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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왜 ‘예수의 고통’을 ‘예수의 열정’으로 오역하는가?

열정

passion

passion(열정, 열망, 감정, 흥미)은 ‘아픔,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passio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에도 대문자로 쓴 ‘The Passion’이 예수가 로마군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겪은 고통과 수난을 뜻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중세 신비극(mystery plays)으로 종교극의 일종인 ‘그리스도 수난 성사극(Le mystere de la Passion)’이 국내에서는 ‘정념의 신비’로 오역(誤譯), 소개되기도 했다. passion이라고 하면 곧장 정념이나 열정을 떠올린 탓이다.

passionflower(시계꽃)도 사랑의 열정과 관련된 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꽃의 모양이 예수의 수난 시 예수가 썼던 가시가 돋친 관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passion flower, passion vine, passiflora라고도 한다. 15~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붙인 이름이다.

passion은 14세기부터 감정과 욕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후 열정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왜 ‘고통’이 ‘열정’으로 바뀐 걸까? passion이 프랑스를 거쳐 영어에 편입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strength of feeling(느낌의 힘)’이라고 하는 공통분모를 근거로 극과 극이 통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시인의 역할이 컸다. 조승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세의 시인들이 진정한 사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아픈 것이라며 ‘passion’을 ‘남녀 간의 불타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녀 간의 열정이라는 뜻인 ‘passion’의 원래 의미가 ‘아픔’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열망이라 해도 고통을 피해갈 수는 없다. 김난도의 해석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열망에는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이란 눈앞에 당장 보이는 달콤함을 미래의 꿈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데서 온다.”

실제로 우리 인생에선 열망이나 열정이 곧 고통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많다. 이를 잘 묘사한 게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1835)이다. 열정에 사로잡혀 두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지만, 무일푼이 되자 딸들에게 외면당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리오는 열정적인 아버지다. 이 아버지로서의 열정은 그를 암세포처럼 좀먹는다. ······딸들은 호사스럽게 생활하고 드레스, 보석, 마차 등을 조달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항상 갈취한다. 열정에 눈이 먼 고리오는 그 무엇도 거절하는 법 없이 몰락해간다. ······나는 내 측근이 아닌 이상 타인에 대한 열정은 없다. 오직 나의 존재만이 내게 명백하고 본질적이며, 그것만이 내 관심을 받아 마땅하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아를 유일한 현실로 삼으려는 이런 성향과 일상생활에서 항구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열정을 멀리 해야 하는 걸까? 꼭 그렇진 않다. 그런 의문에 답하겠다는 듯,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모든 열정은 그저 해롭기만 한 시기가 있고, 희생자들을 어리석음의 온갖 무게로 짓누르는 시기가 있다. 그러다 나중에, 아주 늦게, 그 열정들이 정신과 결합하여, ‘영적 결실을 맺는’ 시기가 찾아온다.”

예수의 수난은 2004년 할리우드 스타 멜 깁슨(Mel Gibson, 1956~)이 제작 · 감독한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에 의해 영상화되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출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As time goes by, I have less and less interested in acting in movies. It’s like a hobby. It isn’t the hunger I had before(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영화 연기에 흥미를 잃게 되었지요. 취미 같아져 버렸어요. 제가 전에 갖고 있던 굶주림 같은 열망이 아닙니다).”

“The end of passion is the beginning of repentance(열정의 끝은 후회의 시작이다)”는 말이 있지만,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To grow old is to move from passion to compassion(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열정에서 동정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Do something you’re very passionate about, and don’t try to chase what is kind of the ‘hot passion’ of the day(당신이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일을 하라. 다른 사람들이 열정을 보이는 대세를 추종하지 마라). 미국 아마존닷컴(Amazon.com)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저스(Jeff Bezos, 1964~)가 2001년 인터뷰에서 성공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으로 한 말이다.

passion과 passive(수동적)는 어원이 같은데, 이에 대해 미국 철학자 마이클 타우(Michael Thau)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이 보기에 열정에 휩싸여 그에 영향을 받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의미이며,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열정(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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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서옥식 편저, 『오역의 제국: 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도리, 2013), 82~83쪽.
  • ・ 『Webster’s New Explorer Dictionary of Word Origins』(Springfield, MA: Federal Street Press, 2004), p. 233; 「Passiflora」, 『Wikipedia』.
  • ・ John Ayto, 『Word Origins: The Hidden Histories of English Words from A to Z』, 2nd ed.(London, UK: A & C Black, 2005), p.369; 최현석, 『인간의 모든 감정: 우리는 왜 슬프고 기쁘고 사랑하고 분노하는가』(서해문집, 2011), 21~22쪽.
  • ・ 조승연, 『이야기 인문학』(김영사, 2013), 300쪽.
  • ・ 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쌤앤파커스, 2010), 29쪽.
  • ・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 고아침 옮김, 『예비 아빠의 철학』(개마고원, 2007/2008), 30, 35쪽.
  • ・ 앙드레 기고(André Guigot), 김병욱 옮김, 『사랑의 철학』(개마고원, 2004/2008), 18쪽.
  • ・ 「Mel Gibson」, 『Current Biography』, 64:8(August 2003), pp.49~50.
  • http://www.achievement.org/autodoc/page/bez0int-1.
  • ・ 마이클 타우(Michael Thau), 「만화의 지혜」, 마크 웨이드(Mark Waid) 외, 하윤숙 옮김, 『슈퍼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슈퍼히어로를 읽는 미국의 시선』(잠, 2005/2010), 242쪽.

강준만 집필자 소개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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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영어 인문학 이야기 1
재미있는 영어 인문학 이야기 1 | 저자강준만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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