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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_ 「창세기」 2:7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의 대작 〈아담의 창조〉는 제목 그대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는 장면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 내용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많은 작품이 태어났다. 그런데 화가들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터널링 교감
미켈란젤로는 코로 생기를 불어 넣는 작업을 아주 과학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전자공학을 알 리가 없었을 터인데 터널링(tunneling) 효과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과 비슷한 장면이 스필버그의 영화 〈ET〉에 등장한다. 스필버그는 아마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ET와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도 두 손가락을 접촉시키지 않았다. 부하된 전압이 매우 높고 조건이 맞으면 도체 사이의 간격이 떨어져 있어도 전자가 건너뛰며 이동한다. 이것을 터널링 효과라고 하는데 에너지가 클수록 터널링이 잘 일어난다. 하나님의 엄청난 에너지는 터널링 효과를 일으켜 손가락 사이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몸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이 아닐까?
한편,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에 그린 아담은 너무도 훌륭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창조하였으므로 완벽해야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근육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을 본 자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출애굽기」 33:20) 그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과 닮았다는 성경 말씀(「창세기」 1:27)에 의거하여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을 수염이 가득 난 건장한 남자로 표현하였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_ 「출애굽기」 33:20)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_ 「창세기」 1:27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창조된 아담과 하나님의 육체를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작품 속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육체는 그림 같지 않고 마치 조각처럼 보인다. 그는 화가라기보다 조각가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형태는 하나하나가 마치 조각 작품과 같다.
르네상스 미술의 집성지
〈아담의 창조〉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있는 프레스코화 〈천지창조〉의 한 부분이다. 〈천지창조〉가 천장 위를 장식하고 있고, 그 주위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기둥과 천장의 삼각 부분 8개에 〈예수의 조상들〉이 배치돼 있고, 네 모서리의 삼각 부분에 〈이스라엘의 영웅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아홉 폭의 〈천지창조〉는 창조의 첫날 빛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술 취한 노아로 끝난다. 〈아담의 창조〉는 〈천지창조〉 중에서 네 번째 그림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성 베드로 광장 뒤편에 있다. 이곳은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건축가 바치오 폰텔리가 설계하고 조반니 데 돌치(Giovanni di Iietro de' Dol'ci)가 1473년에 짓기 시작해 1483년에 완공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대성당과 그 규모가 완전히 똑같은 장방형 건물로 지어졌다(길이 : 40.9m, 넓이 : 13.4m, 높이 : 20.7m). 성당 내부 천장과 벽에는 르네상스 최고 화가들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14~1484)는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가들인 보티첼리, 디 코시모,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1449~1494),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50~1523),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 등으로 하여금 성당 내부 남쪽 벽에 〈모세의 생애〉와 북쪽 벽의 〈예수의 생애〉를 그리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1508년 5월경,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가 미켈란젤로를 시켜 천장벽화를 그리게 하였다. 그 후 바오로 3세는 다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서쪽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 넣게 하여 인류 최고의 유산을 완성하였다. 말하자면 시스티나 성당 안에는 구약과 신약을 망라한 『성경』 전체가 여러 예술 작품으로 구현되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위에 올라가 돌가루를 뿌린 이유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 카프레세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당시 최고의 화가인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 수업을 받으며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키워갔다.
미켈란젤로는 열네 살 되던 해에 당시 피렌체의 정치적·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메디치가의 '위대한 로렌초'(Lorenzo de'Medici il Magnific, 1449~1492)의 눈에 들어 메디치가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메디치가를 드나드는 수많은 학자나 예술가 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는다. 또 메디치가에 소장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접하면서 예술적 견문을 넓히게 된다. 아울러 그는 사체 해부를 해보는 매우 유니크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는 훗날 인간의 육체를 실감나게 묘사하는 데 밑바탕이 된다.
당시 메디치가는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보티첼리, 다 빈치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메디치가의 비호 아래 1496년 로마로 진출한 미켈란젤로는 조각상 〈바쿠스〉를 제작하였고, 1499년에는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피에타〉를 완성하였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시청으로부터 〈다비드〉 조각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에 착수하게 된다. 〈피에타〉와 함께 미켈란젤로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꼽히는 〈다비드〉는 1504년에 완성되어 피렌체 시청 앞을 장식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보존된다.
한편, 〈다비드〉 제작 과정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공화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오랜 후원자인 메디치가를 떠나 공화국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미켈란젤로가 정치적 정체성을 바꾼 뒤 제작한 〈다비드〉는 4미터가 넘는 거대한 영웅 상으로, 당시 공화국의 권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미켈란젤로에게 〈다비드〉를 의뢰한 시청의 실력자가 제작 과정에서 작품을 보러 와서 코가 너무 크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코를 끌로 깎는 시늉을 하며 미리 손에 쥐고 간 돌가루를 조금씩 흘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만족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예술가의 신념을 꺾지 않으면서 고객까지 만족시킨 미켈란젤로의 현명함이 돋보이는 일화이다.
메디치가의 보호 아래 있다가 공화국으로 등을 돌린 미켈란젤로와 교황이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교황의 명령을 거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조각을 천직으로 알고 회화가 조각보다 열등하다고 공언하던 그가 프레스코화를 천장에 그리기 위해 사다리 위에 누워서 오랜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을 달가워했을 리 없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런 미켈란젤로에게 거의 반강제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을 명령하였고, 그는 약 4년 동안 천장에 설치된 사다리 위에서 힘들게 작업하여 서른일곱 살이 되던 1512년에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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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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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담의 창조〉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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