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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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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현실의 특정한 인물의 모습을 본뜨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만드는 상.

개인을 본뜬 단신초상 외에 회화에는 부부 또는 친구를 함께 그린 2인 초상화, 단체를 그린 집단초상화도 있다. 제단화나 책 속에 삽화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독립상의 경우에도 신화적 존재 등을 본떠 만들기도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초상은 외모의 충실한 기록일 것을 전제로 하지만, 이 유사성의 요구는 시대와 사회 여건에 따라 다르며 때로는 무시되는 일까지 있을 수 있다. 또 인물의 어느 부분까지 그리느냐에 따라 '흉상'·'반신상'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즉 초상의 여러 모습은 역사 속에 놓인 현실관·인생관의 변천이며, 초상에 주어진 구체적인 기능의 변천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초상

이집트 조각의 주요부분은 분묘나 장제전(葬祭殿)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된 죽은 사람의 상이 차지한다.

이것들은 전신의 엄격한 정면성과 기하학적 단순화에 의해 사후의 혼이 깃들기에 알맞은 영원불변성을 획득하며, 머릿부분에서도 사실에 바탕을 둔 이상화(理想化)가 두드러진다. 이상주의적 경향을 기조로 한 그리스에서는 BC 5세기에 위인의 상을 공공장소에 안치하는 습관이 시작되었는데, 초사성(肖似性)이 추구된 것은 BC 4세기 후반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던 듯하다.

이에 반해 조상숭배에 데드마스크를 사용한 전통이 있었던 로마인의 조상 조각은 로마 미술사상 가장 철저하게 개인의 외모를 표현한 예로 꼽을 수 있다. 제정기에 들어서면 그리스의 영향으로 특히 지배자상에 이상화가 실시되었는데, 성격과 심리의 표현을 포함한 사실성은 로마 초상의 기본적 특색이다. 대상도 부인과 아이를 포함한 일반 시민으로 확대되었고, 전신상·흉상 외에 기마상이 등장하고, 화폐에 군주의 옆모습을 부조하는 관습이 헬레니즘에서 계승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초상화는 이집트 파이윰 출토의 매장용 밀납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

로마 미술(Roman art)

로마 미술의 옛 성직자 초상화 조각

ⓒ shakko / WIKIPEDIA | CC BY-SA 3.0

그리스도교와 고대 말기에는 늙어가는 육체를 불멸의 혼과 대비하여 경시하게 됨에 따라 초상표현에서는 개인의 본질표출을 외적 유사성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변화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상에서 예증된다. 중세미술은 이 경향을 더욱 밀고 나가 성속(聖俗)의 권위자의 초상을 그 신분과 직능을 의미하는 복장, 소지품으로 유형화하여 나타내고 이름을 써서 개인과 결부시켰다. 초사성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14세기로서, 14세기 중반에는 독립성과 유사성에 있어서 현존 최고의 근대적 초상화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중세말부터 고조된 현실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 시기에 더욱 가열되어 자화상을 포함한 사실적 초상의 제작이 두드러지게 활발해졌다.

15세기에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각각 특징 있는 초상의 형식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단순 초상의 경우 고대의 화폐초상을 모범으로 하여 완전한 측면관의 정적인 흉상이 제작되었으며, 조각에서는 이 형식이 입체화했는데, 이로써 기념비적인 영원성을 지향했던 듯하다. 한편 플랑드르의 초상화는 똑같은 흉상이지만 비스듬히 옆을 바라보도록 그림으로써 생생한 실재감을 강조했다. 이 형식은 15세기말에는 이탈리아에도 침투했다.

플랑드르 미술 (Flemish art)

플랑드르 미술의 아르 놀 피니 부부의 초상화

ⓒ Ayesha23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밖의 형식으로서는 알프스 남부와 북부 지방의 제단화 속에 그려진 헌납자의 초상이 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이야기 벽화 중에 초상이 포함된 예가 있다.

16세기에는 티치아노·홀바인에 의해 형식이 비약적으로 다양화되었다. 그림에는 반신상·3/4신상이 일반화하고 전신상도 등장했으며, 그에 따라 두부와 신체의 각도·포즈가 다양해지고 의장과 환경도 풍부해졌다.

그것은 초사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현실의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개인의 결점을 수정하고 아름다운 점을 강조하며 인품이나 직업을 나타내기 위한 포즈·의장·소도구·배경을 연구했던 것이다. 특히 궁정관계의 초상에서는 이상화 경향이 두드러지며 장중함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전신상·기마상의 형식이 애호되었다. 17세기에는 고요한 초사성을 넘어선 살아있는 것과 같은 초상의 추구가 진행되었으며, 한순간의 미묘한 표정까지 화폭에 재현되었다. 현실에 대한 관심은 네덜란드에서 일반시민의 간소한 초상화와 시민단체의 집단 초상화를 발달시켰으며, 정반대의 정치체제를 가진 스페인에서도 국왕과 난쟁이를 똑같이 냉정하게 보여준 벨라스케스의 초상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점차 강해진 프랑스 아카데미에 의해 문명화된 고전주의적 예술관에서는,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초상을 종교화나 삽화보다 격이 낮은 것으로 쳤다. 이 시기에 곁에 사람을 거느린 대규모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은 대상의 신분을 과시하는 효과와 함께 구상화에 필적하려는 시도였다.

18~19세기 사이의 초상은 대개 16~17세기의 전통에 의존하고 있는데, 18세기에 대해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은 대상을 신화적 존재에 비교한 장식적·유희적 형식과 컨버세이션 피스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 객관성을 기초로 한 주문 초상과 예술가 개인의 감정이 투영된 사적 초상이 명확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진술의 발명에 의해 개인의 기록으로서의 초상화의 필요성이 사라진 후에도 초상은 한편으로는 지위·신분의 상징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주관적 대상 파악의 표명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초상에서 예술가 자신의 개성이 개입되는 일은 잠재적으로는 모든 초상에 해당하겠지만, 그것이 적극적으로 추구된 점이 19세기 이후의 초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초상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경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의 무덤주인 부부상에서 초상화가 다루어진 이래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이 시대를 통해 왕과 왕비의 초상을 모셔두는 진전(眞殿)이 사찰을 중심으로 많이 세워졌고, 공신상·장군상·승상 등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사대부상의 빈번한 제작과 함께 공민왕에 의해 자화상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초상화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318년에 모사한 〈안향상 安珦像〉 1점뿐이다.

고려시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발흥과 더불어 각종 가묘(家廟)·영당(影堂)·서원이 설립되면서 더욱 널리 성행하여 인물화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초기(1392~1550)에는 상용형식(像容形式)이 고려시대의 전통으로 추정되는 우안(右顔) 8·9분면에서 점차 좌안(左顔) 8·9분면으로 바뀌었으며, 후반기에는 중기 이후 정형화되는 좌안 7분면의 자세가 개발되었다. 그리고 공신도상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의 경우 의자 손잡이가 소매 아래쪽에 설정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왼쪽 단령(團領)의 뜨임새 사이로 붉은 속단이 세차게 뻗어 있는 점, 족좌대(足座臺)의 두 발이 정면을 향해 나란히 놓여 있는 점, 바닥에 채전(彩氈)이나 화문석을 표현하지 않은 점 등이 특징이다.

안면은 토황색을 주조로 하되 구륵세선(鉤勒細線)으로 얼굴의 윤곽 및 이목구비를 묘사하여 선묘위주의 기법을 보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신숙주 영정 申叔舟影幀〉(청원 고령신씨문중)·〈장말손영정 張末孫影幀〉(영풍 장덕필 소장)·〈최덕지영정 崔德之影幀〉(영암 전주최씨문중 소장) 등이 있다.

조선 중기(1550~1700)에는 얼굴의 방향이 좌안 7분면으로 정형화되면서 관복의 단령자락이 세모꼴로 묘사되고 족좌대의 두 발이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졌는데, 바닥에 화려한 채전이 표현되어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초상화에서 가장 중시되는 안면처리에 있어서 얼굴색은 담홍색의 옅은 색조가 주조를 이루었고, 안모의 윤곽과 이목구비는 짙은 살색으로 그린 다음 골상학의 오악사상(五嶽思想)에 의해 홍기(紅氣)를 삽입하여 얼굴의 굴곡을 표현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근영정 柳根影幀〉(괴산 유해익 소장)·〈정탁영정 鄭琢影幀〉(예천 정완진 소장)·〈권응수영정 權應銖影幀〉(영천 권오현 소장) 등이 있다.

조선 후기(1700~1910)의 초상화는 어진의 빈번한 제작을 통해 배출된 변상벽·김홍도·신한평·이명기·이한철 등의 활약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유형의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정장관복형(正裝官服形)의 문신상과 일상복 차림의 선비상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형식면에서는 종래의 족자식 화축(畵軸) 일변도에서 벗어나 소폭 영정의 제작과 함께 화첩형식이 크게 유행했다. 자세에서도 자연스러운 면이 보이고, 얼굴묘사와 옷주름법에서 보다 사실성이 강화되었다. 특히 안면의 경우 피부 자체가 지닌 육리무늬[肉里紋]를 운염법(暈染法)에 의해 입체적으로 나타내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대표적 작품으로 이명기가 그린 〈허목초상 許穆肖像〉(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해남 윤영선 소장), 〈이재초상 李縡肖像〉(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와 이명기의 합작인 〈서직수초상 徐直修肖像〉(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영정 姜世晃影幀〉(국립중앙박물관), 이한철의 〈김정희영정 金正喜影幀〉(혜산 김성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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