에를 보면 많은 촛대 중 하나에만 불이 켜진 초가 놓여 있다. 왜 촛불을 하나만 켰을까? 게다가 창을 보면 밝은 낮이다. 이 촛불은 바로 혼인 양초이다. 중세 이래 결혼식에서 촛불은 중요한 상징물이며, 단 하나의 촛불은 태초의 빛을 상징하여 결혼이라는 신성한 신의 섭리가 시작함을 알린다.
신성한 결혼의 종교적 의미를 위해 가운데 거울 옆에 천주교의 묵주도 보인다. 침대 모서리 위에 있는 작은 목각은 아기 잉태의 수호성녀인 성 마가리타가 사탄을 나타내는 용을 밟고 있는 모양인데 이 결혼이 사탄의 침입 없이 영속되고 아이도 잘 낳아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는 열망을 담았다.
벽에는 솔이 하나 달려 있는데 이것은 성수를 뿌리는 솔로 보인다. 반대편 창가에 놓인 과일들도 종교적으로 인류의 원죄를 상징하는 금단의 열매를 그리고 있다. 강아지는 충성을 상징하는데 결혼 당사자들의 정절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림 왼쪽 아래에 신발을 벗어 놓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 5절의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에 근거하여 이 결혼이 신의 축복을 받은 신성한 예식임을 나타낸다.
이 그림에 사용된 소품들은 종교적 신성함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의 지위와 능력도 나타낸다. 남자는 귀족이나 입는 비싼 자줏빛 털 망토를 입었으며, 여자는 당시 유행하던 녹색 드레스를, 그것도 아주 비싼 털로 된 드레스를 입었다. 창가의 사과 밑에 있는 오렌지는 당시 부자만 먹을 수 있던 고급 과일인데 평범한 자리에 놓음으로써 부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진짜 이 그림의 가치와 내용을 나타내는 두 가지가 남았다. 그것은 가운데 있는 둥근 볼록거울과 그 위에 쓰인 글이다. 에이크는 그림 가운데에 볼록거울을 그려서 방 반대쪽의 정경을 그려 넣었다.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어안렌즈를 쓰지 않고도 교묘하게 방 전체를 그린 셈이다.
거울에는 두 사람이 보인다. 율법 중의 율법이라는 『구약성경』 「신명기」 19장 15절에 보면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참이라고 했고,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17절에서 예수도 율법에서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참이라 하였다. 거울 안의 두 사람은 바로 결혼을 보증하는 입회인인 것이다. 볼록거울 바로 위에 "얀 반 에이크가 1434년 여기에 있다"라는 글을 써 넣은 것으로 보아 그 중 한 사람은 아마도 에이크 자신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이 증인도 되고, 이 그림은 결혼증서 역할을 하고, 자신의 서명도 한 것이다. 결혼증서 같은 볼록거울 주변에 있는 열 개의 원형 속에는 '그리스도의 고난'(Passion of Christ) 장면이 그려져 있어 신성한 결혼 서약에 엄숙함을 더한다.
신부의 배가 너무 불러 있어서 혹시 임신 중이 아닌가 하는 설과, 결혼은 교회에서 신부 앞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입회인 두 사람만 놓고 몰래 하는 결혼이라는 설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몇 가지 추측할 수 있는 상징은 있다.
신부의 머리에 쓴 헤어드레스는 흰색으로 처녀를 뜻하고 순결을 상징한다. 또한 허리를 가는 끈으로 질끈 매고 있는데 임신 중이라면 이렇게 허리를 가늘게 맬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여자들은 가는 허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허리를 매우 강하게 죄고 치마는 풍성하고 길게 하였다. 에이크의 또 다른 작품인 〈성 바보 성당의 제단화〉에 그려진 이브에서도 볼 수 있듯이, 풍만하게 나온 복부와 그에 대비되어 더욱 강조되는 가는 허리는 당시 이상적인 여성미의 표현이었다.
신부 드레스를 칠한 녹색이 눈을 끈다. 이 녹색은 말라카이트 그린(malachite green)이라는 성분으로, 구리 광맥 속에서 가끔 출토되는 구리 리간드의 구리 카보네이트(copper carbonate)다. 대단히 아름다운 이 녹색 성분의 진품은 kg당 100만 원이 넘는다. 이런 비싼 안료를 화면의 넓은 부분에 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의 의뢰인은 대단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색은 지금은 합성으로 만들지만 여전히 '말라카이트 그린'이라는 고유의 아름다운 이름을 유지하며 많은 화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침대 색은 정열적인 빨강으로 하였는데 녹색 드레스와 보색 관계에 있어서 그림 전체에 대단한 생동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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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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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르놀피니의 결혼〉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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