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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죽은 사람을 땅에 묻은 곳. 처음에는 주검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나, 차츰 죽은 이를 기리는 기념물의 성격으로 바뀌면서 양식들이 다양화되어 당시의 생활상이나 믿음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무덤에는 토장·수장·화장·풍장 등의 형식이 있어 토장은 땅속에 묻는 것으로 가장 보편화된 형식이며, 물 속에 넣는 것을 수장, 주검을 불에 태우는 것을 화장, 그리고 땅 위에 주검을 드러나게 하여 썩히거나 짐승에게 먹히도록 하는 것을 풍장이라고 한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무덤을 분·총·영·묘·능으로 구분해서 쓰는데, 능은 임금의 무덤을 일컫는 것이고, 총은 흙으로 봉토를 쌓은 무덤을 가리키며, 묘는 구조물을 세워서 무덤을 보호하는 것이다.
무덤을 만들게 된 까닭은 주검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나, 차츰 죽은 이를 오랫동안 기리기 위한 기념물의 성격으로 바뀌면서 무덤 양식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무덤 양식을 통해 당시 생활상이나 믿음·습속을 이해할 수 있다.
묘제에는 크게 보아 토장·수장·화장·풍장 등 몇 가지의 기본형식이 있다.
토장은 땅속에 파묻는 것으로 지금까지 지역적·시간적으로 보아 가장 널리 보편화된 형식이며, 물 속에 넣는 것을 수장, 주검을 불에 태우는 것을 화장, 그리고 땅 위에 주검을 드러나게 하여 썩히거나 짐승에게 먹히도록 하는 것을 풍장이라고 한다.
토장의 묻기는 굴식[橫穴式]과 구덩식[豎穴式]으로 나뉜다. 굴식은 주검을 묻기 위하여 지면과 수평으로 판 널길[羨道]을 통해 널방[玄室]으로 들어 가는 방식이고, 구덩식은 장방형으로 땅을 깊게 판 구덩이 속에 주검을 넣은 다음 돌이나 널빤지로 뚜껑을 덮는 것이다.
무덤은 지역적·시간적으로 상당히 넓고 길게 퍼져 있어 여러 가지의 낱말로 불린다. 이를테면 피라미드처럼 독특한 것도 있지만 한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에서는 무덤을 분(墳)·총(塚)·영(塋)·묘(墓)·능(陵)으로 구분해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뚜렷한 구분은 어렵다. 단지 능은 임금의 무덤을 일컫는 것이고, 총은 흙으로 봉토를 쌓은 다음 나무를 심어놓은 무덤을 가리키며, 묘는 흙으로 봉토를 만드는 대신에 구조물을 세워서 무덤을 보호하는 것이다.
변천
사람들이 언제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어 무덤을 만들어 죽은 사람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거나 영혼을 숭배했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밝혀진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10만 년 전쯤의 중기구석기시대부터 주검을 묻었던 것 같다.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서는 땅을 파고 주검을 놓은 다음 그 언저리에 여러 가지 꽃들을 꺾어다놓았음이 밝혀졌다. 이것을 통해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믿음의 세계와 주검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동굴에서도 어른과 어린이를 함께 묻어놓은 것이 발견되었는데 어른의 머리에는 넓적한 판석을 덮어놓았다. 중앙 아시아의 타시크탓슈 지방에서는 어린이를 눕힌 다음 염소뿔을 주검의 둘레에 놓았는데 이것으로 주검을 보호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후기구석기시대에는 주검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져 꾸미개를 껴묻기하거나 사람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흙을 주검의 주위에 뿌려놓았는데, 이를 통해 부활이나 영생을 바랐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이 시기에 묻힌 사람의 뼈들이 가끔씩 발견되지만 무덤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조사된 적이 없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공동체의 크기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사람들이 만들었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서 고인돌과 같은 큰 돌을 이용한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드물지만 한국에서도 이 시기에 고인돌이 만들어졌다.
또한 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맨땅을 판 다음 조가비를 깔고 꾸미개를 지닌 주검을 넣고 그 언저리에 돌무지를 쌓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도시혁명과 같은 큰 변혁이 일어나 사회구조가 보다 조직적이고 다원화되어 국가가 세워지면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무덤이 아주 거대해졌다. 좋은 보기가 피라미드로, 기제의 쿠프 왕의 것을 보면 길이는 230m, 높이 146m로 2.5t 되는 돌이 무려 230만 개쯤 들어갔다.
중국에서도 이 시기에 주로 순장의 습속에 따라 거대한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안양의 무관촌에서 발견된 은나라의 무덤은 이러한 것 가운데 대표적이다.
유형
무덤을 어떠한 방식으로, 무슨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는가 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들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널무덤[土壙墓, 土葬]인데 구덩이를 파고 별다른 시설을 하지 않고 만든 것으로 구조가 간단하다. 돌무지무덤[積石塚]은 맨땅 위나 구덩이에 주검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돌을 쌓은 것으로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널리 유행했으며, 한국에서는 강돌이 많은 강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은 굄돌이 있는 무덤을 가리키며, 'dolmen'은 켈트어로 '책상 같은 돌'이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을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대서양지역과 지중해·인도 그리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구조는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의 형태에 따라 탁자식 고인돌, 바둑판고인돌, 구덩식 고인돌 등으로 나뉜다.
넓적한 판돌을 가지고 뚜껑과 네 벽을 상자 모양으로 짜서 만든 돌널무덤[石棺墓:돌상자무덤]은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상류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는데, 주위에는 판돌이나 네모난 돌이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다. 이러한 돌무덤은 중국 동북지역의 랴오허[遼河]·지린[吉林]·츠펑[赤峰] 지역과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지만 이 경우 주위에 돌이 둘러져 있지 않아 시베리아 지역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돌덧널무덤[石槨墓]은 모난돌이나 깬돌을 가지고 네 벽을 쌓아 만든 것으로 널길이 없다. 주검을 넣는 방법은 직접 묻는 것과 나무널이나 나무덧널에 넣은 다음 돌덧널 속에 넣는 방식이 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며,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삼국시대 때 널리 만들어졌다.
넓적한 판석을 가지고 만든 무덤이 돌방무덤[石室墳]인데, 널길과 널방이 있는 것이 다른 무덤과 다르다. 무덤의 구조나 껴묻거리를 보면 강력한 권력의 소유자가 묻힌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고구려의 것은 궁륭식 모양으로 된 천장과 옆방이나 감실이 있는 점이 돋보인다.
독무덤[甕棺墓]은 독이나 항아리에 주검을 넣어서 땅을 파고 묻는 양식이며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양식의 무덤은 거의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때 만들어지는데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반포[半坡] 유적에서 어린아이의 것이 발견된 것을 비롯하여 랴오닝[遼寧] 지역에서도 많이 나왔다.
벽돌무덤[塼築墳]은 주로 중국의 전한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 많이 만들어진 무덤으로 백제의 무령왕릉도 이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무늬가 있는 벽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으로 널방은 땅속에 만들어지지만 많은 부분이 땅 위에 올라와 봉토로 덮여 있다. 또한 땅을 파 나무덧널을 넣은 다음 돌을 쌓고 봉토를 씌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그냥 흙만 쌓아 봉토를 만든 덧널무덤[土壙木槨墳]이 있는데, 앞의 것은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한 신라에서 널리 퍼진 것이고 뒤의 것은 초기철기시대에 유행한 묘제이다.
지역적 특성
무덤은 지역에 따라서도 구조나 형태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 구석기시대의 사람뼈가 발견되고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무덤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신석기시대에 오면 맨땅을 판 다음 주검을 넣고 덮는 널무덤이 유행했다. 그 다음에는 고인돌·돌널무덤·돌덧널무덤·돌무지무덤·독무덤 등이 만들어지다가 고대국가체제가 이룩된 삼국시대가 되면 힘있는 사람들의 상징인 '고분'(古墳)이라 불리는 큰 무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무덤을 보면 초기에는 널방이 땅 위에 있는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지다가 나중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봉토가 있는 돌방무덤이 유행했다.
돌무지무덤의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이며, 벽화가 있어 유명한 돌방무덤으로는 쌍영총·무용총 등이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돌무지무덤을 만들다가 뒤에는 굴식돌방무덤과 중국의 영향으로 벽돌무덤을 만들었다. 신라 때는 땅을 많이 판 구덩이 안에 나무널을 넣은 덧널을 만들고 그 주위에 자갈이나 큰 돌을 쌓은 다음 높은 봉토를 만든 구덩식돌무지덧널무덤이 널리 퍼졌다.
이러한 양식의 무덤은 후대에 도굴이 거의 되지 않아 처음 모습대로 잘 남아 있고 껴묻거리가 많이 나와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무덤 둘레에 돌사람·돌짐승 등 많은 석물(石物)들이 놓였으며, 특히 12지신상이 조각되어 무덤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돋보인다.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널리 퍼졌으며, 문무왕 수중릉(水中陵)처럼 물 속에 묻는 독특한 양식도 있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서 구분되어 만들어졌으며, 풍수설의 영향으로 방위개념이 중요시되었고, 묘지(墓誌)를 넣는 풍습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양식에다 새로운 통치체계로 받아들인 유교사상의 영향이 혼합된 것이 유행했다. 특히 돌덧널무덤이나 화장묘 등이 사라지고 널무덤이 유행했다.
근래에는 기독교, 또는 서양의 것에 영향을 받아 무덤형식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그 변화는 주로 외형적인 것에 치우쳐 있어 기본구조에서는 여전히 널무덤이 지배적이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 봉분(封墳)이 있는 무덤이 처음 나타났으며,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계층에 따라 나무를 심는 습속이 있었다. 한나라 때는 죽은 사람의 업적을 새긴 묘지를 껴묻기했고, 방위나 지세에 따라서 무덤을 만드는 습속이 유행했다.
그리고 부부는 반드시 함께 묻었는데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묻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무덤의 주위에 경계를 표시하는 풍습이 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다음 물소와 같은 짐승을 잡아서 연회를 베푼다. 이는 마을사람들에게 향응을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저지른 죄에 대해 신에게 사죄를 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홋카이도[北海道]와 사할린 지역의 아이누족의 경우 맨땅을 판 다음 주검을 넣는 널무덤이 널리 유행했다.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은 거의가 감실이 있는 무덤방에 묻는데,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검 위에는 돌을 쌓았다. 유럽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널무덤을 만들다가 신석기시대가 되면 고인돌, 널길이 있는 큰돌무덤 등 큰 돌을 가지고 무덤을 만들었다. 특히 대서양지역의 큰돌무덤들은 이 지역의 독특한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무덤을 만들면서 방위에 따라서 껴묻거리의 색을 다르게 배치하는 습속이 있는데 동쪽에는 흰색, 서쪽에는 붉은색, 남쪽에는 초록색, 북쪽에는 검은색을 놓았다. 특히 호피족은 주검의 머리에 가면을 씌우기도 하며, 새의 깃털을 같이 묻어 영혼이 하늘[天界]과 연결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무덤 위에 봉분을 만들고 난 다음 사당 같은 집을 짓기도 하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일정기간 동안 떠돌아 다니다가 이 집으로 돌아와 재생(再生)하여 이곳에서 산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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