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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부흥과 혁명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복고적인 현상을 유지하려는 유럽 질서를 설계했던 빈 체제와 독일 연방은 19세기의 시민 계급과 부르주아지들이 추구하던 근대 시민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빈 회의 이후 1848년까지 중부 유럽의 곳곳에서 일어난 정치적 운동의 목표는 분열된 독일 민족 국가의 수립과 각 영방 국가 안에서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 운동을 담당한 계층으로는 서부 독일 라인란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대두는 1830년대 이후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독일 관세동맹이 결성됨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뺀 독일 전역에 걸쳐 통일관세권이적용되고 1835년부터 철도 건설이 시작된 것 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힘은 있지만 정치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현 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사회 계층이었다. 또 이와 같은 부르주아지 뒤에는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 두 계급의 중간에 공화주의(共和主義)를 내세우는 민주주의자라는 쁘띠부르주아지 지식인 단체가 참가하여 정치 운동을 더욱 복잡하게 했다. 이러한 문제들과 어우러져 프랑스의 2월 혁명을 직접적인 계기로 독일의 3월 혁명이 시작되었다.

3월 혁명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1848년 3월 18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 왕궁 앞에서 벌어진 시민과 정규군의 시가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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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이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는 데, 사태의 추이는 거의 비슷하다. 먼저 대중 집회 및 시위가 있었으며, 출판·결사의 자유, 국민 무장, 배심재판제, 독일통일의회 성립 등 자유주의적인 '3월 요구안(Märzfoderungen)'이 제출되었다. 이에 대한 각 영방 정부의 대응도 거의 비슷했다. 이들은 현 체제를 폭력으로 전복하려는 위험과 운동이 진전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정부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으며, 정치적인 모든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곳곳에 시민군이 창설되어 통일 독일을 세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일 것을 각국의 왕들 스스로가 약속했다. 또한 각 영방 국가에서는 자유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내각이 만들어져 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이 내각에 들어왔다.

메테르니히의 실각

크고 작은 여러 영방에서 벌어진 혁명적 기운들은 앞으로 있을 사건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메테르니히의 퇴진을 결정지은 것은 빈과 베를린에서 일어난 봉기였다.

빈 봉기는 3월 13일에 소집한 오스트리아 의회에 대한 청원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노동자들과 결합한 학생과 시민 계층이었으며, 그들의 요구는 여러 다른 영방 국가의 3월 요구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하는 사태가 발생해 시위 군중들은 왕궁으로 난입하여 메테르니히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메테르니히를 해임했으며,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헌법 제정을 약속하고 시민군·학생병단의 창설을 인정했으며, 필러스도르프(Pillersdorf)가 수반이 된 임시 내각을 만들었다.

메테르니히의 갑작스러운 실각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원인을 들 수 있다. 첫째, 메테르니히는 시민 계층의 여론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자신의 정책에 반영하지 않았다. 둘째, 메테르니히는 혁명과 그로 인한 제국의 해체를 두려워했으나, 혁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소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혁명은 경제적인 곤궁이나 정치적 소외와 같은 상대적 박탈감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비밀 결사나 몽상가들의 공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 혁명으로 인해 야기되는 부작용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응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넷째, 그의 국내적 문제에 대한 취약성이다.

1848년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던 교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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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메테르니히는 팔라츠키가 제안한 오스트리아 영방안과 제국 내 소수민족들의 동등한 권리 요구 등을 모두 거절했다. 갈리치아 반란에 대한 대응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메테르니히가 그의 실각을 방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기회였다. 국내의 여러 불만 세력들을 무조건적인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서 유화하고 포섭하는 방법이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실각했으며 영국으로 망명했다.

3월 혁명 이후 빈 정부는 현존 체제로는 더 이상 제국을 원활히 통치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4월 초 갈리치아 지방을 제외한 제국 전 지역의 지방의회 의원들을 빈으로 소집하여 바덴(Baden) 헌법과 벨기에 헌법을 토대로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필러스도르프의 주관으로 약 3주간의 작업 끝에 4월 25일 새로운 헌법(4월 헌법)이 공표되었으며, 이 헌법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필러스도르프 헌법'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크푸르트 파울스 교회 전경

프랑크푸르트 의회 개최 이후 프로이센은 강자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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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48년 5월 15일의 돌격청원서에 따라 같은 해 7월 17일 황제는 개각을 단행했으며, 각 지역의 행정관들은 교체되었다. 같은 달 25일 제국의회가 빈에 위치한 궁정기마학교에서 개원되었고, 여기에는 페르디난트 황제를 비롯한 빈 정부의 고위 각료들도 참석했다. 제국의회 의원들은 대부분 온건한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를 지향했는데, 그것은 앞으로 제국의회에서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기존의 질서 체제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점진적 개혁이 추진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848년 여름 이후 혁명은 주도 계층 간의 분열로 인해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빈의 중앙 정부는 6월 보헤미아 지역을 군정 통치 지역으로 선포했으며, 헝가리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다시금 2월 혁명 이전의 질서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1848년 10월 6일, 빈에서는 정부군의 헝가리 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다. 거기서 폭동도 발생했다. 이 폭동에는 기존의 질서 체제를 부정하던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노동자 및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폭동으로 황제는 빈을 떠나 올뮈츠로 피난가야만 했으나 11월 2일 폭동은 진압되었다.

10월 폭동의 진압은 빈 정부로 하여금 점차 오스트리아 제국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복귀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특히 이전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백작이 수상이 되고, 페르디난트 황제가 18세의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에게 양위하면서 제국은 급격히 2월 혁명 이전의 질서로 복원되었다.

의회의 기능 및 효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슈바르첸베르크는 당시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의회를 가능한 한 빨리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독일계 의원들은 슈바르첸베르크의 의도에 대하여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즉 이들은 권력 분립을 지향한 시민 계층이었기 때문에 절대주의 체제로 복귀하려는 정부의 의도에는 반대했으나 그동안 독일 민족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법적,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여 오스트리아 영방 체제의 도입에 제동을 건 것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제국을 중앙집권 체제로 복귀시키되, 거기서 권력 분립을 법적으로 명문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대독일주의, 소독일주의적인 독일 통합에 대하여 처음부터 반대했기 때문에, 독일 연방 내부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슈바르첸베르크의 주장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결국 황제는 1849년 3월 당시 내무장관이던 슈타치온(Station)이 비밀리에 준비했던 헌법안을 재가했는데, 여기서 민족 문제나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것은 배제되었다. 오히려 황제의 절대적 거부권과 긴급법률제정권 등과 같은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시키는 내용들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이센과 혁명

메테르니히의 실각으로 결론이 난 빈과는 달리 베를린의 경우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및 시민들은 자유주의적 개혁 이외에도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에 앞장설 것을 요구했다. 똑같은 혁명과 소요였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혁명으로 균열이 가시화되었지만, 프로이센은 혁명으로 독일 통일에 대한 담론과 논의가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통일의 모태가 될 독일 국민의회가 소집되었으며, 이 의회가 독일 연방의회를 대신하게 된다고 선언했다.

다음 해 2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헌법을 채택하고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스트리아와의 일전(一戰) 없이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이 시기부터 프랑크푸르트 의회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적 통일안을 제시했다. 전략적으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탈락시키는 동시에 베를린이 독일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확보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왕을 독일 황제로 추대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도 해산되었다. 그러나 1850년에 프로이센은 에르푸르트(Erfurt) 회의를 소집했으며, 1850년 5월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군주 회의를 소집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야경

현재는 유럽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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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는 이에 맞서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개최하여 독일 연방의회는 양분되었다. 빈은 독일 연방 내에서 베를린과 경쟁을 제도화하는 것이 제국 유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과거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두 국가는 의견을 조율하자고 나섰으며, 1815년 체제로 조속히 복귀하여 프랑스와 혁명 세력 모두에 대항하는 보수주의 세력의 연합전선을 재창설해야 한다고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

1850년 말에 독일 연방의 헤센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소요가 있었다. 프로이센은 소요 사태를 에르푸르트 연맹의 군대로 진압하려 했으나, 이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응징하려는 강경 자세를 취하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주장을 지지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일전을 불사할 것인지 외교를 통한 양보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일부 강경파들의 성토가 있었으나 국왕은 결국 양보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프로이센 입장에서 오스트리아보다 프랑스가 더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11월 올뮈츠에서 오스트리아에 굴복했다. 이에 에르푸르트 연맹은 해체되었으며, 1815년의 독일 연방 체제가 복원되었다. 표면상 프로이센은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1848년 이래 프로이센은 많은 것을 얻었다. 부활된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맹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또한 만일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중립을 구하기 위해 라인란트 지역을 프랑스에게 할양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은 이것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양보보다 더 큰 재난을 초래할 것으로 믿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올뮈츠로 인하여 약화되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독일 계획 중의 하나인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적 독일 통일을 잠시 연기한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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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식 집필자 소개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 출강하였다. 공저로는 <유럽연합 체제의 이..펼쳐보기

출처

이야기 독일사
이야기 독일사 | 저자박래식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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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1848년의 혁명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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