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사
종교전쟁 후의 변화
시대 | 근대 초기 |
---|
루터파 농민 반란(1523~1525)과 스파이어(Speyer) 종교회의(1544) 이후 독일 연방의 제후들은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루터파와 가톨릭파 동맹에 가담했다.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보름스 국회가 끝난 후 독일 문제에 치중하기보다는 해외에서 세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이탈리아에서 계속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프랑스를 파비아 전투에서 격퇴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이 약해지자 독일 황제는 이탈리아의 중요한 지역을 차지했다.
황제가 대외 전쟁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제국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의 사상이 독일 전체로 확산되었고,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영향력이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제후와 도시들은 1530년 슈말칼덴에서 동맹을 결성하여 어떤 경우라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대외 전쟁을 통해 그의 세력을 과시했고, 독일에서도 작센의 제후 모리스가 그의 편에 가담하여 반대편인 슈말칼덴 동맹에 비해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다.
1529년 개최된 스파이어 국회에서는 황제가 출석하지 않는 가운데 가톨릭 교회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어떤 군주도 루터의 사상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주교와 도시들은 스파이어 국회의 결정을 반대했다. 이로써 독일 제국 내에 종교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게 되었다. 그러나 남부 유럽에 진출한 터키의 술탄이 강력한 군대로 빈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카를 5세는 가톨릭을 강요하며 종교적 통일에 전념할 여력이 없었다.
북쪽은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선택했으나 남쪽은 합스부르크 가와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가톨릭을 계속 신봉하였다.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터키 해적들은 크리스트교도들이 항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카를 5세는 나폴리, 스페인과 협력하여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터키 해적들을 축출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했다. 해외에서 대외전쟁에 시달린 카를 5세는 독일 제국을 가톨릭 교회로 되돌릴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1546년, 마르틴 루터는 그의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프로테스탄트의 운명에 대해서 아무도 희망적인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루터의 주장을 신봉하는 제후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양분되었고, 또한 조직된 힘도 구심점이 없었다. 게다가 루터가 주장하는 교회들도 모두 새로운 체계나 학설을 정립하지 못했고, 독일 연방의 대부분 지역에서 아직까지도 가톨릭 교회를 믿고 있었다. 황제는 제국과 로마 교회의 정신적·정치적 통일을 목표로 신교 세력을 탄압했지만, 저항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한편 가톨릭 교회만 참가하는 장기적인 트리엔트(Trient) 종교회의(1545~1963)가 진행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가톨릭 자체의 개혁이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 탈피한 의미가 있었을 뿐이고, 가협정으로는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막강한 세력을 확보한 합스부르크 가는 가톨릭을 믿고 있어, 어느 면으로 보아도 프로테스탄트들은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독일 제후, 특히 가톨릭 제후들은 황제의 비대해진 권력과 세력을 두려워했다.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 지방 제후들의 자치권을 침해하여 존립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제후들은 프랑스와 협력하여 황제의 막강한 기세를 꺾으려 했고, 황제는 세력을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오랜 대외 전쟁과 국내에서의 세력 다툼으로 지쳐서 독일의 제후들과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종교회의를 체결했다. 이 회의의 결과로 제후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종교를 선택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1555)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신·구교의 종교회의를 통한 일종의 평화조약이다. 주요 내용은 독일 제후와 모든 자유 도시는 그 통치하에 있는 주민이 가톨릭과 루터파 중에 하나를 택일할 권리를 가짐을 인정했다. 즉 '지배자의 신앙이 지배지의 신앙이다'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주민은 제후가 선택한 종교를 믿어야만 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 결정은 제후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독일 국민 국가의 형성에 절대적인 저해 요인이 되었다. 이후 독일 제국은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분열된 영방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종교회의 이후 1570년까지 3차에 걸친 종교전쟁은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지역 제후들의 권력싸움으로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중북부 지역은 루터파, 중남부 지역은 가톨릭이 우세하게 되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종교전쟁 후의 변화 – 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