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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장승업

〈호취도〉

먹과 한지의 과학

장승업, 〈호취도(毫鷲圖)〉,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135.4×55.4cm, 호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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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를 그린 그림인데 서양화에서 이렇게 살아 있는 힘과 감정이 느껴지는 그림이 있었던가? 〈호취도〉는 장승업의 천재적 필치가 100% 나타난 걸작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힘은 두 마리 매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두 마리 매는 암수 부부관계가 아니라 아마도 서로 패권을 다투는 수컷들일 것이다. 아래 매가 여유가 있고 위엄 있어 보이는 것이 기득권을 가진 대장인 것 같고, 위에 있는 매는 온 몸에 힘이 들어 있으며 활발한 날개와 발톱 매무새가 잔뜩 긴장한 것으로 보아 그 자리를 노리는 좀 더 젊은 수컷인 것 같다.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이 둘의 관계를 그들이 앉아 있는 나뭇가지의 굵기에서부터 암시하고 있다. 아래 매가 앉은 나뭇가지는 굵고 안정돼 보이며 위의 매가 앉은 가지는 가늘며 약간은 불안해 보인다. 시선을 끄는 기술도 탁월하다. 아래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 시선은 나무 기둥을 따라 올라가서 한 바퀴 돌아 공중의 조금 먼 곳에서 끝난다. 사용한 색채도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세련되었다. 이런 그림을 영모화(翎毛畵)라고 한다. 영모화란 꽃이나 풀, 나무를 배경으로공중의 조금 먼 곳에서 끝난다. 사용한 색채도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세련되었다. 이런 그림을 영모화(翎毛畵)라고 한다. 영모화란 꽃이나 풀, 나무를 배경으로 동물이나 새, 벌레 등을 그리는 것이다. 영(翎)은 새의 날개털을 의미하고, 모(毛)는 일반적으로 짐승의 털을 의미한다. 장승업은 특히 이런 영모화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왕도 어쩌지 못했던 보헤미안 기질

장승업은 본관은 대원(大元),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暝居士), 문수산인(文峀山人) 등이고, 자는 경유(景猷)이다. 1843년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떠돌다가 한양의 역관 이응헌의 집에 식객으로 있으면서 어깨 넘어 그림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걸작들을 그려내고 단숨에 조선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일자무식이어서 그의 그림에 쓴 글도 다른 사람이 대필하였으나 타고난 천재적 감각과 기량으로 산수화, 동물화, 인물화 등 모든 장르의 그림에서 주옥같은 걸작들을 남겼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늘 취해 지냈으며 한곳에 머물지 않으며 뜬 구름처럼 살았다. 1897년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승업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된 장지연(1864~1921)의 『일사유사(逸士遺事)』에 따르면 마흔 살을 전후하여 한번 결혼한 적이 있었으나 원래 구속을 싫어하여 첫날밤을 치른 뒤 도망갔다고 한다. 그 후 아내와 다시 만나지 않았는지 자손도 없다고 한다. 그에게는 오직 술과 여자와 그림뿐이었다. 그의 이런 삶을 그린 영화가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취화선(醉畵仙)〉이다. '취화선'은 술에 취해 있는 그림의 신선이란 뜻이다.

영화에서도 나타나지만 장승업이 얼마나 관습에서 이탈한 기인이었는지는 고종황제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장승업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전해지자 고종이 장승업을 불러들여 병풍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림이 잘 안될까 걱정하여 산해진미(山海珍味)에 술을 조금씩 주고 감시하였으나 그림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속이고 도망하였다. 이후 다시 잡혀와 더욱 엄한 감시 하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나 또 도망하여 고종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왕이 그의 목숨도 끊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민영환(1861~1905)이 나서서 자기가 책임지고 그림을 완성시키겠다고 용서를 얻어 그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결국 그림을 끝내지 못하고 민영환의 집에서마저 도망하고 말았다.

모든 장르의 그림을 섭렵한 천재

조선 3대 화가라 하면 안견, 김홍도와 장승업을, 4대 화가라면 정선(1676~1759)을 추가하여 일컫는다. 조선 초기 세종 때 솟아오르던 국운과 찬란했던 문화 시대의 회화 예술을 이끈 사람이 안견이라면,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인 영·정조 시절 회화 예술을 대표했던 사람이 정선과 김홍도이다. 김홍도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회화 예술이 꽃피우게 되었다.

장승업은 정선과 김홍도보다 더 후대인 고종 재위 당시인 조선 말기에 활동했던 화가이다. 과학기술을 앞세운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그리고 청나라의 틈에 끼어 서서히 멸망해 가던 조선의 끝자락에서 불꽃같은 예술혼을 태우고 간 화인이었다. 당시 조선의 대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와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자신도 원(園)이라는 뜻으로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장승업이 그린 산수도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걸작 〈방황공방산수도〉를 감상하자. 당시 조선에서는 거의 남종화(중국 명대의 문인화로, 막시룡과 동기창이 제창한 화풍)만 그렸는데 장승업은 남종화와 북종화(직업화가들이 짙은 채색과 꼼꼼한 필치를 사용하여 대상의 외형묘사에 주력하여 그린 중국 명대 산수화)를 모두 포용한 그만의 화풍을 창조하였다. 또 일반적인 화면 비례보다 긴 틀에 전경, 중경, 원경을 지그재그로 기교 있게 배치하였다. 아울러 관람자에게 여러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정묘하고 다양하게 그려서 호방하면서도 세련된 필치를 보여주었다.

장승업, 〈방황공방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 제작연도 미상, 견본담채, 151.2×31cm, 호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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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이 역관의 집에서 보고 배운 그림들이 대체로 중국화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그림에는 중국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어서 때로는 낮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가치는 중국화를 모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냈다는 데 있다.

장승업은 모든 장르의 그림에 다 능숙했을 만큼 천재 화인이었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그를 가리켜 모든 장르에 있어서 조선 후대의 화단에 한국화의 전형을 마련하였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상당한 제자들을 키워냈고, 또 그의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후대 수많은 화가들은 조선 말기 문예부흥을 이뤄냈다.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예술만을 추구해온 그의 기이한 인생은, 후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술혼이 무엇인지 반추하게 한다.

먹의 퇴색을 오랜 세월 억제하는 한지의 고유성

장승업의 그림 가운데 그만의 화풍과 천재성이 특히 잘 드러난 장르가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라는 독특한 그림이다. 기명절지란 그릇(器皿)과 매화나 국화 등의 꺾어진 가지(折枝)를 그려 넣은 독특한 그림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장승업의 대표적 기명절지화인 〈백물도권〉이 소장되어 있다. 기명절지화는 중국풍의 문방사우(文房四友)화와 유학과 학문을 숭상하던 조선의 책가도(冊架圖)에 그 뿌리를 둔다. 평민 계급 사이에서 자신의 가문이 학문적 부흥을 이루고 자식들이 학문에 힘쓰라는 염원을 담은 민화가 그 맥을 이어왔다.

장승업, 〈백물도권(百物圖券)〉, 제작연도 미상, 견본담채, 38.8×233cm, 국립 중앙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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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란 선비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네 가지 물건을 말하는데 붓, 먹, 벼루, 종이가 그것이다. 그 중 먹을 한자어로 묵(墨)이라 한다. 먹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태워 나온 검댕을 모아 아교로 개어 건조하고 굳혀서 만드는데, 오래 될수록 좋다고 한다. 무엇을 태웠느냐에 따라 먹의 종류가 달라지고 그 성질과 색감도 달라진다. 송연묵(松煙墨)은 소나무를 태워 만들고 유연묵(油煙墨)은 기름을 태워 만든다. 서양에서도 아이보리 블랙(ivory black)이라 하면 코끼리 상아를 태워 만든 흑색인데, 상아가 비싸므로 소뿔이나 다른 짐승의 뼈를 태워 만들면 본 블랙(born black)이라고 부른다. 피치 블랙(peach black)은 복숭아나무를 태워 만들고 바인 블랙(vine black)은 포도나무를 태워 만든 것이다. 램프 블랙(lamp black)은 기름을 태워서 만든 검댕으로, 동양의 유연묵과 같다.

또한 종이는 서기 105년에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후대에는 조선의 종이가 품질이 좋아 중국의 서화가들도 조선의 종이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의 최대 수출품이 인삼과 종이였다고 하니 그 진가를 알만하다.

왜 조선의 종이가 좋은 것일까? 우선 종이의 원료는 닥나무인데 한반도의 닥나무가 중국이나 일본의 닥나무와 다른 점이 있다. 섬유가 가늘고 길다.

그래서 조선 한지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거칠게 스며들지 않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스며든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 만드는 기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이나 일본의 한지는 섬유가 한 방향으로 있는데 조선 한지는 90도로 서로 엇갈린 구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 한지는 더 얇으면서도 질기고 물감의 번짐도 사방으로 일정하다. 종이 뜨는 기술의 차이인 것이다.

또한 지금 쓰는 종이가 대개 산성이어서 산화를 일으켜 문서의 보존에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지만 한지는 중성지이다. 그래서 고서화들이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장승업을 비롯한 우리 옛 화인들의 작품 속에는 그 예술성 못지않게 먹과 한지에서 비롯한 정밀한 과학까지 담겨 있다. 이들의 작품이야말로 예술과 과학이 한데 빚어내는 최고의 품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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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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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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