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피에르 보나르

다른 표기 언어 Pierre Bonnard
요약 테이블
출생 1867년 10월 3일, 프랑스 퐁트네오로즈
사망 1947년 1월 23일, 르카네
국적 프랑스

요약 앵티미슴의 대표 화가였던 19~20세기 프랑스의 화가·판화가로 주요 작품은 <역광을 받는 여인>. 문학과 법률을 전공했으나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국립미술학교와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인상파, 일본 판화, 아르누보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불빛에 빛나는 실내와 누드, 몽마르트르 거리 풍경 등을 그려 도시 생활에 대한 그의 예찬을 보여주었고, 실내 장면을 그리는 앵티미슴의 대표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단순하지만, 과일을 올려놓은 탁자나 햇볕이 내리쬐는 풍경과 같은 평범한 주제들을 표현한 방법은 그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의 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햇살이 비쳐드는 가정의 실내와 정물을 그린 그림들이 독특한 친근감을 주는데 〈식당 The Dining Room〉(1913)·〈과일 그릇 Bowl of Fruit〉(1933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를 딴 후 부친의 주장에 따라 다시 법률을 공부했으며, 1888년 잠깐 동안 정부기관에서 일했다. 한편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로마상(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을 타는 데 실패하자 줄리앙 아카데미로 옮겨 거기에서 새로운 미술 세대의 주요인물들인 모리스 드니와 케르자비에 루셀, 폴 세뤼지에, 에두아르 뷔야르, 펠릭스 발로통과 사귀었다.

1년 동안 군대에 복무한 뒤 1890년 드니·뷔야르와 함께 몽마르트르에 화실을 마련했다.

이들은 뒤에 연극 연출가인 오렐리앙 마리 뤼녜 포와 파리의 드 뢰브르 극장에서 공동으로 연극 연출을 맡기도 했다. 이무렵 그는 일찍이 인상파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일본 판화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일본 미술).

1890년대의 그는 당시 아르 누보 운동의 화가들처럼 장식적인 곡선 구성을 사용하거나 친근감을 주는 실내를 주로 그리는 나비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램프 빛에 빛나는 황홀한 실내, 호화로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누드 및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그려 프랑스 회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의 매부인 클로드 테라스가 쓴 〈친근감을 주는 사소한 장면들 Petites scènes familières〉·〈삽화가 들어 있는 작은 발성 연습책 Petit solfège illustré〉(1893)에 삽화를 그려넣은 것이나 1895년에 유명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 의해 발행된 일련의 석판화들 〈파리 생활의 모습들 Quelques aspects de la vie de Paris〉을 제작한 것은 그무렵의 도시 생활에 대한 그의 재치와 취향을 전형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또한 유명한 아방가르드 평론지인 〈르뷔 블랑슈 La Revue blanche〉에 삽화를 기고했다. 1900년 볼라르가 펴낸 폴 베를렌의 상징주의 시집 〈평행 Parallèlement〉에 그가 그려넣은 것들은 삽화의 새로운 단계를 제시했다.

르뷔 블랑슈(La Revue blanche)

1889년부터 1903년까지 프랑스 예술 및 문학 잡지로 운영되었다.

ⓒ Toulouse-Lautrec/wikipedia | Public Domain

그외에도 1900년대의 여러 책에서 그의 삽화를 볼 수 있다. 비교적 차분하고 가정적인 앵티미슴 양식의 그림들로 인해 장식가로서의 그의 재능은 때때로 간과되곤 한다. 그러나 1906년경 그는 〈르뷔 블랑슈〉지 편집자의 아내인 미지아 나탕송의 객실을 장식하기 위해, 태피스트리와 비슷하게 4개의 연작으로 된 〈기쁨, 공부하기, 놀기 그리고 여행 Pleasure, Study, Play, and the Voyage〉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루이 14세 시대의 모든 예술 활동을 감독한 샤를 르 브룅과 18세기 중반에 가장 유행한 화가인 프랑수아 부셰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프랑스의 중요한 회화적 전통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1908년경에는 이미 그의 앵티미슴 시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Nude Against the Light〉(1908, 브뤼셀의 벨기에 왕립미술관)와 같은 그림은 큼직한 규모로서 대담하고 더욱 풍부한 색채의 효과를 주고 있다.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프랑스 북부의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1910년 프랑스 남부에 가본 이후로는 그곳의 신비에 매료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지중해를 프랑스 문명의 발상지로 여겼다. 보나르는 자신의 미술과 프랑스의 고전적 전통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것은 고대 헬레니즘 조각에서의 인물의 특정한 자세가 그의 몇몇 그림에 나타난 점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또한 16세기 베네치아파의 채색 전통에도 매료되었다. 예를 들어 〈에우로파의 유괴 The Abduction of Europa〉는 티치아노의 작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단순하지만, 과일을 올려놓은 탁자나 햇볕이 내리쬐는 풍경과 같은 평범한 주제들을 표현한 방법은 그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후기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과 마찬가지로 특히 원근법에 매료되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그는 여러 단계의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따뜻한 색조에서 차가운 색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톤의 변화를 나타냈다.

1915년경 보나르는 여태껏 그가 색채를 위해 형태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때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색채의 중요성을 고려하면서도 구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반영한 누드화를 그렸다. 1920년대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주제의 하나인 목욕하는 여인에 관한 연작을 그렸다.

1920년대말 이후로는 그림의 주제를 거의 바꾸지 않고, 정물과 자화상, 코트다쥐르에 있는 생트로페의 바다, 칸 근처의 르카네(30년 동안 그의 모델 겸 동료였던 마리아 부르쟁과 결혼한 뒤 1925년 이곳으로 옮겼음)에 있는 자신의 정원 풍경 등을 강렬한 색채로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제작연대의 순서를 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연필이나 물감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여러 그림들을 한꺼번에 그릴 때 그것들을 사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주제에 관한 기억에 의존하여 끊임없이 표면을 손질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상당수는 대략적인 연대로 다룰 수밖에 없다. 1944년 보나르는 〈편지, 형태와 색채 Correspondances, Formes et couleurs〉라는 그럴 듯한 제목으로, 원래 상태의 초기 편지들에 간간이 삽화를 그려 넣은 책을 출간했다.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프랑스 출신 화가이다.

ⓒ adoc-photos/Getty Images | Rights-managed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피에르 보나르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