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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아마도 유럽의 무역업자나 장인들의 왕래로 중국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5세기경에 중국인들이 칠보 제작의 필수재료인 유리를 제조했고 청동과 다른 금속을 다루는 숙련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대(唐代:618~907) 이전에 칠보가 제조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본 정창원(正創院)에는 십이능경(十二稜鏡)이 있는데 이 거울 뒷면은 유선칠보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다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당대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이 거울은 14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단 하나의 칠보 유물이지만 이를 통해 당나라의 칠보공예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4세기말에는 중국에 칠보 기술이 매우 발달했고 비슷한 성격의 비잔틴 칠보 역시 중국 칠보와 비교되기도 했다. 이때는 중국에 칠보기법이 들어와 있었는데 유럽과 중국 간의 빈번한 교역과 문화적 교류는 칠보작업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후 명(明:1368~1644)·청(淸:1644~1911/12)대에 걸쳐 칠보가 번성했다.
중국 칠보는 유선칠보·조금칠보·채유칠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유선칠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십이능경이 최초의 것으로 이 작품은 당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중국 칠보의 시작은 원대(元代:1271~1368)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1333~68) 때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칠보 제작의 황금기는 그후인 명나라 때인데, 이 시대 칠보의 섬세한 깊이와 맑은 색조를 지닌 대담한 의장은 후대에서 결코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두운 청금석 색조와 매우 밝은 녹색조를 띤 옅은 하늘색은 특별히 뛰어난 색조이며 붉은색은 어두운 산호색조로 노란 바탕에 순색으로 입혀졌으며 구리에서 추출한 녹색은 폭넓게 사용되었다.
또한 검정과 흰색은 아주 효율적으로 쓰였다.
강희제(1661~1722)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예술산업의 대부흥은 많은 기념물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강희제는 베이징[北京] 근교에 세운 수많은 사찰에 기증할 향물을 유선칠보로 만들도록 명했다. 이 시기에 만든 칠보작품은 기교 면에서 명대 칠보보다 더욱 발달되었으며 량대(良貸)의 칠보 그릇을 보유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고대 청동용기가 되살아났으며 칠보 장식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양식은 강희제의 계승자인 옹정제(1722~35)가 집권하는 동안에도 지속되었으며 건륭제(1735~96) 때에는 칠보와 다른 공예품에서 더 완벽한 기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보이는 의장의 활력과 심도(深度)가 결여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중국 칠보는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 하더라도 너무 성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옛 칠보 제품 같이 잘 마무리되지 못했다.
중국칠보 가운데 일부는 조금칠보인데 금·은 바탕에 반투명 칠보를 사용하여 은제거울 등 장신구에 자주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광둥칠보로 알려진 중국의 채유칠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유럽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여온 기법으로 서양 것을 모사한 것이다. 채유칠보는 중국어로 양자(洋瓷)라고 부르며 칠보자기와 동일한 색이 사용되었는데 외국의 영향을 받은 장식가들은 이 색을 양채(洋彩)라 했다.
불투명 칠보의 바탕인 흰색은 구리판에 올려져 소성되었다. 18세기는 이 예술의 절정기로서 유럽 칠보의 모작이 계속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양식은 1796년 건륭제의 집권 후에도 생산되었다. 광둥법랑의 대부분은 수출용이었고 유럽인의 주문과 인도·페르시아 및 몇몇 다른 아시아에 있는 고객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일본의 칠보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경 나라[奈良] 근교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속제 칠보 유물이 일본 칠보의 기원으로 보인다. 8세기에 편찬된 다이호 율령은 금속과 '유리장식'을 담당하는 관리를 둘 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은 17세기까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도닌 히라타(1591~1646)가 한국인으로부터 기술을 배워서 칠보용기를 만들었을 때 그를 후원했던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그의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금속제 칠보장식이 달린 무복, 미닫이문의 장석(裝錫)과 교토[京都]의 가츠라 궁[桂宮]에 있는 상인방이 칠보로 장식되었다.
그의 가족은 유선칠보와 조금칠보 방식으로 소형의 칠보장식품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19세기 후반까지 교역을 계속했다.
그후 가지 쓰네 기이치(1803~83)와 그의 제자들이 나고야[名古屋]에 성공적인 유선칠보 제조공장을 세웠으며 특히 외국인들 사이에 상당히 유행했다. 가지는 황동제 윤곽선과 불투명 칠보를 사용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은제 윤곽선을 사용했으며 투명·반투명 칠보를 동시에 만들어 작업했다.
더욱이 그들은 뛰어난 재능으로 유선칠보 과정으로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나무나 꽃 등 아주 사실적이고 정교한 유선칠보 작업을 단시간에 재생산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880년 칠보색의 아름다움과 광택을 지닌 무선칠보가 생산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도쿄[東京]의 나미쿠와 소스케 공장의 장인들은 이 기술이 가장 뛰어났다. 나고야의 주베이 안도 공장은 더욱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발달은 칠보예술을 옛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칠보공예 특유의 장인정신이 상업성에 의해 오염될 우려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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