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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독일

나폴레옹의 몰락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

전승을 계속하던 프랑스도 1812년부터 서서히 패배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에 벌어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독일의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 나폴레옹은 독일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 보호령에 있던 라인 동맹도 해체되었다. 과거 라인 동맹에 가담했던 바이에른이 탈퇴하여 프로이센의 연합군 편에 가담했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프랑스 침략은 독일에게 패배의 충격과 굴욕감, 패배한 국가들이 부담해야 하는 가혹한 재정적 압박, 농촌의 약탈과 황폐화, 프랑스의 관세가 야기시킨 물가의 폭등 등으로 경제와 사회에 부담을 안겨 주었다.

한편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마침내 1812년 6월,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를 침공하여 9월에는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이미 모든 것이 불탄 쓸모없는 도시였으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이 제시한 휴전을 거부했다. 프랑스 군은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철수했으나, 철수 과정에서 쿠투조프(Mikhail Ilarionovich Kutuzov, 1745~1813) 휘하의 군대와 코자크 기병대, 러시아의 살벌한 추위까지 프랑스 군을 강타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은 가시화되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2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던 프로이센은 이윽고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를 청산했다.

또한 같은 해 6월, 영국·러시아·프로이센 간에 라이헨바흐 협정(Reichenbach Conventions)이 체결됨으로써 유럽 주요국들의 반프랑스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국가들은 이 동맹을 단순한 군사적 동맹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정복자에 대항하는 국가들의 질서 유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나폴레옹의 팽창으로 인해 그들 국가 내부에 침투한 민족주의·자유주의·혁명정신 등 국가 내 질서 유지에 악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그들 고유의 질서를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동맹조약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영국의 공세를 동부의 새로운 공세와 효과적으로 연결시켰으며, 웰링턴 장군과 그 휘하의 군대들은 프랑스 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퇴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영국은 동유럽에서 직접적인 전쟁을 수행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재정적인 지원은 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나폴레옹에 대한 중립의 고수와 함께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그러한 위치를 고수할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메테르니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마인츠 대학에서 수학했다. 나폴레옹 침략 당시 반프랑스 세력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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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프랑스의 동맹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참여하기보다는 중재 역할을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영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유럽 차원에서 프랑스 제국을 격퇴시키려거나 도덕적으로 응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중부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강력한 두 라이벌인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적대 관계를 유지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나폴레옹은 드레스덴에서 메테르니히에게 회견을 제의했으며, 메테르니히는 이 회담에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평화조건들을 수락하라고 지속적으로 나폴레옹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중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프랑스 봉쇄를 위하여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쪽으로 대세는 기울었으며, 반프랑스 전선에 가담함으로써 메테르니히는 중부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위상 강화를 위해 영국이 협조할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도 4차 대프랑스 연합전선에 참여했고, 결국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프랑스 군은 극심한 피해를 입고 라인 강 서쪽 프랑스로 패퇴했다.

1814년 1월, 마침내 프랑스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동맹국들의 전투 목적은 '프랑스'라는 국가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의 축출에 가까웠다. 나폴레옹은 3월까지 잔여 병력을 지휘하며 방어했으나, 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은 1814년 3월에 쇼몽(Chaumont) 조약을 맺어 나폴레옹이 무너질 때까지 전쟁을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 동맹군이 3월 30일 파리 근처에 도달하자 파리 시 당국은 나폴레옹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곧바로 동맹군과 교섭에 들어갔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탈레랑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했고,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파리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4월 6일에 퇴위했다. 동맹군들은 퐁텐블로 조약으로 엘바 섬을 그의 거처로 정했으며, 해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200만 프랑을 받고 400명의 자원 호위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5월 4일, 나폴레옹이 엘바에 도착함으로써 그와 강력한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의 기억들은 잊혀지는 듯했다. 이제 회복시켜야 할 세계가 유럽의 주된 관심사로 등장했다. 독일과 중부 유럽이 점차 유럽 대륙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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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식 집필자 소개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 출강하였다. 공저로는 <유럽연합 체제의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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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독일사
이야기 독일사 | 저자박래식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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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나폴레옹의 몰락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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