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147, 일본 |
---|---|
사망 | 1199. 2. 9, 가마쿠라[鎌倉] |
국적 | 일본 |
요약 덴노의 권위에 대항해 일본의 전 구니에 슈고와 지토를 두어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을 약화시킨 인물이다. 1180년대 미나코토 요리마사가 세자 모치히토오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요리토모 자신도 반란을 일으켰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로 진격해 그곳에 본부를 설치했고, 간토 지역의 가신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미나모토 추종세력을 직접 관장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덴노의 요청에 요리토모의 사촌인 미나모토 요시나카를 무찔렀고, 덴노가 자신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요시쓰네를 지지하자 요시쓰네를 축출했다. 이후 덴노에게 일본 전역에 슈고와 지토를 둘 것을 주장해 이를 실현시켰다. 1192년 요리토모는 스스로 세이이다이쇼군이라 칭하고 봉건영주들을 통수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1199년에 죽었다.
개요
이후 700년 동안 바쿠후[幕府] 체제에 의해 봉건영주들이 일본을 다스리게 되었다.
요리토모는 덴노의 권위에 대항해 일본의 전 구니[國]에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를 두어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을 약화시켰고, 1192년 슈고와 지토를 감독하는 쇼군[將軍] 칭호를 획득했다.
귀족·무사로서의 배경
명문 귀족가문 출신인 그는 세이와[淸和:858~876 재위] 덴노의 후예로서 왕실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성(姓)인 미나모토는 한자로 겐지[源氏](미나모토를 음독하면 겐[源]이 됨)인데, 겐지라는 성은 세계적인 명작의 하나인 고대소설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에서 고대 궁중법도의 화신(化身)으로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귀족이자 무사가문에서 태어난 요리토모는 궁중의 세련되고 우아한 법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권력욕이 강하고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조차도 냉정하게 대했다.
실제로 가까운 친척까지 여러 명 죽였을 정도로 비정했는데, 일단 집권을 하게 되자 유능한 행정가가 되었다.
초기상황
그는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1159년 교토[京都]에서 헤이지[平治]의 난(亂)을 일으켜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다이라 기요모리). 요리토모는 생포되어 이즈 구니[伊豆國:도쿄 서남쪽에 있는 반도]로 유배당해 20년 동안 다이라 씨[平氏]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요리토모는 여기서 간수인 이토 스케치카[伊藤祐親] 딸을 유혹해 유배생활의 단조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이를 눈치챈 스케치카가 격노하자 요리토모는 스케치카의 상관이자 이웃인 호조 도키마사[北條時政]에게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다. 도키마사는 다이라 씨의 가신이기는 했으나 이 가문에 대해 적대적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정과 지방 간에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호조 도키마사의 딸인 마사코[政子] 역시 요리토모의 유혹에 넘어갔는데, 두 사람은 그녀의 공식약혼자인 친(親)다이라 씨 지방장관이 제거된 1180년이 되어서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특징, 즉 도키마사와 요리토모 사이에 하나의 합의가 신속히 이루어졌으니, 바야흐로 요리토모의 정치적 야심은 지지세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한편 다이라 씨의 우두머리인 다이라 기요모리는 왕실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은퇴한 덴노인 고시라카와[後白河]를 더욱 격리시켰다(일본사에서 당시 덴노는 조정에서 물러나 '은퇴'한 상태로 지내는 적이 종종 있었는데, 이유는 지나치게 복잡한 궁중의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관행을 인세이[院政]라 부름). 한편 대부분의 귀족가문들뿐만 아니라 대규모 사찰과 신사(神社)의 우두머리들은 다이라 씨가 덴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으로의 부상
1180년에 미나모토 요리마사[源賴政]가 세자 모치히토오[以仁王]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세자는 미나모토 씨에게 여러 지역에서 궐기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같은 세자의 명령을 구실로 요리토모 자신도 반란을 일으켰다. 요리토모의 병력이 전투에 투입되기 직전에 모치히토오가 사망했으나 요리토모는 동부지역의 봉건영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다이라 가문에서도 궁중의 사촌들로부터 하찮은 보답을 받는 일에 불만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요리토모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요리토모는 즉시 현재의 도쿄에서 남쪽으로 16㎞ 떨어져 있는 가마쿠라[鎌倉]로 진격해 그곳에 본부를 설치했다. 그는 간토[關東:도쿄의 동쪽] 지역의 가신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미나모토 추종세력을 직접 관장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친척 등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꺼려했던 그는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목적으로 사무라이 도코로[侍所]를 설치했다. 1183년 요리토모의 사촌인 미나모토 요시나카[源義仲]는 호쿠리쿠[北陸] 지방을 점령하고 이어 왕궁이 있는 교토로 진격했다.
지지자와 적대자들을 대립시켜 왕권의 일부나마 되찾아보려 했던 고시라카와 덴노는 요시나카의 살기등등한 기세를 꺾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에 요리토모는 교토에서 요시나카를 무찔렀다.
요리토모는 구몬조[公文所]·몬추조[問注所]를 설립함으로써 동부지역에 정치적으로 독립된 군사정부를 세웠으나 교토에 있는 중앙정부인 왕궁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1184년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인 노리요리[範賴]와 요시쓰네[義経]는 다이라 씨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였는데, 특히 요시쓰네는 탁월한 무장(武將)으로 요리토모가 시기할 정도였다.
이 전투는 극적으로 끝나리라 예상되었으나 이듬해 1185년에 가서야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미나모토가 거듭 승리를 거두자 덴노는 요리토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요시쓰네를 지지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이내 요시쓰네를 축출하고 덴노에게 일본 전역에 슈고와 지토를 둘 것을 주장해 이를 실현시켰다.
이 제도는 요시쓰네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나 이 제도를 통해 요리토모는 전국을 장악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후 곧 요리토모는 요시쓰네를 붙잡아 처형시켰다.
가마쿠라 바쿠후
요리토모는 각 구니에 배치된 슈고에게 그 지방의 미나모토 씨 가신들에 대한 행정 및 경찰권을 주었다.
반란이나 살인사건을 재판할 수 있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던 슈고는 각 구니의 군통수권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각 개인의 토지를 감독하기 위해 보다 온건한 지토[地頭]제도가 도입되어 과세(課稅)와 토지관리를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슈고·지토는 봉건영주로 성장했다. 이러한 제도를 이용해 요리토모는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며 일본의 최남단인 규슈[九州] 같은 원거리 지방까지도 지배하려고 애썼다.
1185년 그는 도호쿠[東北] 지방의 독립귀족인 후지와라 야스히라[藤原泰衡]를 쳐부숨으로써 수도인 교토로부터 독립된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겠다는 야망을 내외에 과시했다.
1192년 오랜 정적(政敵)인 고시라카와가 죽고 나서 몇 달이 지난 뒤 이제 자신의 야망에 제동을 걸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자, 요리토모는 스스로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라 칭하고 봉건영주들을 통수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이로써 가마쿠라 바쿠후가 성립된 것이다(가마쿠라 시대). 1192년 이후 요리토모는 무사 영주, 궁중귀족 그리고 강력한 사찰이나 신사(神社)들 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슈고와 지토제도에 의해 교토 조정과 가마쿠라의 요리토모 정부의 관계는 상당히 안정되어갔다. 요리토모는 1199년에 죽었다. 그는 특히 사촌과 동생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자신의 대업이 영원히 계속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의 가신들 사이의, 또 무사계급 전체의 불화를 막아내야 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