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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독일

독일의 정치적 변화

요약 테이블
시대 근대 초기

제국의 상황

독일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1500년대가 되었을 무렵 인구와 영토면에서 보면 유럽에서 대국의 수준으로 성장했다. 특히 급속히 인구가 증가한 라인 강 연안의 라인란트 지역과 바이에른 등 남부 지방에서는 토지의 분할과 개편이 상당히 이루어졌다.

증가한 인구는 도시로 유입되었는데, 도시는 완전히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농촌 인구를 전부 흡수할 수 없었다. 이때 알자스 지방과 바이에른에서 용병 제도가 새로이 도입되어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 문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했다.

이 무렵 독일 전역에는 약 3천여 개의 도시가 있었으나, 이 중에서 2,800개의 도시는 인구 1천 명을 넘지 않는 소도시(小都市)였다. 150여 개의 도시는 1천~2천 명 정도의 인구로, 도시의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도심지에는 나름대로 도시 문화가 형성되었고, 외지인들이 볼 수 있는 관광거리도 생겨났다.

당시 독일 영토에는 2,500개의 자치권을 소유한 정치 단체들이 있었다. 약 2천 명의 제국 기사가 있었으며, 이들은 황제 외에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제국의회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제국의회에 참가할 수 있는 제후는 일정한 세금을 내야만 했으며 성직자, 제후, 백작, 자유 도시들의 대표들에게만 참여가 허락되었다. 제국의회 내에서 세금을 많이 내는 국가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제국의회는 황제가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 소집했다. 제국 헌법은 제후들의 세력 확보를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선제후들의 기득권은 보장되었으나 하급귀족이나 평민들의 권익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제후들은 하급귀족이 제국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방해하여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했다. 따라서 귀족들의 불만이 쌓였고 공평한 대우를 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등장과 오스트리아의 도약

북부 독일에서 프로이센이 정치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을 때 동남부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빠른 속도로 정치적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독일 영토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강대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합스부르크 가는 16세기 중엽부터 정치적으로 입지를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으나,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동남부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 시대에는 각 영방 국가마다 고유의 행정 제도와 관청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는 스페인의 왕실과 결혼 정책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이 유럽의 중심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에 있는 장점을 살려 외국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으며, 자국의 문화와 혼합하여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문화는 남쪽의 이탈리아 문화와 북부의 독일 문화 요소가 합쳐져 탄생한 예술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 문화는 독자성이 결여된 경향이 있기도 했다.

1452년에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치른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막시밀리안이란 총명한 아들이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1493년 황제로 취임했는데, 부르군트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정치·군사적으로 제국의 세력을 강화했으며, 그의 통치력은 네덜란드까지 미쳤다.

막시밀리안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데다 귀족적인 외모와 친절한 성품으로 남들의 신뢰를 받았다. 군인으로서 유능하고 용감한 장군이었고, 종교적으로도 경건한 자세를 취했으며, 새로운 르네상스의 이상과 명예를 존중했다. 그는 강한 군주 국가를 이루기 위해 국가가 강력한 힘을 소유해야 한다는 정치적 원칙을 가지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하고자 했다. 그는 손자 카를이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 세습권을 인정받아 후대에도 그의 혈통이 제국 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합스부르크 우선 정책은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제후들은 막시밀리안의 협력자가 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특히 지역적으로 남부와 서부 독일 제후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었던 탓에 더는 개혁을 방관할 수 없었다.

프히드리히 3세

빌헬름 1세의 아들로 군적에 들어가 사령관으로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중심에는 마인츠 대주교였던 베르톨트 폰 한네베르크가 있었다. 그는 진지하고 인내심이 있는 백작이자 보수적인 종교정치가였다. 독일 제국이 국내 정치에서 안정을 찾지 못할 때 대외 정책으로 관심을 돌려 독일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했다. 또한 독일의 영향력을 국내로 끌어들여 국내 정치에서 평화와 질서를 잡으려고 했다. 그 결과 영방주의 원칙에 따라 제국 조직의 토대를 구축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

1482년 독일 남부의 도시, 울름에서 출판되었다. 그 당시까지 확인된 세계의 전체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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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들어진 지도

1585년부터 1589년에 걸쳐 뒤스부르크에서 출판되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시작된 제국의회의 개혁은 영방주의 원칙에 의한 첫 번째 성공작이다. 제국과 영방 간의 충돌을 금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제후들은 불화와 알력 대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다짐했다.

이를 위해 제국의 대심원(대법원)을 황제의 법정하에 두지 않고 제국의 법정하에 두었다. 따라서 법원에서 황제의 권한은 약화되고 제후들의 영향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제후들은 법원의 재정을 담당했고, 법원의 작업을 통제했으며, 관할 재판장을 상시로 시찰했다. 로마 제국의 법 체제를 적극 수용해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귀족 계급 간의 대립을 최소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근대 국가 형성의 움직임

황제의 권한이 강해지는 것을 반대하며 국내외 정치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한 제후들은 1495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제국의 통치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500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영방주의에 입각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제후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영방정부의 역할을 했다. 이로써 독일 근대 국가는 중앙집권적인 권위 국가가 아닌 영방을 토대로 성립되었다.

제국 행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제국 통치기구는 황제의 권한까지도 일부 위임받았다. 제국 통치기구를 만들 때는 황제와 제후들이 협력하여 합의된 통일을 이루리라 기대했지만, 제후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제국 통치기구는 재정과 지휘나 명령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외교에서도 황제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막시밀리안은 제국 통치기구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제국을 4개의 지역으로 분할하여 균등한 대표자를 선출할 것을 제의했으나 그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했다. 막시밀리안과 마인츠 대주교 베르톨트가 죽고 난 후 정치 및 통치 개혁 운동은 잠시 주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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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식 집필자 소개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 출강하였다. 공저로는 <유럽연합 체제의 이..펼쳐보기

출처

이야기 독일사
이야기 독일사 | 저자박래식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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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독일의 정치적 변화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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