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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게

다른 표기 언어 Hiroshi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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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7, 일본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東京)]
사망 1858. 10. 12, 에도
국적 일본

요약 '우키요에' 유파에 속하는 채색 목판화의 마지막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풍경화 구성에 대한 그의 천재성을 서양에서 맨 처음 인정해준 것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연작 판화 〈도카이도 53역참〉(1833~34)은 그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1811년경 우키요에의 대가인 우타가와 도요히로 문하에 들어, 그의 수수하고 세련된 취향의 영향을 받았다. 1832년 그는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까지 여행했다. 가는 길에 53개 역참에 각각 하룻밤씩 묵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스케치했다. 같은 해에 그는 55점의 풍경 판화(도카이도의 시발점과 종착점 및 각 역참마다 1점씩)로 이루어진 〈도카이도 53역참〉이라는 연작 판화를 발표했다. 이 연작 판화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우키요에 화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를 독자적인 장르로 통합·정리했고,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처음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음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19세기 말에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서 재발견되었을 때, 그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폴 세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서양화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했다.

개요

정식 이름은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安藤德太郞]아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이치유사이 히로시게[一遊齋廣重]. '우키요에'[浮世繪] 유파에 속하는 채색 목판화의 마지막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풍경화 구성에 대한 그의 천재성을 서양에서 맨 처음 인정해준 것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연작 판화 〈도카이도 53역참 東海道五十三次〉(1833~34)은 그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생애

히로시게는 에도 소방대 소방 감독관인 안도 겐에몬[安藤源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로시게가 어릴 때부터 스케치를 좋아했다는 것은 다양한 일화에 나타나 있다. 12세 때인 1809년 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 직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듬해초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히로시게가 소방 감독관으로 실제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급료도 적었다. 그가 1811년경 우키요에의 대가인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간 데는 그의 타고난 예술적 성향과 더불어 이런 요인들도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히로시게는 도요히로의 제자가 되었고, 도요히로의 수수하고 세련된 취향은 히로시게가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완전히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히로시게는 15세 때 아호와 우키요에 화가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첫 작품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818년에 이르러서였다. 책의 삽화 형태로 발표된 이 작품에는 이치유사이 히로시게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다. 서명이 있는 작품 가운데 이보다 앞선 것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하생시절에 히로시게는 도요히로 화실을 위해 잡다한 일(예를 들면 값싼 부채 그림)을 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가노파[狩野派]와 인상주의적인 시조파[四條派]의 화풍도 공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유파는 그의 후기 작품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히로시게는 화가로 독립하자마자 가업인 소방 감독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림에만 전념했다. 서민적인 우키요에 화가들처럼 히로시게의 초기경력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몇 단계로 나누어 특징지을 수 있다. 첫 단계는 1811~30년경의 문하생시절이다. 이때 그는 주로 선배들의 작품을 모방해 인물 판화(젊은 여인, 배우, 무사) 작품을 제작했다. 2번째 단계는 1830~44년경의 초기 풍경화시대이다. 이 시기에 그는 풍경화와 화조(花鳥) 판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낭만주의 이상형을 창조했는데, 이 이상형은 그의 유명한 〈도카이도 53역참〉과 일본 풍경을 묘사한 그밖의 연작 판화에서 구현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1844~58년의 후기 풍경화시대이다. 순수한 풍경 및 인물이 있는 풍경을 주로 그린 이 시기에는 지나친 인기의식과 다작으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1832년 그는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京都]까지 여행했다. 가는 길에 53개 역참에 각각 하룻밤씩 묵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스케치했다.

같은 해에 그는 55점의 풍경 판화(도카이도의 시발점과 종착점 및 각 역참마다 1점씩)로 이루어진 〈도카이도 53역참〉이라는 연작 판화를 발표했다. 이 연작 판화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우키요에 화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일본의 다른 지방을 여행해 유명한 〈기소 가도 69역참 木曾街道六十九次〉·〈에도 근교 8경 江戶近郊八景〉·〈오미 8경 近江八景〉·〈도토 명소 東都名所〉를 묘사한 연작 판화를 발표했다. 그는 또한 이전에 해놓았던 스케치를 이용해, 도카이도 53경의 새로운 작품을 되풀이해 제작했다.

말년에 히로시게의 작품은 점점 질이 떨어졌는데, 그것은 주로 출판업자의 지나친 요구와 자신의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 히로시게는 5,000점이 넘는 판화를 제작했고, 그의 목판화 중 일부는 1만 부나 복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사하고자 하는 광경을 몇 개의 단순하고 고도로 장식적인 요소로 변형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었던 히로시게는 눈에 보이는 것의 본질을 포착해 그것을 놀랄 만큼 효과적인 구도로 전환시켰다. 눈, 비, 안개, 달밤의 풍경은 아주 시적(詩的)인 그의 걸작의 한 요소가 되었다.

히로시게의 초기 동시대인인 호쿠사이[北齋]는 순수한 풍경 판화의 혁신자였다(호쿠사이). 그의 뒤를 이은 히로시게는 호쿠사이만큼 뚜렷한 개성으로 주목을 끄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차분한 방식으로 그에 버금 가는 걸작을 많이 완성해냈다.

호쿠사이의 접근방식은 히로시게보다 힘차고 사실주의적이며, 다양한 표현양식을 광범위하면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히로시게는 이런 훈련이 부족했지만, 일본의 통속화 전통에 입각해 온화하고 시적인 독특한 풍경화를 창조했다. 그의 그림에는 이제까지 이 화파의 어느 화가도 이루지 못한 인간적인 감촉이 있었다. 이 그림들은 지금까지 자연의 경이를 거의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친밀해지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히로시게는 여행과 포도주를 좋아하고 미식가였으나, 그밖의 취향에서는 진정한 에도 시민이었다. 그는 콜레라가 한창일 때 병에 걸려 죽었는데, 유언장에다 옛날의 에도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는 고시(古詩) 1편을 인용함으로써, 과분한 장례식을 삼가라는 뜻을 가족에게 남겼다. "내가 죽거든/불태우지도 말고 땅에 묻지도 말라/그저 들판에 내던져/굶주린 개들의 배를/채우게 하라." 히로시게는 이 시에 다음과 같은 시구를 작별의 말로 덧붙였다.

"붓을 에도에 남겨두고/새로운 여행을 떠나노라/천국의 모든 명소를/샅샅이 구경하고 싶구나!"

평가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를 독자적인 장르로 통합·정리했고,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처음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음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19세기말에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서 재발견되었을 때, 그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폴 세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서양화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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