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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보슈

〈쾌락의 동산〉

500년 전의 기괴한 SF

보슈, 〈쾌락의 동산〉, 1500년, 패널에 유채, 양쪽 : 220×195cm, 중앙 : 220×3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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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동산〉이라는 3단 제단화(Triptychs Altarpieces)는 산만함을 너머 기괴하기까지 한 초현대적인 뉴에이지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그림은 르네상스도 아직 깨어나지 않았던 고딕 후기에 해당하는 1500년경에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 1450~1516)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화가가 에이크, 다 빈치 등임을 생각하면 얼마나 파격적인 그림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세기를 뛰어 넘는 천재라는 다 빈치도 상상력에서는 보슈를 넘어서지 못했다. 〈쾌락의 동산〉에서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쉽지 않고, 초현대적 SF(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마법적 연금술 설명서 같기도 하다. 작은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수많은 발명품에 더욱 놀라게 된다.

베일에 싸인 화가

보슈의 본명은 제롬 반 아켄(Jerome van Aken)이다. 생애에 관하여는 알려진 것이 극히 적다. 그의 가족이 거의 전 생애를 플랑드르의 헤르토겐보슈(Hertogenbosch)에서 살았다고 알려졌지만 성이 아켄(Aken)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조상은 독일 아헨(Aachen) 지방 출신일 것으로 여겨진다.

보슈에 대한 기록은 1430년경 성모형제회(Brotherhood of Mary : 기독교의 한 종파) 활동 이후부터 조금씩 나타난다. 할아버지 얀 반 아켄(Jan van Aken)은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1453년 사망했다. 다섯 아들 중 최소한 네 명이 화가로 알려졌고, 보슈는 그 중 한 명인 안토니우스 반 아켄(Anthonius van Aken)의 3남 1녀 중 한 명으로 1450년에 태어났다. 형제인 구센(Goossen)도 화가였다고 한다. 1480년경에 알레이트 고예트 반 덴 메르벤이라는 명문 부호의 규수와 결혼하였으나 자식은 없었던 듯하다. 1516년 8월 9일 장례식을 치른 기록이 성모형제회에 남아 있다.

보슈가 어디서 미술을 공부했는지, 누구에게 배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화풍도 당시의 플랑드르 화가 누구와도 연관지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더욱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보슈라는 이름도 그가 살던 도시인 헤르토겐보슈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한다.

보슈가 몇 점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곱 점만 그의 서명이 있고, 서명은 없지만 화풍과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의 작품으로 확실시되는 작품이 마흔 점 가까이 된다.

보슈가 그림을 그린 당시에 유럽은 흑사병과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종말론이 횡행하였고, 각종 마법사와 이단종교가 유행하고 마녀사냥 등의 유혈폭동도 빈번한 세기말적인 분위기였다.

보슈는 종교적인 교훈을 담은 그림을 주로 남겼는데, 그것이 자신이 속해 있던 특정 종교집단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세인을 계몽하려는 개인적 의도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한 고백적 카타르시스였는지 확실치 않다.

SF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

보슈의 작품 중에는 3단 제단화 형태의 작품이 유독 많은데 아마도 종교적 교훈을 담기에 적당했기 때문인 듯하다. 3단 제단화는 성당 제단을 장식한 그림을 말한다. 가운데 판(그림 중 D 부분) 양쪽에 경첩을 단 두 판(A와 B 부분)이 덮이는 형태인데, 펼치면 가운데의 큰 그림과 좌우 양쪽으로 그 반 크기의 그림이 하나씩 연결된다(C와 E 부분).

〈쾌락의 동산〉은 성당의 제단을 장식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내용인 것으로 보아 당시 부호들의 주문에 따라, 또는 자신의 개인적 표현 욕구로 제작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우선 겉판을 덮었을 때 나타나는 그림은 천지창조 제3일의 광경이다. 평평한 지구는 이제 막 창조된 바다와 육지로 나눠져 형태를 갖추었고, 하늘과 구름이 둥근 구의 형태로 둘러싸고 있다.

3단 제단화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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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판(A 부분)과 오른쪽 판(B 부분)을 닫은 상태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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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인 두 판을 펼치면 세 그림이 나오는데 왼쪽 판(C 부분)은 에덴동산, 가운데 판(D 부분)은 쾌락의 동산, 오른쪽 판(E 부분)은 지옥을 나타낸다. 과거-현재-미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과거 : 왼쪽 판 C), 인간들이 쾌락에 빠져 지내면(현재 : 가운데 판 D) 나중에 지옥의 심판(미래 : 오른쪽 판 E)을 받는다는 구성이다.

왼쪽 판 C의 아래 가운데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모든 동·식물과 아담을 창조한 하나님이 이브를 아담과 맺어 주고 있다. 금단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는 아담 뒤쪽에 토실토실하게 빨간 열매를 맺고 있고, 뱀이 감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지혜의 나무는 가운데 오른쪽에 있다.

에덴동산에 있는 금단의 나무는 두 개인데 생명나무와 지혜의 나무다. 생명과 지혜는 무슨 관계인가? 기독교에서 참된 지혜는 생명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보슈는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잠언」 3장 18절)는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에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평화와 기쁨만 있다.

왼쪽 판 C의 부분도 : 생명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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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판 C의 부분도 : 약육강식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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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래 왼쪽에서는 새가 개구리를 삼키고,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오른쪽 위에서는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고 있다. 이제 막 천지창조를 마친 순간인데 타락의 결과인 약육강식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은 원래부터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보슈는 가운데에 있는 생명샘을 마치 기계 장치 같은 형태로 창안하였고, 가운데 구멍에는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를 그려 넣었다. 무슨 뜻일까?

가운데 판 D 부분에 묘사된 '금단의 열매와 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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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판 D 부분에 묘사된 '유리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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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판의 쾌락의 동산을 보면 빨간 열매가 많이 보이는데, 중세 때 열매를 따고 먹는다는 말은 성행위를 뜻하였다. 사람들이 금단의 열매를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먹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한 쌍은 육체의 쾌락에 빠져서 지혜(부엉이로 나타남)를 보는 눈이 가려져 있다. 왼쪽 아랫부분에 곧 깨질 것 같은 유리 거품 안에서 즐기고 있는 연인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플랑드르 속담 중의 "쾌락은 유리와 같이 깨지기 쉽다"를 나타낸다.

D의 가운데 부분에 묘사된 '쾌락의 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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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윗 부분에 묘사된 '쾌락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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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운데 호수에서는 타락의 상징인 목욕판이 벌어지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동물들을 타고 도는데 그것도 성애의 쾌락에 빠지는 것을 상징한다. 그 바로 아래에 말 탄 사람 머리 위에 달걀이 올려져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쾌락이 달걀과 같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가를 나타낸다.

쾌락의 동산에도 보슈가 창안한 독특한 쾌락의 탑이 등장하고, 지구의 네 모퉁이도 기묘한 형태의 탑들로 장식하였다. 구조가 대단히 그로테스크하고 독창적이다.

E의 아래 부분에 묘사된 '식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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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의 위 부분에 묘사된 '유황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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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판(E 부분도)의 지옥을 보자. 전체적으로 색채가 우중충하다. 위쪽 풍경은 유황불로 덮인 전형적인 지옥을 나타낸다. 보슈가 창안한 이 기괴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풍경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귀 두 개에 칼을 끼운 기괴한 마차가 사람들을 짓밟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거인의 몸통이 쪼개어져 열린 내부에 식탁을 차린 비이성적이고 초현실적인 구조물이 그려져 있다. 악기에 매달려 고통받는 사람들은 쾌락에 빠져 지낸 사람들에게 주는 형벌을 상징한다. 오른쪽 아래에는 보슈가 창조한 가장 그로테스크한 지옥의 식인새가 등장하는데, 사람을 통째로 먹고 있는 새의 머리에는 커다란 냄비가 씌워져 있다. 이것은 과식한 죄에 대한 형벌이다.

그레코, 〈톨레도의 풍경〉, 1597~9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1×108c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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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수많은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탐구의 즐거움은 일반인이나 미술 애호가들이 명화에서 느끼는 감상의 즐거움과는 다소 다르다.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보슈는 플랑드르의 주요 화가 중 한 명이었다. 당시의 플랑드르는 새로 부상한 상인 계급의 영향으로 성인(聖人)과 신화 일변도이던 그림의 소재를 일반인과 일상생활로 바꾸는 개혁을 일으키며 세계 미술의 물길을 바꾸고 있었다.

보슈는 이 그림에서 생명샘이나 유리 거품처럼 『성경』 구절이나 속담을 형상화하는 장르를 열었다. 이는 곧 나타날 속담화의 대가 브뢰헬로 이어진다.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유화 그림이다. 이탈리아가 아직 미술의 중심이지만 표현에 제한적인 템페라화에 머물러 있을 때, 플랑드르는 에이크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법인 유화를 발달시키며 미술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보슈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립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그림에는 당시 매우 중요시되던 원근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 반세기 전에 우첼로(Paolo Uccello, 1397~1475)가 그린 그림에는 원근법이 아주 노골적으로 실험되고 있다. 전투 중에 우연히 땅에 떨어진 창들의 방향이 원근법의 소실점으로 향하도록 의도적으로 묘사했다.

우첼로, 〈산로마노의 전투〉, 1436년, 패널에 템페라, 182×317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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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로마노의 전투〉 작품에서 땅에 놓인 창들의 방향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의 소실점으로 향하도록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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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슈도 당시 이미 보편화된 원근법을 몰랐을 리 없다. 그가 즐겨 사용한 3부작 제단화에서 나타나는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파노라믹한 시선은 곧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시선과 일맥상통한다. 시공을 초월하는 신의 시선으로 보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원근이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보슈는 후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보슈를 "괴물의 창조자, 무의식의 발견자"라고 불렀다. 보슈는 상상에서나 가능한 세계를 파격적으로 그렸다. 세기를 뛰어 넘는 그의 상상력은 400년이나 후에 일어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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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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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쾌락의 동산〉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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