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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어 자연히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나 일본은 섬이라는 격리성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과는 상당히 다른 미술세계를 형성해왔다. 역대 일본 정부가 강력한 쇄국정책을 취했을 때에는 고유한 색채가 강했으나 대륙과 외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을 때에는 그들과 유사한 미술을 창출했으며 이러한 관계가 교차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나타났다. 일본미술은 정신적인 측면보다는 시각적 효과와 자연변화에 대한 감각이 돋보이며 산수보다는 인물 묘사에 치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조몬 시대의 일본미술
일본에 미술적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대략 신석기시대 이후로 여겨지고 있다. 지상에 있던 많은 유물이 사라져 땅속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토우들을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몬 토기).
공예에 속하는 토기에서는 그 기형의 처리나 표면장식을 통해 미적 표현을 살필 수 있는데, 조몬 시대[繩文時代]의 조몬 토기는 특히 그 시작을 BC 10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대를 갖고 있다.
약 1만 년에 걸쳐 계속된 조몬 토기는 기간이 길어 보통 6 단계로 나누어 양식적 변천을 논한다. 초창기에는 광주리를 모방한 듯한 밑이 둥근 환저형 토기가 나타났으며 조기에는 한국의 암사동 토기와 유사하게 밑이 뾰족한 첨저형이, 그다음 전기에는 바닥이 편평한 평저형 토기가 각각 나타나 한국과 유사한 전개를 보였다. 그러나 중기에는 화염문 토기라 하여 조형성이 매우 뛰어난 이색적인 토기가 등장했다.
이후 후기와 만기를 거치면서 장식적·조각적 성격이 약해지면서 순수 기형에 충실하게 되었다. 토우에서도 헬멧과 선글라스를 쓴 듯한 차광기 토우가 나타나 일본미술의 시작이 중국이나 한국과 차이가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요이 시대의 일본미술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야요이 시대[彌生時代]는, 대륙에서 전래된 벼농사와 청동기 사용, 그리고 토기 제작에서의 물레 사용 등으로 조몬 시대와는 문화적으로 크게 변모된 시기였다(→ 야요이 토기). BC 300년에서 AD 300년에 걸친 이 기간의 미술로는 토기와 동탁이라고 하는 청동기 표면에 가한 회화적 표현을 들 수 있다.
토기는 보통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그 변화를 설명하는데 물레를 사용하므로 기형이 좌우 완전 대칭인 것이 특징이다기벽도 얇아지고 표면장식도 간략해져 보다 순수한 기형미를 추구하는 것이 한국의 무문토기와 유사하다. 또 이 시기에 많이 나타나는 동탁 표면에서 있는 선각 부조도 한국의 청동기 유물에서 보이는 선각 장식들과 내용이나 기법이 유사하여 상호 영향관계를 엿볼 수 있다.
동탁에 보이는 반추상적인 선각 표현은 청동기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표현법으로 농경과 수렵에 관한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표면에 보이는 유수문과 같은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들은 이후 일본미의 한 원류가 된다.
고분 시대의 일본미술
4~7세기경 일본에 많은 거대한 고분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를 근거로 이 시대를 고분시대라고 한다(→ 무덤). 따라서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와 시기상 다소 중복되는 면이 없지 않으나 국가명이 명확하지 않은 시기이므로 편의상 이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데 철기 사용, 신라나 가야 토기와 유사한 스에키[須惠器]의 출현, 그리고 많은 금제 장신구 등은 한국의 영향을 시사해준다.
한반도에서 기마민족이 일본열도에 건너가 세력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미술은 건축을 예로 들면 소위 전방후원분이 특이한데 한국에 조형이 있다고는 하나 규모에서 차이가 크고 주변에 큰 호(壕)를 파는 것이 다르다. 이러한 무덤 주위에는 하니와[埴輪]라고 하는 일종의 토용이 세워졌는데 불교조각이 나타나기 이전의 순수 일본조각으로서 의의가 있다. 또 후쿠오카[福岡]와 구마모토[熊本]를 중심으로 한 규슈[九州] 지방에는 장식고분이라고 하는 벽화고분들이 나타나 대륙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벽화 내용이나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일본의 장식고분은 대륙적인 요소와 일본적인 독특한 표현법이 결합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기하학적 문양이 많고 구상적인 표현에서도 중국이나 한국에는 보이지 않는 형태가 많이 보인다.
아스카 시대의 일본미술
아스카 시대는 대개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6세기 중엽부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 행해지기 이전인 7세기 중엽까지로 잡고 있다.
이 시기에는 불교 전래에 따른 불교문화·불교미술이 발달했다. 일본 고유의 신도문화와 대체되어 불교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한반도 귀화인계인 소가 씨[蘇我氏] 집안과 다른 일본계와의 치열한 정치적 투쟁 속에서 소가 씨가 승리함으로써 성취된 것이며 따라서 아스카 시대의 미술 문화 속에서 한국과의 친영성을 쉽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스카 시대 미술에서는 중국의 육조시대와 한국의 삼국시대의 기법·양식을 많이 느낄 수 있는데 대륙의 선진문물이 속속 들어와 기존의 일본풍을 혁신시킨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주요미술품으로는 불교조각품들을 들 수 있다. 이들 조각품은 호류 사[法隆寺] 일대에 집중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소가 씨계의 호류 사가 불타게 되는 것을 아스카 문화의 소멸로 보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이런 점에서 아스카 시대를 개신(645)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기점으로 보는 견해 대신에 670년을 기점으로 설정하는 미술사적 견해도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기의 불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도리[止利] 양식으로서 호류 사 금당에 있는 금동제 석가삼존불상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조각).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623년에 도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 불상은 중국 북위시대 불상 양식을 기초로 만든 것으로 좌우대칭 구조에 다소 도식적인 옷처리, 긴 얼굴, 은행알 같은 눈매와 초생달 같은 입매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의 불상들이 다수 전하는데 아마도 도리와 그의 공방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믿어지며 호류 사 금당과 보장전 안에 전시되어 있다. 도리 불상과 양식이 다른 것으로 호류 사의 유메도노[夢殿]에 있는 관음보살과 보장전 안의 구다라[百濟] 관음을 들 수 있다. 특히 구다라 관음은 이름 그대로 백제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백제인의 탁월한 조형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위 양식을 기초로 하면서도 유려한 선처리와 날씬한 몸매는 백제의 세련된 미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세련미는 호류 사 바로 옆에 있는 주구 사[中宮寺]나 고류 사[廣隆寺]에 있는 반가사유상들에서도 느껴지는데 보다 일본적인 미를 추구한 야추 사[野中寺]의 반가사유상과 비교해볼 때 이 작품들이 한국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 시기의 다른 중요한 미술품으로는 다마무시노즈시[玉蟲廚子]를 들 수 있다. 예불용 사리함인 이 유물에는 표면에 그림이 많이 그려 있어 회화의 귀중한 예를 전하고 있다. 석가의 전생설화 중 두 장면이 그려졌고 그밖에 수미산도·공양도·보살도 등이 있어 7세기 회화기법을 엿볼 수 있다.
아스카 시대의 미술품은 대개 중국 육조시대와 한국 삼국시대의 고졸한 형식미의 또다른 변형을 잘 보여주며, 중국이나 한국에서 부족한 유례를 많이 보충해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나라 시대의 일본미술
일본에서 나라에 수도가 있었던 710~784년을 일반적으로 나라 시대[奈良時代]라고 부른다. 수도가 나라로 옮겨진 710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연호를 따서 670~710년을 하쿠호 시대[白鳳時代], 710~784년을 덴표 시대[天平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한국의 통일신라시대 전반기에 해당하며 7~8세기 동양 전체가 그러하듯이 중국의 문물과 제도의 영향이 커 미술에서도 당풍이라고 하는 큰 흐름의 영향을 많이 받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져 덴노가 실권을 쥐었으며 불교가 성해 불교문화와 미술이 꽃을 피웠다. 따라서 왕권의 상징으로서 거대한 사찰이 조영되기도 했는데 나라의 도다이 사[東大寺]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전과 달리 나라 시대부터는 건축물과 함께 많은 조각품과 회화작품이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건축물로는 호류 사의 금당, 5층탑, 중문 등이 8세기초의 원형을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국 육조시대의 건축양식과 척도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밖에 야쿠시 사[藥師寺] 3층탑, 도다이 사의 산가쓰도[三月堂]·쇼소인[正倉院], 도쇼다이 사[唐招提寺] 금당 등이 동양 전체에서도 드물게 7~8세기의 건축미를 보여준다.
조각은 대개가 불교조각인데 나라 시대 전반기에는 초당양식이 성행했으며 후반기에는 성당양식이 풍미했으나 일부 기법이나 표현에서 일본 특유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기법에서 건칠을 많이 쓴 것과 신장상들의 얼굴이 매우 사납다는 점 등이다. 야쿠시 사의 삼존불이나 성관음상이 당 양식을 대표하며 고후쿠 사[興福寺]의 팔부중상은 일본이 새롭게 성취한 우아한 당풍을 잘 보여준다.
회화의 예로는 하쿠호 시대의 것으로서 호류 사 벽화와 다카마쓰즈카[高松塚] 벽화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애석하게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모두 8세기초의 귀중한 유산으로서 당시의 국제적 문화교류를 잘 말해주며 후자는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후기에는 불화들이 많이 전하고 있어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다. 에인가쿄[繪因果經], 법화당 근본만다라 등은 고식을 잘 전하고 있으며 쇼소인의 공예품에 그려진 그림들도 당시의 국제적 교류를 잘 말해주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미술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는 지금의 교토에 해당하는 헤이안쿄[平安京]로 수도를 옮겼던 794년에서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개설했던 1185년까지를 말하며, 견당사(遣唐使)가 폐지되었던 894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이 시기는 귀족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실권을 잡아 귀족정치를 행했던 때로 우아함과 사치스러움이 추구되던 시대였다.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택해 그동안 긴밀하게 유지되어왔던 대륙과의 문화교류가 단절됨으로써 일본 고유의 미술문화가 형성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여전히 불교 중심의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기할 사항은 804년에 입당했던 구카이[空海]와 사이초[最登]가 밀교와 천태종을 들여와 일본 불교에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된 점이다.
곧 천태종도 밀교화하고 정부도 기존 불교세력을 누르기 위해 밀교를 지원하게 됨으로써 밀교는 일본 불교의 주요종파가 되었으며 따라서 밀교 의식에 필요한 밀교미술도 크게 성행했다.
건축에 있어서는 뵤도인[平等院]의 호오도[鳳凰堂]와 주손 사[中尊寺]의 곤지키도[金色堂]가 각각 헤이안 시대의 우아하고도 화려한 귀족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호오도는 극락세계를 지상에 구현했다고 하며 곤지키도는 내부를 온통 금색으로 칠해 당시 후지와라 씨의 사치스러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각에서도 호오도에 봉안된 아미타여래상이 건축과 마찬가지로 우아함을 대표하고 있는데 이 상은 조초[定朝]라고 하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조각한 것으로 비례나 곡선처리가 매우 부드럽고 우아하다. 이 상을 모방한 유사 작품이 많은 것도 이 작품의 완성도와 비중을 잘 말해준다. 조각에는 그밖에도 새로이 밀교상들을 조각한 것이 많이 있는데 도 사[東寺] 강당에 봉안된 명왕상(明王像)들이나 간신 사[觀心寺]의 여의륜보살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개 하나의 통나무에 조각하는 일목조(一木造)기법과 건칠기법 등으로 제작되었다. 또 불상을 모방한 신도(神道)의 신상(神像) 조각들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회화에서는 불교회화와 야마토에[大和繪]가 출현했다.
불화에는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가져오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만다라가 있는데 진본은 없어졌으나 이후 모사본이 많이 만들어져 만다라가 성행했다. 만다라는 크게 금강계(金剛界)와 태장계(胎藏界)로 나누어지는데 비록 도식적인 의식용 그림이기는 하나 세부에서 헤이안 시대 불화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의식용으로 불열반도(佛涅槃圖)가 많이 그려졌으며 정토사상에 의거해 아미타 내영도(來迎圖)도 제작되었다.
헤이안 시대 후반기인 11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산수를 그리는 대신 친숙한 일본의 풍경을 그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불화의 배경이나 두루마리 그림인 에마키모노[繪卷物]의 배경에서 특히 잘 보여주고 있다. 에마키모노는 형식상 중국의 수권(手卷)에서 발전된 것이지만, 묘사하는 주제나 기법이 전혀 새로운 일본 고유의 미를 나타내 보임으로써 중국이나 한국과 매우 다른 회화세계를 형성해 이후 야마토에풍이라 불리는 한 전형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에마키모노는 12세기 전반에 제작된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 에마키로서 귀족사회의 면모를 묘사한 소설을 회화화한 것이다.
귀족세계를 묘사한 것이라 도식적인 표현이 있으나 그밖의 〈시기산엔기 信貴山緣起〉 에마키나 〈반다이나곤 에코토바 伴大納言繪詞〉 등에서는 서민들의 자유스럽고 개성적인 표현이 잘 나타나 있어 대조를 보인다. 에마키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등장해 가마쿠라·무로마치[室町] 시대에 걸쳐 다수 제작되어 일본미의 한 규범이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미술
가마쿠라에 바쿠후가 세워졌던 1185년부터 1333년 바쿠후가 멸망할 때까지를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라고 한다. 처음에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실권을 잡았으나 곧 호조 씨[北條氏] 집안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와는 달리 무사계급이 실권을 잡자 귀족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
따라서 다시 운동감과 힘을 중시하는 미술이 등장했다. 헤이안 시대 후반부터 진척되어온 국풍화(國風化), 즉 일본 고유의 색채를 드러내는 경향이 이 시대에도 계속되었는데 에마키모노가 크게 성행한 것이나 신도미술인 스이자쿠가[垂迹畵]가 제작된 것이 그 예이다. 여기에다 중국 송대(宋代)의 건축·조각·회화 기법이 가미되어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다.
건축은 크게 중국 송대 건축양식과 일본 전통 건축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 송대 건축양식으로는 다이부쓰요[大佛樣]와 젠슈요[禪宗樣]가 있는데, 다이부쓰요는 중국 남부지방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이며 젠슈요는 중국 선종사찰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전통식을 와요[和樣]라 하는데 나라 시대의 건축양식을 살린 것이다.
조각에서는 케이파[慶派]라고 부르는 조각양식이 주류를 형성했으며, 이들은 우아한 조초[定朝]식보다 힘을 중시하는 나라 시대의 조각양식에 매우 사실적인 송대 조각양식을 가미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운케이[運慶]로 대표되는 이 조각양식은 그의 도다이 사 남대문 금강역사상, 고후쿠 사 북원당의 무착상(無着像), 세친상(世親像) 등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또 유명한 가마쿠라 대불이나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의 풍신상·뇌신상 등도 모두 이 흐름을 따른 조각이라 할 수 있다. 회화에서도 이러한 구분을 느낄 수 있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것으로는 라이고즈[來迎圖], 스이자쿠가[垂迹畵], 에마키모노 등을 들 수 있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선승들의 초상화[頂相]나 수묵산수화를 들 수 있다. 라이고즈에서는 운동감을 더 살린 것이 등장하고, 스이자쿠가는 밀교의 만다라를 신도에서 모방한 것으로 모두 일본적인 새로운 미술이다. 신사(神社)나, 신이 깃든 명승지, 신의 전령인 사슴, 또는 슈겐도[修驗道] 등을 많이 묘사했으며 실경을 그린 것은 진경도(眞景圖)의 이른 예들이다. 특히 에마키모노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주제가 다양해지고 기록적 성격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이 특색이다. 기법상으로는 색감이 밝아지고 세부처리가 치밀해졌으며, 배경처리를 도안화하거나 초목(草木)을 이용하는 것 등은 후대에 널리 차용되어 일본미의 한 요소가 되었다. 전쟁을 생생히 기록한 것이나 한 종파의 교주의 생애를 그린 것이 많다. 아울러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물화가 많은 점도 의의가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미술
무로마치 바쿠후가 창설된 1338년부터 무로마치 바쿠후가 끝나는 1573년까지를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라고 한다.
역시 무사 정권시대로서 엄격함과 격식이 요구되었다. 아시카가 쇼군[將軍]들이 중국이나 한국과 외교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이전과 달리 대륙문화의 영향이 크게 나타나는 시대였으며, 특히 중국에서 전래된 임제종(臨濟宗) 중심의 선종을 비호함에 따라 선종문화가 크게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는 크게 기타야마[北山] 문화시대와 히가시야마[東山] 문화시대로 나누는데, 전자는 1392~1467년으로 전통 귀족문화와 새로운 선종문화의 결합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는 1467~1573년으로 선종문화가 지방에까지 널리 퍼지고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의 세력이 커져 센고쿠 시대[戰國時代]가 되었던 시기였다.
선종문화의 확산으로 미술에서도 그 영향이 크게 나타나 중국의 선종화와 같은 송·원대의 수묵화 화풍이 크게 성행했으며 선사들이 직접 그림을 많이 그렸다. 또 중국식 물건들로 가득찬 쇼인즈쿠리[書院造]라고 하는 서재 형식의 건물이 등장했으며 참선에 도움이 되는 정원·다도·꽃꽂이 등이 발달했다.
건축부문에서는 쇼인즈쿠리가 등장하는 것이 특색인데 당대를 대표하는 유례로서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은퇴 후의 사저로 지은 긴카쿠사[金閣寺]가 유명하다.
이 건축물은 전통양식과 쇼인즈쿠리 양식이 잘 결합되었으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긴카쿠사[銀閣寺]는 이 건축물을 모방한 것이기는 하나 역시 아름답다. 긴카쿠사 안의 부속건물인 도구도[東求堂]는 전형적인 쇼인즈쿠리풍으로 정원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시대 건축에서 정원은 빼놓을 수 없는 한 요소로서 선종문화의 일환인 가레산스이[枯山水]라고 하는 자연의 단순함과 추상미를 추구하는 정원들이 나타났다. 료안 사[龍安寺]와 다이센인[大仙院]의 정원이 특히 유명하며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성행했던 불교 조각은 이러한 선종문화의 발달로 쇠퇴했으며 그대신 회화 특히 중국식 수묵화가 발전했다. 수묵화는 처음에 선사들에 의해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가 많이 제작되었으나 곧 중국식 수묵 산수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슈분[周文]과 셋슈[雪舟]로 대표되는 이 수묵 산수화는 중국 그림이 대량 유입함에 따라 새로움을 추구하던 승려들에 의해 유행하게 되었는데 셋슈는 중국 명초의 양식까지 흡수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추동산수도 秋冬山水圖〉·〈사계산수도 四季山水圖〉·〈천교립도 天橋立圖〉 등은 중국화풍을 소화한 뒤 자신의 세계를 다시 정립한 역작들이라 할 수 있다. 슈분과 셋슈 외에도 분세이[文淸], 아미파[阿彌派]의 여러 화가들, 그리고 셋손[雪村] 등 많은 화가들이 중국의 남송이나 원, 그리고 명초의 화풍에 가까운 수묵화를 남겼다.
한편 일부 화가들이 이러한 중국화풍 대신에 일본적인 감각과 구도·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쇼군들의 지원으로 점차 세력화되어 갔다. 이들을 가노파[狩野派]라 부르는데,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로 대표되는 무로마치 시대의 가노파들은 근경에 큰 소나무를 배치하고 나무 위에는 새들을 그리며 후경에 폭포나 무경(霧景)을 두는 매우 단순한 구도에 힘찬 선처리 그리고 정신성보다는 시각적 효과를 추구하는 등 다른 수묵화가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나중에는 바탕을 금박으로 처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다음 시대에 드디어 화단의 주류가 되었으며 가노파의 회화적 특성이 이후 일본미의 한 전형이 되었다.
모모야마 시대의 일본미술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아시카가 바쿠후를 쓰러뜨린 157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실권을 쥐게 되는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가 일어난 1600년까지를 말한다.
오다가 전국을 통일한 후 곧 죽음으로써 야기된 힘의 공백상태를 계승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그는 오랜 센고쿠 시대를 정리함에 따른 무인들의 과잉 전투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일환으로 한반도를 침입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모모야마 시대는 기간이 40년 정도로 다소 짧기 때문에 문화가 크게 형성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나 종교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이 특징적이다. 영웅으로서 쇼군이 강조됨으로써 장대함과 호화로움이 추구되었으며,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중시됨으로써 풍속화와 화조화가 유행했다.
건축에서는 천수각으로 불리는 쇼군의 성이 장엄하면서도 산뜻한 새로운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도가 성행하여 초암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천수각의 분위기와는 반대인 조그만 서민풍 건물들이다. 여전히 정원도 많이 만들어졌으며 규모가 크고 호방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대 미술의 핵심은 역시 회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가노파 화가들이 주로 그리는 장벽화·풍속화·화조화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남만미술이라 하여 일본에 찾아온 서양인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있다. 기법상으로는 진한 채색이나 금박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인데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천수각과 같은 커다란 공간에 힘차고도 단순하게 그려가는 가노파 양식의 장벽화를 잘 그린 화가는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德]였다. 어용화가였던 그는 정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가노파를 부동의 지위에 올려놓고 세력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금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그 강력한 표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진적은 그다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밖에 섬세하고 분위기있는 표현을 잘했던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나 무인 화가였던 가이호 유쇼[海北友松]도 아름다운 화조화들을 남겼으며 가노 히데요리[狩野秀賴]나 가노 나가노부[狩野長信] 등은 풍속화를 제작했다. 서양인들의 형태를 묘사한 남만 미술도 기법상으로는 가노파 양식을 따르고 있어 당시에 가노파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에도 시대의 일본미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는 1603년에서 도쿠가와 바쿠후가 끝나는 1867년까지를 에도 시대[江戶時代]라고 하는데 수도는 에도로 지금의 도쿄이다.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써서 외국과의 교류는 나가사키[長崎] 항구 1곳에서만 허용했으나 이를 통해서도 외국 문물은 많이 유입되었다. 상공업 발달로 도시 서민(조닌[町人]) 계급이 크게 성장했는데 이에 따라 서민 문화가 발전했다. 이들은 가부키[歌舞伎]를 즐기고 우키요에[浮世繪] 판화를 수집했으며 에도의 환락가를 출입했다.
건축부문에서는 쇼인즈쿠리 형식에다 초암풍을 결합시킨 스키야즈쿠리[數寄屋造]가 등장했는데, 가쓰라이 궁[桂離宮], 슈가쿠인 이궁[修學院離宮]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건축물과 정원을 잘 조화시켰으며 건축물 또한 비대칭적인 구성미를 보이고 있다. 에도 시대 미술의 주류를 이룬 것은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에도 초기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잔영을 그대로 이어받아 가노파 화가들에 의해 큰 규모의 장벽화가 만들어졌으나 가노 단유[狩野探幽]가 새로운 시대 분위기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가미한다든지 화초들을 담채로 스케치한 것 등은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민간화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에 따라 개성적이고 다양한 화풍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고린파[光琳派]의 경우 소다쓰[宗達]·고린[光琳]·겐잔[乾山]·호이쓰[抱一] 등 우수한 화가들이 계속 배출되어 중요한 화파로 성장했다.
이들은 야마토에[大和繪]와 같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보다 아름답게 디자인함으로써 일본인의 미감을 촉발시키고 있다. 부채·마키에[蒔繪]·병풍·도자기 등 여러 부문에 적용된 이들의 작품은 역시 일본미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던 우키요에도 시민 계급과 상공업의 발달이 유발시켰던 미술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흑백판화로 시작했으나 곧 채색판화가 등장했고 이어 다색판화로 발전함에 따라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는 소녀 같은 일본 미인을, 도리이 기요나가[鳥居淸長]는 성숙한 미인을, 그리고 우타마로[歌麿]는 미인의 상반신만을 묘사하는 등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 우키요에 판화는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도 다루게 됨에 따라 더욱 성장하는데 호쿠사이[北齊]와 히로시게[廣重]가 특히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들이 수십 개의 연작을 제작한 것을 볼 때 그들의 인기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키요에 판화는 또 서양에 전해져 인상파 화가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은 특기할 사실이다. 또한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들어온 중국의 명·청나라 회화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남화(南畵)도 중요한 화파이다. 처음에는 다소 모방적이었으나 이케노 다이가[池大雅]와 요사 부손[與謝蕪村]이 일본적으로 소화된 그림을 그리면서 남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후에는 보다 중국적인 수묵산수화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지쿠덴[竹田], 가잔[華山], 뎃사이[鐵齊]와 같은 화가들이 출현함으로써 남화는 일본적인 색채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밖에도 개성이 돋보였던 이토 자쿠추[伊藤若沖]나 소가 쇼하쿠[曾我蕭白]가 기발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서양의 정교한 사실적 기법을 동양적 수묵 처리와 결합시킨 마루야마 오쿄[円山應擧]와 그의 제자 고슌[吳春]이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다.
특히 오쿄 스타일을 더욱 분위기있게 처리한 고슌의 화법은 이후 추종자가 많았으며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주요화풍이기도 했는데 이를 시조파[四條派]라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발전했던 에도 시대의 화파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화의 본격적인 유입으로 양상이 달라지는데, 주류였던 가노파를 비롯해 우키요에·고린파·남화 등이 쇠퇴하고 대신 시조파 계통의 동양화가 일본화라는 명목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점점 세력화하는 유화(油畵)와 대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미술은 오랜 기간 다양하게 변모해왔다.
중국이나 한국과 유사한 미술을 가진 때도 있었으며 매우 다르게 나타난 적도 있었다. 대개 새로운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채색미를 추구했고 회화의 경우 화면 전체의 구성에 치중하여 다소 디자인적인 단계에까지도 이르렀다. 에도 시대에 고린파나 가노파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정교함과 감각이 중시되는 공예품, 예를 들면 도자기나 마키에, 기모노 디자인, 장식경(裝飾經) 등에서 그 예민한 감각이 특히 잘 드러난다. 또 외국에서 유입된 문화를 곧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점도 뛰어나다.
중국의 수묵화에서 가노파 회화나 남화를 만들어낸 것, 중국식 두루마리 그림에서 에마키 그림들이 나온 것이 그러하다. 특히 흑백 목판화에서 우키요에라는 다색판화를 발전시킨 것은 탁월하며 일본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우키요에에 보이는 인물 중시, 디자인적 구성, 색채감각, 평면성 등이 일본미술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다. 채색미나 감각을 중시하는 일본미술은 미술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표현주의적 측면을 잘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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