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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독일

키징거-브란트 시대

대연정 구성

연립 정부에 참여했던 자민당 출신의 장관이 사직함에 따라 에르하르트 정부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결국 자민당과 연립 정부는 붕괴되었고, 정국 안정을 위해 사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자는 의견이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자민당의 연립 정부 탈퇴 이후 사민당과 기독교연합은 협상을 통해 연립 정부 구성을 타진하였다. 사민당은 연립 정부 참여 명분으로 프랑스와 미국과의 지속적인 우호 관계 유지, 핵무기 개발 포기, 동유럽 국가와 관계 개선, 국제 무대에서 서독 외교가 동독보다 우위권 확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한 법적 보완 조치, 국가 재정 질서 확립, 연방 정부와 지방 정부와의 재정 질서 재조정, 사회안전망 구축 등을 확보한다고 선언하였다.

사민당은 기독교연합과 충분한 협상을 가진 후 의견의 접근을 이룰 수가 있었다. 사민당 원내 총회는 대연정을 찬성하여 서독이 탄생한 이래 처음으로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1여당인 기민당 출신의 키징거 총재가 수상에 취임하였는데, 당내의 유력한 경쟁자인 슈뢰더 외무부장관, 바르젤 원내총무, 게르스텐마이어 국회의장을 물리치고 총리에 선출되었다.

키징거가 총리 후보로 지명될 수 있었던 것은 8년간 중앙무대에서 떨어져 있어서 당내의 권력 암투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후보들은 바이에른에 머물고 있는 슈트라우스를 견제했지만, 그는 지방에 머물면서도 기사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슈트라우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여 그와 동맹을 구축했고, 이로써 기사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가 있었다. 키징거는 수상 후보 결정전에서 그를 지원했던 기사당 출신의 슈트라우스를 재무부장관에 임명하였다. 사민당 출신 의원들은 슈피겔 사건의 중심 인물인 그에게 거부 반응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의 정책으로 결정된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연합과 사민당은 독일에서 일고 있는 네오나치주의자들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대연정이 불가피했고, 당장 직면한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도 강력한 정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민당 총재인 브란트는 자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소수의 정부는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판단하여 대연정을 선택했다.

1966년 대연정 구성

키징거 수상과 브란트 외무부장관이 악수하고 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연정에서 사민당은 국내 정치와 경제, 외무, 동·서독 관계를 담당하였다. 사민당 총재 브란트가 외무부 장관, 함부르크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쉴러가 경제장관, 하이네만이 법무부장관, 베너 원내총무는 독일문제장관, 레버가 교통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대연정 내각에는 바이에른 출신의 슈트라우스가 재무부장관, 전직 외무부장관인 슈뢰더는 국방부장관, 뤼케가 내무부장관, 헥셔를이 농림부장관, 카져가 노동복지부장관에 취임하였다.

입각은 하지 않았으나 사민당의 슈미트는 원내총무에 임명되어 기민당의 바르젤 총무와 정치적 문제를 조율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중요한 직책을 맞게 되었다. 두 젊은 원내총무의 정치적 운명은 대연정 기간(1966~1969)에는 같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대연정이 끝나고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립 정부 시대(1969~1973)를 맞이하면서 야당으로 전락한 바르젤 기민당 원내총무는 브란트 수상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주도하다가 실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하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슈미트는 브란트 수상 시절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수상청 간첩 기욤 사건으로 브란트 수상이 중도하차하자 수상에 선출되었다. 이후 1982년까지 서독의 수상으로 연방 정부를 항해하는 기관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키징거의 삶과 정치 행로

키징거는 1904년 슈바벤의 남쪽에 위치한 에빙겐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섬유 공장의 경리 담당 직원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직후 사망하였다. 키징거에게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절약정신과 근검한 생활 습관 덕택에 경제적 여유는 누릴 수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부족함 없이 성장하였다. 키징거는 어린 시절 고향의 산골 풍경에 대해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편마차를 타고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푸른 골짜기를 지나, 맑은 시내를 지나던 모습을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고향 동네 모퉁이에 있는 물레방아가 사라지자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는 로트바일에서 초등교육양성 기관학교를 마친 다음, 대학 도시 튀빙겐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시작으로 1926년부터 1931년까지 베를린에서 법학과 국가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을 마친 1932년 마리-루이제 슈나이더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 수도 베를린에 살면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 행태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유명한 문학가인 토마스 만의 강의를 좋아했고, 미래의 직업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법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아버지는 학비를 조달할 능력이 없어 아버지의 친구인 프리드리히 하욱스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였다. 하욱스는 에빙겐의 제조업자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친구의 아들인 키징거를 지원했으며, 1928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학비를 도와주었다.

키징거는 1933년 나치 당에 가입하였고, 1년 후 나치수송대에서 일하였다. 나중에 자리를 옮겨 전쟁 중에는 외무부 라디오 정책국 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과거의 행적은 정치가 키징거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고, 수상이 되었을 때는 재야 세력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외무부에 근무한 경력 때문에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약 1년 반 동안 루드비히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47년 3월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고 출소하였다. 같은 해 기민당 남뷔르츠부르크-호엔촐레른 지방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1948년 법적으로 명예가 회복되면서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49년부터 1958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로 선출되기 전까지 연방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문예 애호가였고, 매력적인 달변으로 포도주를 마시면서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모든 일을 급하게 처리하지 않고,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대화로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방법을 보였다. 대화와 협상을 중시하는 그는 최고의 권력에 오른 수상 시절 주장을 강하게 내보이지 않으면서 정부 여당 내 여러 계파와 의견을 조율하는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키징거는 1958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에 도전하여 지방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주지사로서의 정치적 활동은 후에 중앙 무대에 진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주지사로서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그는 우아하고, 얌전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지방에서 예술가와 문화계 인사들과의 잦은 만남을 가지면서 딱딱한 정치인의 모습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즐길 줄 아는 멋진 정치가로 평판을 받았고, 또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쉴러와 슈트라우스

대연정 시대 경제 정책을 주도했던 쉴러 경제장관(왼쪽)과 슈트라우스 재무부장관(오른쪽)이 담소하면서 산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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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지방정치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정치가와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외교 정책의 전문가였던 키징거가 세계적인 인사들과 만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나 주지사로서 공식 만찬회를 베풀었고, 드골 대통령과 만나 독·프 우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당시 수상이었던 에르하르트는 친미주의 외교 정책을 선호한 관계로 프랑스와 다소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미국 못지않게 프랑스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 키징거는 나중에 수상 선거에서 드골주의 외교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들의 도움으로 수상에 선출될 수 있었다. 특히 슈피겔 사건으로 본의 정치 무대에서 밀려나 잠시 뮌헨에서 활동하던 슈트라우스의 지원은 그가 수상으로 선출되는 데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수상이 된 키징거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였고, 부가가치세를 실시하여 국가 수입을 증대시켰다. 국내 정치 안정을 위해 비상사태법을 제정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홀슈타인-독트린을 완화 적용하여 동유럽의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였고, 동유럽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안보적인 측면에서는 핵확산 금지조약 가입 문제가 사민당과 지속적인 논쟁을 야기시켰다.

1969년 사민당이 연정 파트너를 자민당으로 교체함에 따라 기민당과 사민당은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고, 그는 명예총재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도 의원직은 1980년까지 계속 유지하였다. 1984년에는 공식적인 활동을 모두 중단하였고, 1988년 3월 9일 그가 처음 대학 생활을 시작했던 튀빙겐에서 사망하였다.

위기 극복 정책

대연정이 출범했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경제 위기 극복과 극우주의 성향을 차단하는 일이었다. 실업자 수는 1966년 12월에 37만 명에서 한 달 후인 1967년 1월에는 60만 명을 넘어섰다. 완전 고용을 달성했던 경험이 있는 기민당 정부는 증가하는 실업자 문제 때문에 큰 고심에 빠졌다.

대연정 시기에 거대 여당과 정부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경제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예산 정책을 수립하여 점진적인 세수 증액안을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해 연방 정부와 지방정부의 세입규정안을 새로 수립하였다. 새로운 법안은 시장경제원칙에 충실하면서 가격 안정과 무역 증대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사회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키징거 수상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연방은행이 긴축재정에서 탈피하여 연방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신규 투자 활성화 정책에 유연하게 대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방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도로 건설, 연방 철도, 우체국 시설의 근대화를 명목으로 25억 마르크를 지원하였다. 노동조합과 경제인연합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지혜를 모아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였다.

연방 정부는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대연정 경제 정책의 지휘관은 사민당 출신의 쉴러 경제장관이었다. 그는 케인즈주의자로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면 경제 순환주기에 의존하지 않고 절감 정책보다는 재정지출의 극대화를 통해서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하고, 산업 시설의 재가동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인 지출 정책으로 발생하는 재정 적자는 신용대출을 통해 국가가 부담하고, 경제가 활성화되고 세입이 증대되면 이자와 대출금을 갚아간다는 것이었다. 케인즈 이론에 충실한 쉴러는 슈트라우스 재무장관과 연방은행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경기활성화를 위해 연방 정부는 철도와 우편 시설 현대화, 학문과 연구 분야 투자를 확대하였다. 철도 시설 확장비로 7억 5천만 마르크, 우편·통신 현대화 사업비 4억 8,500만 마르크, 고속도로와 국도 건설비로 5억 3,400만 마르크, 공공주택 건설비로 1억 5천만 마르크, 군인 가족 주택 개량비 2억 마르크가 투자되었다. 지방 문화 시설 보수비 2억 마르크, 학문 연구 지원비 7,300만 마르크, 정부 공공 기관의 정보화 사업비 2천만 마르크, 대학 기숙사 건설비 2천만 마르크가 투입되었다.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 노동조합과 기업주는 대결 양상과 집단이기주의를 포기하고, 상호 협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연방, 주정부, 지방 행정 단위까지 폭넓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지원되는 금액은 약 53억 마르크로 학문 연구, 대학 증축, 핵연구 시설, 전산·컴퓨터 시설, 병원 증축, 체육관, 운동장 건설, 가족 휴양 시설, 청소년 교육 시설, 기숙사 등에 집중되었다. 이 외에도 항구 시설, 공항 안전 시스템, 상·하수도, 해안선 및 국경 지역 경비 시스템 근대화를 위해 활발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쉴러 장관의 경제개혁 정책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연방과 지방이 균형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가 추진한 경제 정책은 어느 특정 집단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방해하거나 지연시키지 않고 전 국민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져 에르하르트 수상 시대 경제 위기는 완전히 극복되었다.

6·8 학생 운동

독일에서는 1960년대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부활절 시위 행진이 있었다. 이 행사에는 노선을 가리지 않고 기독교인, 평화주의자, 사회주의 그룹이 참가했다. 1960년 이 운동이 처음 시작할 때는 1,000명이었지만, 해가 지나면서 1967년 부활절 시위에는 15만 명이 참가했다. 부활절 시위는 지식인·노동조합·회사원·청소년·대학생 단체 등이 참가하여 반핵 운동에 서명하였고, 나중에는 핵무장뿐만 아니라 경쟁적인 군비 경쟁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1962년부터 부활절 시위는 핵무장 반대 시위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고, 그다음 해부터는 군비 축소에 대해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재야 운동 단체로는 '부활절 시위' 외에도 사회주의 독일학생연합(SDS)이 있었다. 이 단체는 사민당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사회주의 독일학생연합은 어느 재야 단체보다 이론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서 활동력과 능력을 인정받는 단체였다. 이 단체는 반핵이나 군축에서 벗어나 1960년대 독일이 처한 정치·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단체는 서독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였고, 서유럽 민주주의가 현실적이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재야 단체와 학생 운동권은 선진 민주 국가인 미국이 치르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서유럽 민주주의 전통인 자유와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 밖에도 미국이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해방운동을 억압하면서 오히려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있다며 미국 국제 정치의 기본 성향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 학생 운동은 독일이 미국의 비민주적인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1968년 혁명의 전초전은 1967년 여름 팔레비 이란 왕과 그의 부인 디바가 베를린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팔레비가 행한 비민주적인 정치 행위, 즉 야당 탄압과 박해는 독일에 살고 있는 반대자들의 반발과 저항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경찰은 팔레비의 안전 보호를 위해 도로를 차단하고, 강경 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팔레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이란의 비밀경찰이 동원한 이란인 박수 부대가 베를린 시청과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왕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때 팔레비 열광주의자와 팔레비를 반대하는 학생 및 이란의 야당 세력 간에 충돌 사태가 일어났다. 팔레비와 그의 부인 디바가 오페라 〈마적〉을 관람하고 있을 때 경찰과 데모 군중 사이 충돌전이 벌어졌는데 경찰이 쏜 총에 맞아 26세의 대학생 오네조르크가 사망했다.

1967년 함부르크에서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

함부르크는 베를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사민당의 지지 기반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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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군중 시위와 국가 권력 간의 충돌 서곡이 되었다. 국가의 폭력 사건 결과, 베를린은 비상 사태 수준까지 가게 되었다. 베를린 시 경찰청장이 사퇴했고, 뒤이어 시 내무장관, 마지막에는 시장까지 물러나는 결과를 맞이하였다.

학생 운동은 1968년 4월 11일 부활절 시위 때 베를린 쿠르피어스텐담에서 23세의 요세프 바크만이 루티 두취케를 저격한 것이 발단이었다. 두취케는 독일 학생 운동연합의 이론가로 학생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두취케는 중상을 입고 나중에 사망하였다. 저격범 바크만은 체포되어 두취케가 공산주의자이고, 자신은 공산주의자를 증오하기 때문에 저격했다고 고백했다. 두취케 저격 사건은 방송과 신문, 잡지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의 '부활절 시위 운동'은 서베를린의 학생 단체와 재야 단체는 물론, 서독 전역에서 두취케 저격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가 되었다.

1967년에 오네조르크가 사망하고,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언론 그룹 '악셀-슈프링거'는 학생 운동을 좌익과 민주주의 비판 세력이 선동한 것이라고 매우 비판적으로 기사를 보도하였다. 학생들은 기사를 호도한 슈프링거 사의 비민주적인 행동을 비판하고, 이 언론 그룹에서 발행하는 〈빌트〉 지의 수송을 저지하였다. 1968년 두취케가 사망한 후 학생과 재야 운동 단체는 독일 전역에서 두취케 사망을 규탄하는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과 재야 세력의 시위대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여 뮌헨에 있는 슈프링거 사의 진입로를 막았다. 이곳에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과 투석전이 벌어졌고, 32세의 사진기자 클라우스 프링스와 24세의 학생 뤼디거 슈렉이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학생 운동의 지도자인 두취케가 저격된 장소

그의 사망 후 학생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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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조합과 제야 세력이 지원하자 학생 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시위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키징거 수상은 무장한 좌익 세력이 민주 정치 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이라며 강경하게 대처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자유민주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조력할 것을 부탁하고 무력을 선동하는 행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내무부장관 벤다는 폭력화된 시위 운동을 순수학생 운동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중심에 '사회주의 독일 학생연합'이 있다고 했다. 내무부장관이 '사회주의 독일 학생연합'을 위헌 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 단체의 활동을 금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순수학생 운동 참가자들이 이 단체와 거리를 두면서 서서히 이탈해가자 과격론을 주장했던 '사회주의 독일 학생연합'은 고립되었다. 더 이상 존재의 명분이 사라지자 급좌적인 성향을 가진 학생은 이어서 창당된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온건한 중도적 성향의 학생들은 후에 사민당과 자민당이 연립 정부를 구성하자 사민당에 입당하여 의회민주주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이에 순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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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식 집필자 소개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 출강하였다. 공저로는 <유럽연합 체제의 이..펼쳐보기

출처

이야기 독일사
이야기 독일사 | 저자박래식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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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키징거-브란트 시대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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