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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와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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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

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 철학이 강조하는 경험과 관찰, 현실에서의 유용성은 사물과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사실주의 미술을 자극한다. 기존의 고전주의 · 낭만주의 미술이 지향하는 사변적 정신라든지 정형화된 모델로서의 미술을 거부하고 생생한 현실의 삶을 담아내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실주의라는 표현은 1855년 쿠르베가 자신의 작품을 모아서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즘’이라고 이름붙인 데서 시작되었다. 쿠르베는 고상하고 우아하고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 미 규범에 따라 피상적 · 신비주의적 방향으로 치닫던 낭만주의 미술을 비판하고,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표명한다. 그래서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단언한다. 쿠르베의 태도는 다분히 당시 유럽의 과학주의적 경향과 실증주의적 사고의 영향과 연결된다.

유럽의 사실주의 화가로는 쿠르베(Courbet, 1819~1877), 도미에(Daumier, 1808~1879)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는 에이킨스(Eakins, 1844~1916), 슬론(Sloan, 1871~1951), 벨로스(Bellows, 1882~1925), 호퍼(Hopper, 1882~1967) 등이 사실주의 미술을 이끌었다.

현실의 구체적 삶과 가벼운 일상 소재

낭만주의는 구체적 현실을 관찰하기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을 중시했다. 그 결과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좇거나 이국적 소재를 표현하는 경향이 강했다. 시적 · 신화적 주제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화면을 구사하기 위해 강렬하고 열정적 화면, 화려한 색채 등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 기존의 미학에서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을 대상으로 한다. 구성이나 색채에서도 현실성을 강조하여 단순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쿠르베, 1854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유럽 사실주의 회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는 쿠르베의 일상을 그대로 표현한다. 쿠르베가 시골길에서 후원자와 친구를 만나는 장면이다. 쿠르베는 가벼운 셔츠 차림에 화구가 들어 있을 배낭을 메고 있다. 야외 스케치를 가던 도중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평범한 장면이기에 어떠한 역사적 · 정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품위 있는 자세나 보는 이의 눈을 잡아끄는 화려한 색채도 없다. 특별히 긴장감을 자아내는 구도도 없다. 말 그대로 날마다 벌어지는 일상의 한 단면이다.

〈영화 관람〉은 일상에서 흥미를 끄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수십 명의 남녀 관객이 영화 관람에 열중하고 있다. 영화 화면에서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 차림의 신랑이 진한 키스를 나눈다. 20세기 초반은 무성영화가 상영되던 시기이니 관객은 영상과 자막을 보면서 대화나 줄거리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처음 내보였으니,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미술은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기쁨을 주는 사건이나 광경을 묘사해야 한다는 듀이의 생각과 일치하는 작품이다.

〈야구〉

에이킨스, 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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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인 운동선수의 모습도 일상의 중요한 한 장면이었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프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미국인의 정서를 화폭에 담아냈다. 미국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에이킨스가 그린 〈야구〉는 프로야구 리그가 만들어져 대중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는 야구 경기의 한 장면을 담았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스윙 자세를 가다듬는 장면을 묘사한 듯하다. 야구는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미국 전역에 퍼져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특히 1870년대에 프로야구단이 만들어지면서 야구는 미식축구와 더불어 미국인에게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샤키에 모인 남자들〉

벨로스,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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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는 원래 맨주먹으로 시합했으나 1867년에 글러브를 끼고 시합하도록 룰이 바뀌고,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야구만큼이나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로 부상했다. 미국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으로 유명한 벨로스는 역동적인 권투 경기 장면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데 적극적이었다. 〈샤키에 모인 남자들〉는 마치 고속 사진기로 찍어낸 순간 동작처럼 현장감 넘친다. 사각의 좁은 링 위에서 두 남자가 혈투를 벌이고 있다. 얼굴과 팔에 피가 흥건할 정도로 서로 격렬한 펀치를 날리고 있는 중이다. 팔이나 다리 동작이 거친 붓 터치를 통해 생동감이 살아난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관객들의 폭발적 환호성이 들리고 진한 땀 냄새가 날 듯하다. 관객의 모습은 대부분 간략한 실루엣으로 묘사했는데도 현장의 열띤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경험적 관찰에 근거한 사실적 표현

사실주의 미술은 소재의 사실성만이 아니라 당연히 표현의 사실성을 추구한다. 과거에도 사실주의적 표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인체와 자연의 사실적 묘사가 하나의 큰 흐름이었다. 하지만 사실주의 미술이 추구한 사실성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미술은 이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실성에 주목했다.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를 매개로 하거나 자연현상을 통해 드높은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세상의 기원〉

쿠르베, 18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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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사실주의 미술이 추구하는 사실성을 잘 보여준다. 화면 가득히 여성의 음부가 보인다. 이불을 덮어쓰고 있어서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기존의 누드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체모까지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현실에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상적 인체 묘사 방식의 누드화를 거부하고, 성경험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여성의 몸을 보여준다. 흔히 여성 누드화를 통해 드러내려는 이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부르기도 꺼릴 정도로 기피 대상이 된 신체 부분을 클로즈업하여 드러냄으로써 사실성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어떠한 정신적 · 예술적 권위도 부여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의 한계 자체를 설정하지 않으려는 도전적 태도다. 거기에다 자궁과 연관된 음부를 ‘세상의 기원’으로 규정함으로써, 본질과 기원의 탐구가 무언가 고상한 영역에서 찾던 기존의 정신적 관습과 규범을 조롱하고 있다.

〈싱글 스컬을 타고 있는 막스 슈미트〉

에이킨스, 18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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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킨스의 〈싱글 스컬을 타고 있는 막스 슈미트〉는 사진으로 찍어낸 듯한 사실성을 보여준다. 맑은 여름날 오후에 강에서 1인용 스컬을 타고 있는 친구를 그렸다. 느긋하게 젓는 노를 따라 움직이던 배와 사람을 한순간 사진으로 찍은 듯이 정지된 느낌을 전해준다. 물속에 비친 배와 인물의 그림자나 배가 지나간 물 위의 흔적 등이 생생해서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하다. 나뭇가지 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물위에 비친 모습까지 정교하게 처리한 왼편의 숲도 언뜻 보면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늘의 구름 모양도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보았음직한 느낌에 충실하다. 전반적으로 일상의 한순간을 스냅사진으로 잡아낸 듯하다.

실제로 에이킨스는 자연이나 상황의 순간적 변화를 사진으로 찍어서 미술 작업에 활용했다. 흔히 화가들이 스케치로 활용하는 소묘는 순간적 움직임을 잡아내거나 세밀한 부분을 재현하는 데 적지 않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는 사진으로 사물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운동 중에 정지된 순간을 스냅사진처럼 잡아내는 표현을 구사했다.

자본주의 대도시와 서민들의 삶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은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의 일상생활을 즐겨 담았다. 자본주의 산업화로 변화된 대도시의 순간을 잡아내는 방식으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에이킨스가 그러했듯이 스냅사진처럼 도시의 일상 공간을 건조하게 그려나간다. 호퍼는 더 건조한 눈길로 대도시의 빛과 표정을 탐구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도시인의 표정에서는 하나같이 고독이 뚝뚝 묻어난다. 마네킹처럼 진열된 인물들은 대부분 표정이 없다. 아니 무표정이 표정이고, 우울함이 ‘아우라’다. 혼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순간에도 비개성적인 모습이다. 도시의 콘크리트 공간 속에서 인간도 하나의 벽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채 어쩔 수 없이 일로 엮여진 관계에 의무적으로 임한다. 상점이나 호텔방의 사람, 심지어 파티에 참석한 사람조차도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대도시의 본질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인의 군상이 〈밤샘하는 사람들〉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림 속의 주인공 자리를 거리나 건물, 혹은 바 안의 조명이 차지하고 있다. 공간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장식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진열장 안의 마네킹처럼 말이다. 먼저 상점의 큰 유리창이 그들에게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는다. 너무 투명하게 잘 보여서 오히려 안과 밖을 확실히 구별해 버리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는 불빛이 가로막는다. 환하게 밝혀진 조명 불빛이 만들어내는 생경함과 으스스함이 그들을 멀리 떼어놓는다. 아직 한 겹이 더 남아 있다. 불빛을 헤치고 다가서면 이제는 창백하고 무표정한 가면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그 가면 안에 사람이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이렇게 몇 겹의 문을 열고서야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극히 사실주의적 그림에서 낯선 우리를 발견한다. 호퍼가 그림의 소재로 썼던 시가지나 건물, 밤의 레스토랑, 상점 불빛으로 환한 거리, 극장 등에 우리가 들어 있다. 실제로 도시의 거리로 나서면 한순간도 단절 없이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그런데 너무나 익숙한 도시 공간의 소품들 속에 들어 있는 우리 모습이 낯설다. 정말 이런 차가운 금속성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쉽게 다가오질 않는다. 그만큼 도시는 자신도 모르게 내부로 스며들어와 있다. 호퍼의 그림은 익숙한 도시를 낯설게 만들고 쇼윈도 속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세탁부〉

도미에, 18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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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화가들은 서민의 일상생활을 담아내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도미에는 유리 직공이던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사무실 급사나 점원 일을 해서인지 작품에는 파리의 화려한 도시 풍경 이면에서 고단하게 사는 서민의 삶과 애환이 가득하다. 〈세탁부〉를 보면 빨래를 마친 엄마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아마 그 계단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던 19세기 파리에서는 제법 거리가 먼 강가까지 나가서 빨래를 했고, 그만큼 고된 노동이었다. 아이는 계단이 높은 듯 힘겹게 다리를 내딛고 있다. 오른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는데 물을 뜨는 바가지인지 아니면 빨래방망이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엄마가 빨래하는 동안 옆에서 물장난을 했겠지 싶다. 아마 아버지는 공장에 나가고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나왔을 것 같다.

에밀 졸라의 대표 소설 〈목로주점〉을 보면 여주인공 제르베즈를 비롯해 많은 여성이 세탁부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만이 아니라 도미에를 비롯하여 로트레크, 드가, 르노아르, 피카소 등 수많은 화가가 그림의 소재로 삼았을 정도로 세탁부는 당시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푸른 아침〉

벨로스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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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스의 〈푸른 아침〉은 뉴욕 변두리의 서민 거주지를 다루고 있다. 멀리 뉴욕의 고층 건물 숲이 보인다. 하지만 화려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강 주변에서 날마다 그날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빈민의 삶이 펼쳐진다. 난간에 걸터앉은 사람은 새벽 공기가 추운지 몸을 잔득 웅크리고 있다. 살을 파고드는 새벽의 한기에서 벗어나려 누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가 솟아오른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고층건물은 노란색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인 강변은 짙고 어두운 청색으로 표현해서 대도시 안에서 빈부격차를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을 표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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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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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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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럽과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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