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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춤추는 스펙트럼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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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1853년 네덜란드 남부의 그루트 준데르트에서 존경받는 목사 테오도르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흐의 부모는 첫 아이를 낳았으나 곧 죽고 꼭 1년 뒤 같은 날 고흐를 낳자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지어 주었다. 첫 아들의 대리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생 출발이었다.

모네가 위대한 화가가 되기까지 고모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듯이 고흐는 네 살 아래의 동생 테오의 보살핌으로 화가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고흐의 가족 중에는 미술과 관련한 사람이 많다. 외사촌인 안톤 모브(Anton Mauve, 1838~1888)는 네덜란드 헤이그파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유명한 화가였고, 세 명의 숙부가 화상(미술품 판매상)이었으며, 평생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도 화상이었다.

고흐는 열여섯 살 때 첫 사회생활을 구필화랑에서 시작하였다. 그의 우울한 인생은 화랑이 번창을 거듭하여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아 갔다가 거기서 첫사랑을 하게 되고 실연을 당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어 파리 지점으로 전근 가서 얼마 안 되어 해고당하였다.

고흐는 신앙심이 열렬했고 희생심도 강했다. 그래서 187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단기 목사 양성 과정을 수료한 뒤 벨기에 남부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즈의 부목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전도에 몰두했다. 그러나 너무 진보적이고 과격한 선교 태도로 동료 목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중의 이해도 받지 못하였다.

고흐는 마침내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러나 신앙심은 늘 그의 삶의 바탕이 되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삶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적이 많았다. 임신 중인 병든 창녀 시앤을 만나 동거한 것도 그의 이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처럼 어둡고 강렬한 화가의 삶

고흐는 1886년 동생 테오가 사는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로트렉, 베르나르, 고갱 같은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색채가 밝아졌다. 이전까지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인 렘브란트와 밀레의 영향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네덜란드 화풍의 어두운 그림만 그렸다. 파리에서 색을 섞지 않고 병치하여 밝은 색채를 구현하던 인상파를 만나 깊이 감명받고 그런 방향으로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 온 1886년을 끝으로 인상파 회원전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고흐의 영원한 후원자인 테오가 더 이상 그의 무절제하고 과격한 태도를 못 참을 지경이 되고, 아무도 고흐의 집을 찾아오지 않게 되자 그는 파리를 저주하며 남프랑스의 아를로 갔다.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1.5×114.5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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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은 파리와 달리 남프랑스의 강렬한 태양이 노랗게 이글거렸다. 여기서 고흐의 이글거리는 독특한 화풍이 완성되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를 의식하여 그린 것인데 그의 불타는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노란색과 보라색의 보색 대비를 극명하게 사용하여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해바라기〉 시리즈와 함께 노란색은 곧 고흐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당시 고흐는 화실로 쓰던 집도 노란색으로 칠했는데 이 집은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그 건너편에 고흐 미술관이 있다. 그의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도 바로 여기에서 그린 그림이다.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캔버스에 유채, 64×80.5cm, 네덜란드 오텔로 크륄러뮐러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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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들은 밝은 색을 유지하기 위해 색을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원색을 그대로 화면에 병치시켜 관람자의 망막에서 혼합이 되게 하는 특별한 방법을 썼다. 그러나 화가 개인에 따라 병치하는 색점은 다르다. 고흐는 뱀처럼 꾸불거리는 스펙트럼 색띠를 병치하여 이글거리는 감정을 독특한 필치로 나타냈다.

아를에서 고흐는 고갱과 잠깐 같이 살다가 다툼 끝에 귀를 잘랐고, 그 사건 이후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갱이 떠나간 뒤 외로움으로 괴로워하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화면의 모든 색이 꿈틀거리며 분노로 몸부림치고 있다. 광기가 느껴진다. 그는 당시에 밤경치를 많이 그렸다. 아마도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을 것이고 밤에 거닐거나 밤경치를 바라보는 때가 많았을 것이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중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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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부터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인상주의에 와서야 이젤을 들고 야외에 나가서 그렸다. 이들은 낮에 햇빛의 변화로 생기는 색채의 향연을 그렸다. 밤의 감정을 고흐같이 잘 나타낸 화가는 없었고, 그에 의해 야간 야외 풍경화가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 밤의 카페〉, 〈아를 광장의 밤의 카페 테라스〉 등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100만 배로 뛴 고흐의 그림 값

고흐는 평생 단 한 점밖에 작품을 팔지 못하고 생계는 전적으로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그가 죽기 5개월 전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약 10만 원)에 팔린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미술품 판매 일을 하던 동생 테오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을 때 고흐가 자살했는데, 화가가 죽은 뒤에 그림 값이 치솟는다는 이야기를 평소에 여러 번 한 것으로 보아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과 그를 도우려는 마음으로 자살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흐가 자살한 지 7년이나 지나서 〈가셰 박사의 초상〉이 고작 300프랑(약 7만 원)에 팔렸다. 60년 뒤 1957년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크리스 공장〉이 86,600달러(약 8천만 원)에 팔렸고, 1987년 경매에서는 〈해바라기〉와 〈수선화〉가 2억4천만 프랑(약 576억 원), 3억2천만 프랑(약 768억 원)을 기록하다가, 1990년 〈가셰 박사의 초상〉이 8천250만 달러(약 800억 원)에 경매되며 2004년 당시 사상 최고 그림 값을 기록하였다. 사후 7년까지 7만 원 하던 그림 값이 60년 뒤에는 300배, 다시 90년 뒤에는 100만 배가 된 것이다.

고흐의 그림 값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1889년 고흐가 죽기 전 해에 동생한테 보낸 편지에 "어제 밀레의 〈안젤루스〉라는 그림이 50만 프랑에 팔렸는데, 대중이 밀레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가졌던 생각을 공감한다는 걸까?"라고 썼다. 아마도 고흐는 밀레를 상당히 부러워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뒤바뀐 처지다. 그가 생전에 그렇게 부러워하던 밀레 그림 값의 최고가는 고흐 그림 값의 최고가에 비하여 24분의 1밖에 안 된다. 물론 그림 값이 그림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나, 현대인의 취향과 가치관으로 매겨진 척도는 될 것이다. 철저히 외면받은 그의 그림이 이젠 세계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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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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