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테이블
시대 중세

잘리에르 왕가도 선조가 추진했던 정책을 유지했다. 콘라트 2세는 부르군트를 독일 제국의 세력하에 영입시켰다. 그리하여 1033년부터 제국에 독일 외에 이탈리아와 부르군트가 편입되었다. 콘라트 2세는 부르군트를 통치하면서 독일의 행정 제도를 강요하기보다는 자체적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서광의 그리스도〉

하인리히 2세에 의하여 설치된 밤베르크 교구는 제국에서 이름난 종교 도시가 되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3세가 통치한 1039년부터 1056년까지 황제의 권위가 최고에 달했으나 황제의 죽음 후 곧 주교 임명에 관한 분쟁 등 여러 분야에서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불과 6세로 너무 어려 통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정치에 간섭했는데, 이때부터 왕의 권위도 서서히 하락했다. 황제권이 약해지자 세력 확장에 관심이 많았던 쾰른의 대주교 안노 2세가 어린 황제를 납치했으며, 함부르크와 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섭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하인리히 4세는 1065년 15세에 통치권을 인수하여 황제로서 권위를 되찾고 정적들을 제거했다. 외부의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했고,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고의 재판권과 행정권을 장악했다. 하인리히 4세는 평화령(Landfriede)을 공포하여 치안과 질서 유지에 힘썼으며, 사유 재산의 보호에 노력했다.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 앞에서 무릎꿇고 육촌 누나인 토스카나 대백작년 마틸다에게 청원하고 있다. 당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대립 중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성직자 임명권이 교황에게 귀속되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후 하인리히 5세가 1106년부터 1125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기 위해 교황을 군사적으로 위협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인리히 5세는 후손 없이 1125년에 서거했으나 그 뒤를 이어 1125년에 작센 공 출신의 로타르 3세가 즉위하여 1137년까지 통치했다.

로타르 3세는 왕권 획득을 위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와 경쟁을 했으나 바이에른 공국 벨펜 가의 하인리히 지시 아래 선거에서 승리했다. 후에 작센의 하인리히의 아들은 로타르의 딸과 결혼했다.

로타르 3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저항에 대비하여 친정 체제를 구축했고, 독일 제국 내에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작센의 변방 지역인 동북쪽을 병합했으며, 이 지역에 백작령을 설치하여 통치권을 이임했다. 그 결과 엘베 강 동쪽으로 독일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으로부터 황제 직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아들이 없고 외동딸만 있었기 때문에 사위인 바이에른의 벨펜 가에게 권좌를 물려 주었다. 또 그의 왕국이었던 작센 공국의 통치권도 사위에게 양도했다.

로타르 3세가 죽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콘라트 3세는 독일왕 선거에서 이전에 로타르에게 패배했던 것을 설욕하기 위해 외교적 수단을 발휘했다. 영향력이 약한 제후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교황 사절의 도움으로 왕에 선출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콘라트 3세는 1138년부터 1152년까지 통치했는데 제일 먼저 그들의 경쟁자인 벨펜 왕조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주력했고, 작센과 바이에른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켰다. 콘라트 3세는 잘리에르 왕조와 유대하여 중앙집권주의적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 1147년에서 1149년까지는 군대를 직접 인솔하여 제2차 십자군 원정의 길에 올랐으나 실패했고, 독일 군대는 대부분 도중에 귀국했다.

콘라트 3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1152년부터 1190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혈연 중심의 통치 체제를 지역 중심으로 전환하여 귀족 세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는 이탈리아 지배에 집중하여 여섯 번이나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통치 기간 38년 중 16년을 이탈리아에 상주했다. 이탈리아 정책의 목표는 신성 로마 제국의 법이 이탈리아에서도 효력을 발휘하여 황제의 통치권이 이탈리아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와 로마 교황청의 방해 및 선진화된 이탈리아의 경제력과 정치 때문에 이탈리아 정복은 그리 쉽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현물 교환을 활성화하여 상업에 활기를 가져왔고, 재산의 소유권을 확대하여 생산 활동을 촉진했다. 그 밖에도 통치권을 확대하여 여러 지역에 많은 도시를 건설했고, 동전 주조 공장을 건립하여 국민 생활을 향상시켰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89년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소아시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190년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지도자가 사라지자 독일군은 자연히 해산되었다.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6세가 1197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노르만 공국의 젊은 왕 빌헬름 2세가 1189년 자식이 없이 갑자기 죽자, 노르만 공국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아 1194년 팔레르모에서 왕위에 올랐다. 노르만 공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통치 제도를 수용했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도 합병하려 했으나 제후들과 교황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하인리히 6세는 결국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1197년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독일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패권 장악을 위해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벨펜 왕가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사이 제후들은 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전념했다.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또 강한 이미지를 풍겼으며 합리적이며 자연과학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의 직책에 관계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백작의 권한과 지방 성주들의 권력을 통제했고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했다. 또 왕의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해외 무역을 국유화했고, 함선을 제조하여 해군력을 강화시켰다. 나폴리 대학을 설립하여 귀족 자녀들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힐데스하임의 성 미샤엘 교회

1010년 베른바르트 주교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오토 왕조와 잘리에르 왕조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1200년에 아들 하인리히 7세를 독일 왕으로 선출시켰다. 그러나 하인리히 7세의 정책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부친의 정책들을 대부분 세습해서 제후들과 빈번하게 충돌했다. 그는 유대 인들에게 특별한 옷을 입게 했고, '게토'라는 유대 인의 집단주거 지역을 만들어 그곳에서만 생활하게 했다. 유대 인들은 왕의 하녀로서 궁중에서 잡일을 수행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1125~1254)

콘라트 3세는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가 끝난 1254년부터 합스부르크의 루돌프가 즉위한 1273년까지 왕위 공백 기간이 계속되었다. 이때 왕은 존재했으나 실제적 통치 행위는 전혀 없었고, 지방에서 제후들이 통치 영역을 확장했다. 중앙집권주의는 쇠퇴하고, 지방 분권적인 국가 형태들이 등장했다.

제후들은 왕으로부터 토지를 부여받았고, 이 토지는 후손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제후들은 여러 가지 수익권에도 참여하여 동전 주조와 세금을 징수했다. 지방에서 재판권을 소유했으며, 그 밖에도 상속권, 거래권, 허가권을 가졌다. 또한 전쟁을 벌이거나 개간지를 새로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제후들은 성을 축조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고, 국내 정치에서는 통치권을 강화했다.

지방 제후들은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과 군대를 소유할 수 있는 모병권을 소유했으며, 왕은 제후들에게 토지를 주는 조건으로 용병을 모집했다. 그 후 행정권도 점점 확대했으며 특히 지방 영주들은 세금징수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제후들은 그들의 통치 지역 곳곳을 순회하면서 상주했으나, 15세기 이후부터는 한곳에 정착했다.

프리드리히 2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4세기 중반 독일에는 7개의 선제후국이 있었고, 70명의 종교제후와 25명의 세속제후가 있었다. 하지만 13세기 후반에는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등 3명의 선제후와 라인의 팔츠, 작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 등 4명의 세속제후가 중요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1373년 루돌프가 왕에 선출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박래식 집필자 소개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 출강하였다. 공저로는 <유럽연합 체제의 이..펼쳐보기

출처

이야기 독일사
이야기 독일사 | 저자박래식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잘리에르 왕가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