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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지역의 상아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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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 조각

이집트 제3중간기의 상아 조각 작품

ⓒ Rama/wikipedia | CC BY-SA 2.0 fr

상아 조각은 중국의 가장 오랜 미술 양식의 하나이다.

대(殷代:BC 18~12세기) 왕들의 무덤에서 뛰어난 솜씨의 상아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디자인과 기술이 뛰어나서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하 유역의 숲에 코끼리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상아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대(周代:BC 12~3세기)의 궁정에서는 왕자와 고위 관리들이 상아로 만든 좁고 긴 메모판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다.

이것을 '홀'(笏)이라 하여 보통 장식띠로 몸에 두르고 다녔다. 대(漢代:BC 206~AD 220) 때에는 이 상아판이 신분의 표시로서 정장에는 이것을 꼭 지녔다. 그뒤 대(唐代:618~907)와 대(宋代:960~1279)에는 이 상아판이 매우 길어졌으며, 궁정 관리들이 메모판으로뿐만 아니라 일종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지니고 다녔다. 이 상아판은 17세기에 명(明:1368~1644)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 궁정의 고위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상아로 만든 작은 입상들도 약간 남아 있다. 그외에 평평한 상아판에 거무스름한 색을 입힌 뒤 복잡한 모양의 새, 동물, 기하학적 도형을 새기거나 그 위에 다시 다른 색으로 염색한 것도 있다.

송대 이전에 코끼리들은 당시 난차오[南詔] 왕국의 영토인 중국 남서부(지금의 윈난[雲南])의 황야지대로 멀리 쫓겨갔다. 따라서 상아의 새로운 공급원을 해외에서 찾아야 했는데, 이무렵 아랍 상인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코끼리의 엄니를 잔지바르에서 중국으로 가져왔다.

민족주의 성향을 띤 새로운 나라는 몽골의 원(元:1271~1368)나라를 무너뜨린 뒤 계속해서 14세기에 상아 조각술을 부흥시켜 훌륭한 기술을 되살렸다. 현존하는 명대의 상아 조각들은 대부분 색을 입히지 않고 상아의 자연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훌륭한 조상들이다. 명대의 훌륭한 조각 전통은 대(淸代:1644~1912)의 전반기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이무렵 상아에 색을 입히는 기술이 되살아났으며, 정교하게 새긴 조각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염료와 래커를 동시에 사용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이것들이 중국의 조각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이징[北京]과 광저우[廣州]는 상아 조각의 주요중심지였으며, 개인 또는 집단이 이것을 만들었다. 그러한 것으로는 원통형 붓통, 식탁 칸막이, 의자 팔걸이, 그밖의 책상 부품들, 홀, 아편용 코담배병·코담배접시·부속물들, 아름다운 도자기를 올려놓는 작은 탁자, 궁정의 귀부인들을 위한 향수상자, 거울갑, 그밖의 화장용품 들이 있었다.

상하이[上海]에서는 젓가락·마작도구·빗·인장과 같은 실용적인 물건이 많이 만들어졌다.

베이징과 광저우는 1912년 청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계속 중국 상아 조각의 최고 중심지였다. 그 시기에는 황제의 후원이 없어지면서 제작량이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이 업종은 주로 해외 거주자와 관광객들에게 상아로 만든 지팡이와 카드 집 등의 물건들을 대주는 일을 맡았다.

이 구매자들은 감식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19세기 중반 이후 쇠퇴해가고 있었던 상아 조각의 수준은 더욱 급격히 저하되었다.

일본에서는 고대에 상아 조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조각가들은 약간 늦게서야 상아 조각술을 배웠지만,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의 상아 조각가들은 이 기법을 놀랄만큼 빨리 습득했으며 그당시에 만들어진 많은 소형 미술품은 지금까지도 감탄을 자아낸다.

일본에서는 주로 샤미센[三味線]의 현을 켜는 데 쓰는 픽이나 전통적인 두루마리 그림을 감는 축의 끝부분 등을 만드는 데 상아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주로 도쿠가와 시대에 남자들의 복장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네쓰케라는 비녀 단추 모양의 장식품에 사용되었다. '네쓰케'는 남자들의 장식띠에 약상자(인로)와 담뱃대 및 담배쌈지를 붙들어매는 데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대개 인물·풍경·동물 등을 정교하고 세련된 솜씨로 새겼다.

1867년 도쿠가와 체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의상이 유행하고 궐련이 들어오자 네쓰케는 점차 사라졌다. 그러자 상아 조각가들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해외 거주자와 관광객들을 위한 물건을 만들게 되었으며, 빅토리아조의 기호에 맞추어 보석함, 궤, 카드 집, 체스의 말, 단추, 브로치 등을 만들었다. 1900년경 수많은 모조품과 대량생산을 위한 기계 도구의 사용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상아 조각술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일본의 상아 조각은 대부분 죽은 미술가들의 서명을 넣어 옛날의 네쓰케를 복제하거나 상아로 만든 중국의 고미술품을 모방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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