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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세잔

〈사과와 오렌지〉

이브, 뉴턴, 세잔의 사과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년경, 캔버스에 유채, 74×93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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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요, 둘째는 뉴턴의 사과요, 셋째는 세잔의 사과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거장 드니(Maurice Denis, 1870~1943)의 말이다. 이브의 사과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며, 뉴턴의 사과로부터 근대과학이 시작되었고, 세잔의 사과로부터 현대미술이 꽃을 피웠다. 세 사과가 각각 자연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인간 감성으로의 전환을 이끈 것이다.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다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며 "나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서 그를 '사과의 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잔은 화가로의 길을 주저할 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피사로의 영향으로 1874년 제1회, 1877년 제3회 인상주의전에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지만 인상주의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인상주의는 순간적인 빛을 표현하는 데 급급했는데, 그는 그림이란 뭔가 영원한 본질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잔의 사과를 보면 사과인지 복숭아인지, 심지어 오렌지와도 구별이 안 된다. 사과 꼭지 부분의 디테일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과인지 오렌지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이다. 세부적 디테일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미완성이 많다.

세잔은 단순히 형태만 화면에 옮겨 놓지는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때 붓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모델을 응시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과를 응시하며 사과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애썼으며 그것을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세잔은 같은 사과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이들을 모두 담아야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질들을 동시에 나타내는 방법을 찾으려고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의 사과에 군데군데 노란색과 파란색이 나타난 것은 원래 사과 색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상주의자들의 생각대로 빛의 반사에 의해 나타난 순간적인 빛의 영향도 아니다. 빨간색은 앞으로 나와 보이며, 파란색은 뒤로 물러나 보이고, 노란색은 그 중간이라는 그의 단순화된 색채 이론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세잔의 색채에 대한 집념은 정말 대단하였다. 사물의 본질뿐 아니라 형태, 음영, 입체감 등을 색채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형태도 단순화하였다. 그는 모든 형태의 본질은 단순히 구형, 원통형, 원뿔형 세 가지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과는 완전한 구형이 아닌데, 그의 사과는 완전한 구형이다.

세잔, 〈온실 속의 세잔 부인〉, 1880년, 캔버스에 유채, 92×73c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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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 속의 세잔 부인〉을 보면 세잔의 예술관을 잘 알 수 있다. 보통 초상화를 그리는 경우, 모델의 외형을 실제같이 재현하거나, 모델의 심리 상태나 인간성을 나타내거나,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세잔 부인이 이렇게 생겼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얼굴이 너무 단순하게 동그랗고 귀의 모양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화가는 인물의 배경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하기 마련인데 세잔은 그렇지도 않다. 그는 오랜 시간 모델을 응시하며 그의 본질을 읽어 내고 그것을 단지 색채로만 화면에 옮겨 놓았다. 그에게는 배경도 단지 색채로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명암법이라든가 서양회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원근법이 보이지 않는다.

모델의 얼굴에 나타나는 붉은색과 푸른색은 실제 그런 색이거나 빛의 조화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다. 단지 얼굴에서 요철의 나온 부분은 붉은색으로, 들어간 부분은 푸른색으로 칠하여 명암과 입체감을 색채만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잔은 이 그림에서도 손은 완성하지 못했다. 디테일을 무시한 이유도 있지만, 색채만으로 형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부분의 색채 균형이 깨져도 전체 형태가 왜곡되기 마련이어서 색채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야수파와 입체파를 태동시키다

세잔은 183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중학교에서 에밀 졸라(Émile-Édouard-Charles-Antoine Zola, 1840~1902)를 만나 친구가 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둘의 우정은 거의 평생을 지속했으나, 1886년 에밀 졸라가 세잔을 모델로 하여 실패한 화가의 삶을 그린 소설 『명작』을 발표하면서 끝이 나고 말았다.

세잔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과대학으로 진학하였으나 곧 법학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비호 아래 미술을 공부하러 파리로 갔다. 그는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200프랑과 어머니가 몰래 더해 주는 돈으로 궁핍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왕 미술가가 되려면 엘리트 코스로 성공하도록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기를 바랐으나 낙방하고, 아카데미 스위스에 다니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인상주의자들이 모이는 카페 게르부아에도 출입하며 피사로와 친해졌다.

세잔은 졸라의 격려를 받으며 파리 생활을 시작했지만 당시 파리 화단을 지배하던 아카데미즘에 적응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낙향하고 말았다. 이후 약 5년간은 파리와 엑상프로방스를 오가며 작업하다가 1870년 7월에 파리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세잔은 파리에 있는 동안 모델 일을 하던 열아홉 살 처녀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uet)를 만나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비밀로 한 탓에 17년이나 지나 아들이 열세 살이나 되어서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엑상프로방스에 박혀서 아내나 정물을 그리거나 자연을 그렸다.

세잔, 〈생 빅투아르 산〉, 1885년, 캔버스에 유채, 72.8×91.7cm, 미국 펜실베이니아 메리온 링컨대학교 반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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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파리에 들를 때면 피사로를 만났고 피사로도 가끔씩 엑상프로방스로 내려와 그를 만나곤 했다. 모네와 르누아르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때 이미 그는 같은 장소의 풍경을 날씨가 다른 때에 시리즈로 그렸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동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생 빅투아르(Sainte-Victoire) 산은 세잔이 그린 풍경 시리즈의 대표적 소재지였다. 이 새로운 기법은 모네가 10년쯤 뒤에 〈건초더미〉 시리즈에서 시작하여 아예 모네의 상징적 작업이 되었다.

세잔 미술의 중요한 모티브는 정물, 초상화와 함께 목욕하는 사람들이다. 그가 매우 오랫동안 탐구한 주제이지만 완성한 그림은 많지 않고 밑그림이나 스케치가 많다. 말년에 들어서는 더욱 이 주제에 완성도를 더해 갔다.

세잔은 푸생의 서정적 안정미를 자신의 그림에 끌어들이려고 고심하였다. 즉 풍경의 안정감과 인체 곡선의 율동감을 결합시키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또한 형태는 구·원통·원뿔로 단순화하고,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결합시키면서 오로지 색채만으로 형태를 조직적으로 구성하는 원칙을 완성해 갔다.

이런 세잔의 이론과 화풍은 야수파와 입체파를 태동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래서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마티스의 〈삶의 기쁨〉이란 그림을 보면 세잔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도 세잔의 원칙을 따랐고, 세잔의 입체 표현을 더욱 확실하게 발전시켜서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

세잔, 〈목욕하는 사람들〉, 1906년, 캔버스에 유채, 210×250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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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색채 표현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그는 형태와 마찬가지로 색채 역시 단순화하였다. 그의 팔레트에는 색, 특히 중간색이 많지 않다. 〈사과와 오렌지〉에서 사과 밑에 깔린 천은 흰색 계열의 연백을 썼다. 이는 백색도가 대단히 높아서 사과를 더욱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연백은 중금속인 납을 포함하기 때문에 현재는 사용이 자제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빛나는 순백색의 매력에 이끌려 많은 화가가 즐겨 사용하였고, 세잔이 표현하려고 했던 사과의 양감을 나타내는 데 아주 적합하였다.

1906년 10월 세잔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강한 비비람에 쓰러졌고, 몇 시간이 지나서야 우편배달부에게 발견되어 집에 실려 왔다. 그러나 며칠 후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산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폐렴이 심해져 마침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오해를 사며 외롭게 자신의 벽 안에서 예술만을 좇았으나 현대미술이라는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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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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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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