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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독일 연방의 붕괴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독일 연방국 창설을 제안했다. 이 계획안에 의하면 북쪽에서는 프로이센, 남부 독일에서는 뮌헨(바이에른)이 주도권을 잡고,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은 이 동맹을 체결한 다음 날 프랑크푸르트 영방의회에 영방 개편안을 제출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도전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홀슈타인의 오스트리아 총독이 의회를 소집하자 비스마르크는 이것이 가슈타인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홀슈타인에 진주시켜 양국은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양국의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례적으로 빈 신문에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담화를 발표했다. 빈 신문에 발표한 황제의 담화문은 제국을 신뢰하고 충성해달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정작 황제 본인부터가 제국의 능력과 역량에 대하여 신뢰하지는 않았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목전에 이르자 1866년 6월 12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면서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받는 비밀조약을 체결했다. 그 대가로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베네치아를 나폴레옹 3세에게 할양하고 프랑스는 이를 받아 이탈리아에 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만일 오스트리아가 승리할 경우 오스트리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독일 연방을 개편하고, 그러한 개편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이 변하게 된다면 사전에 프랑스 측과 협의할 것을 합의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라인란트 지역에 중립적인 완충 국가 건설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베네치아와 라인란트의 확보라는 두 가지 숙원을 동시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 조약을 체결한 지 이틀 후에 프로이센에 대하여 제재를 가할 것을 영방의회에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홀슈타인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이 제재 사유였다. 프로이센 대표는 퇴장했으며, 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의 전략은 단순했다. 오스트리아 군대를 섬멸시킬 때까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군대를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스트리아가 굴욕을 느끼게 해서는 곤란했다. 프랑스와 전쟁을 할 경우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지켜 줘야 하기 때문이며, 장차 프로이센의 동맹국이 되어 동부의 러시아에 대항해 주어야 했다. 즉 비스마르크의 전반적인 구도는 동시에 두 나라가 전면전을 벌이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오스트리아 군대는 독일인·크로아티아 인·이탈리아 인·헝가리 인·세르비아 인과 같은 많은 인종과 부족들로 구성되었다. 장교들은 한 가지 명령을 하는 데도 최소한 세 가지 이상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또한 메테르니히 시대의 평화를 누린 오스트리아 군대의 장교들은 전쟁 준비 대신 멋있는 군복을 입고 의장훈련을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등 전쟁에 대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프로이센 군대는 빠르게 탄약을 장전할 수 있는 후장총을 도입한 반면 오스트리아 군은 위험한 자세에서 총구를 통해 탄약을 장전하는 전장식 소총을 쓰고 있었다. 또한 신분이 높은 장교들이 평민 출신 사령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도 전력을 약화하는 데 한몫했다. 반면 프로이센 군대는 몰트케 백작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전투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결국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는 4만 4천 명이라는 천문학적인 희생자를 내고 패배했으며, 전쟁 후 오스트리아 군의 지휘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중재 아래 1866년 8월 프라하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가 주도했던 독일연방이 해체되고, 북부독일연방(Norddeutscher Bund)이 결성되어 프로이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하노버, 헤센, 나사우, 프랑크푸르트를 합병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배상금을 프로이센에 지급했고,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합병했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수백 년 동안 독일을 지배해 온 호엔촐레른 가와 합스부르크 가 체제를 종식시켰으며 오스트리아를 독일 국가에서 배제했다.
한편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대한 유화 정책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헝가리 왕국의 독립을 허용했으며, 1867년 3월 15일 제국의 이원화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오스트리아는 수백 년 동안 가져왔던 독일 권역에서의 지위를 잃었음은 물론이고, 더 이상 독일과 어떠한 연계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승리한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추구했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소독일국가주의적 국가 통합을 완성했다. 또한 지속적인 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외국과의 경쟁에서 자국의 기업을 보호했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적 시민 계급을 친정부적으로 포섭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결과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정부에 도전적이지 않고 타협하여 의회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했고, 언론을 장악하여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에서는 시민혁명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부 독일에 기반을 둔 가톨릭을 탄압하여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한편 융커와 부르주아 계급의 결속력을 토대로 한 위로부터 혁명은 융커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시킨 반면, 시민 계급에게는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 사회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 민주적 발전은 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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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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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독일 연방의 붕괴 – 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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