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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를 통한 구조 분석
잘 알려진 몬드리안(Mondrian)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은 몇 개의 선과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도 무채색인 검은색과 흰색을 제외하면, 삼원색이라 말하는 빨강 · 파랑 · 노랑뿐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색을 만난다. 자연과 인공의 온갖 색으로 둘러싸여 산다. 삼원색이 섞이거나 무채색이 첨가됨으로써 그 많은 색이 만들어진다. 그만큼 몬드리안의 그림에 사용된 몇몇 색이 모든 색의 질서를 규정하는 기본 단위다. 직선과 면도 마찬가지다. 직선과 면도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 기본 단위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나 의식도 단순하고 근원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는 구조를 통해 분석 · 해명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바로 구조주의다. 비록 거칠게 단순화한 면이 있지만 현상의 다양성 아래 작동하는 질서를 규명하고자 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구조주의에 연관된 철학자들도 스스로 구조주의와 거리를 두려 했다. 구조주의 창시자로 불리는 레비스트로스조차 자신의 작업과 구조주의는 별 관련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푸코나 알튀세르도 구조주의에 연결시키는 경향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푸코는 어느 대담에서 구조주의자가 아니냐는 반문에 화를 내기까지 했다.
구조라는 용어가 갖는 고정된 질서 느낌이 강해서 이들이 생각하는 유동성을 담아내기 적합하지 않다는 불만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실존주의 구분에서 그러했듯이, 구조주의 철학자 내에 상당한 격차가 있는데도 개별 요소보다 전체 체계를 우위에 두었다는 점, 복잡한 현상의 기원으로 작용하는 질서를 찾아내려 했다는 점, 또한 이미 철학사에서 어느 정도 역사성을 획득한 규정이라는 점을 고려해 무리함을 무릅쓰고 사용하기로 한다.
구조주의는 주체의 철학이라 불릴 정도로 주관적 · 선험적 직관에 의존하는 실존주의와 대립 선을 그었다. 구조와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은 학문에서 엄밀성과 책임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소쉬르 언어학에 영향을 받으면서 언어를 비롯한 기호의 과학적 · 구조적 분석을 강조한다. 기호를 다루는 방법이 서로 다르지만 기호 체계를 통해 우연성 이면에서 작용하는 코드를 읽어내려 했다.
일반적으로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1908~2009), 알튀세르(Althuser, 1918~1990), 라캉(Lacan, 1901~1981), 푸코(Foucault, 1926~1984) 등을 꼽는다. 소쉬르(Saussure, 1857~1913)는 구조주의 철학자라기보다는 언어학을 통해 이들에게 이론적 영감을 제공했다. 이들은 기호 체계를 통해 현상을 형성해 온 구조를 밝히되, 서로 다른 방향에서 작업했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에서 구조주의를 발견하고 응용했다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구조를 파헤쳐 자체에 속한 모순을 규명하고 핵심 문제의식을 부활시키려 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구조를 기호 분석을 통해 새롭게 확장했다. 푸코는 현실의 다양한 소재에서 출발하여 억압의 기원을 규명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검토했다. 소재나 접근 방법을 넘어 구조주의 내에서 구조주의를 흔드는, 그러한 의미에서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의 경계선에 서 있다.
객관 세계에 대한 이해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 인간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세계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실존주의와 마찬가지로 ‘객관’이나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즉 ‘있음’을 사변적 개념과 논리를 통해 증명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각주1) 이라고 단언한다. 세계는 인간 의식과 무관하게 거기에 있다. 하지만 세계의 ‘의미’를 논하면 달라진다. 의식적 과정을 통해 창조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세계로부터 어떤 의미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연과 접하면서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모순도 자연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체로는 모순된 것이 아니다. 특정한 인간 활동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모순이 생긴다.”각주2) 인간은 자연을 결코 수동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의식을 통해 개념화한 후 다시 골고루 혼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만든다. 예를 들어 흔히 원시부족의 신화나 토테미즘은 자연 현상을 단순히 묘사한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신화 안에서 자연 현상은 원시부족이 논리체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즉 신화는 지리적 환경 등 자연 조건을 단순히 반영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논리체계를 세워 더 높은 추상 작용으로 연결하는 작업의 결과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지닌 의미체계의 주요 기능이 발휘된 결과다.
문제는 여기에서 인간의 배타적 지위를 끌어내려는 시도다. “그 역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독립적 위치를 배당하지는 않는다.”각주3) 창조적 · 의식적 개입이 인간의 특별한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 의식 작용을 근거로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음을 정당화하려는 합리주의적 사고방식과 구분한다.
알튀세르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에서 떨어졌고, 이러한 원자의 운동으로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이론을 근거로, 인간의 의미부여 이전에 자연이 물질로서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세계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 · 원인 · 목적 · 근거 ·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에피쿠로스의 기본 명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립한다.”각주4) 원자론은 인간이나 혹은 어떤 초월적 힘에 의한 의미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원자로부터 구체적 형태를 갖는 현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여기에서 알튀세르가 특별히 데모크리토스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선택한 이유가 드러난다. “근거나 원인이 아니라 편의(偏倚)가 세계의 기원이라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테제를 대담한 것으로 만든다.” 편의란 치우침을 뜻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한 치우침은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원자가 서로 충돌하여 세계가 생성되었다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근거한 듯하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가 운동 시작점을 원자의 일탈을 통해 설명한 내용과도 연관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일탈과 충돌은 치우침이 있기에 가능하다. 만약 원자가 서로 평행으로만 움직인다면 새로운 변화나 원자의 복합체가 만들어질 수 없다. 치우침에 의한 일탈과 충돌은 그만큼 원자의 운동이 정해진 목적이나 방향이 없고, 세계가 우연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어떤 방향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목적론적 사고를 부정한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철학사에서 그 어느 철학이 편의가 파생이 아닌 기원이라는 이 테제를 취했는가?”라고 한다. 플라톤 이후 서양 주류 철학에서 일탈이나 우연은 필연성에서 파생된 부스러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치우침과 충돌이 세계의 기원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목적이나 필연성에 기초한 철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철학은 더 이상 근거나 사물의 시원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사물의 우연성에 대한 이론이다.” 오히려 필연성이 우연성에 굴복한다.
자연과 인간의 동등한 상호관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미부여가 특별한 지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동등한 관계라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그 전형적 모습을 원시부족의 사고와 삶에서 발견한다. “가축이 식사에 참가하며, 사람과 똑같은 관심이나 애정을 누린다.”각주5) 가축을 잡아먹지 않으며 심지어 달걀도 먹지 않는다. 이동할 때는 걸을 수 있는 짐승을 제외하고 가축 전부를 짐 보따리와 함께 싣고 간다. 기후 영향으로 식량이 모자라는 시기가 닥쳐도 가축의 먹을거리는 반드시 챙겨준다. 그 대가로 동물은 이 집단을 위해 심심풀이와 기분전환의 계기가 되어준다.
신화에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잘 드러난다. 특히 꿀의 기원 신화는 자연을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이용하되 공존을 전제로 한다. “꿀을 너무 쉽게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모두 소진할 때까지 남용하게 된다. 그래서 꿀은 신화를 통해 인간에게 ‘네가 나를 우선적으로 애써 찾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각주6) 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찾은 아마존 열대림은 이미 서구문명이 심각하게 훼손한 상태였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대규모 파괴를 효율적 이용으로 보는 서구적 자연관이 초래한 재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말레비치(Malevich)의 〈나무꾼〉은 대규모 벌목 장면을 보여준다. 입체주의 영향을 받으며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을 선도한 그는 모든 사물을 원통 모양으로 단순화시켰다. 잘린 나무와 나무꾼의 몸이 기호화된 이미지의 숲을 이루고 있다. 이미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쌓여 있어서 잘린 나무의 양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원시부족도 나무를 베거나 가공 작업을 한다. 하지만 생존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이용할 뿐이어서 자연 훼손과는 거리가 멀다. 기계 문명은 20세기 초반 대규모 벌목 작업조차 매우 유치한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최근 수십 년 만에 지구의 허파인 열대림을 거의 치유 불능 상태로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푸코는 근대 합리주의적 이성이 어떻게 자연을 철저히 대상화했는지를 규명한다. “린네가 자연사에 제안한 서술 순서는 매우 독특하다. 어떤 동물이든 이름 · 이론 · 속 · 종 · 특징 · 용도, 끝으로 참고문헌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 ··· 18세기 말까지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물이 존재할 뿐이다.”각주7) 자연은 이름을 붙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대상으로 이해된다. 린네(Linne)가 처음 내놓은 일반화된 분류체계에 의해, 모든 생물은 동물계와 식물계의 구분으로 시작해서 문 · 강 · 목 · 과 · 속 · 종이라는 분류체계 속에 편입되는 대상일 뿐이다. 아무런 매개 없이 사물에 적용된 말을 통해 자연의 역사를 구축했다. 외형적 동일성과 차이라는 구분을 통해 획일적 구조를 강제했다.
그 결과 자연에는 생명이 아닌 생물만이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레크(Leck)의 〈고양이〉를 보자. 도안화한 모양의 몸을 같은 명도의 검은색으로 단순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눈 · 코 · 입을 구분하는 몇몇 선으로 고양이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다. 이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장난을 치며 놀거나 따사로운 햇볕에 몸을 맡기고 누워서 졸고 있는 모습, 혹은 날랜 몸짓으로 담 위로 뛰어올라 걷는 모습 등이 떠오른다. 하나의 고유한 생명체로서의 고양이다.
하지만 린네 분류법으로 정의된 고양이는 전혀 다른 의미다. 고양이과의 야행성 · 육식성 포유동물이다. 좀 더 계통적으로 구분하면 동물계, 척살동물문, 포유류강, 식육목을 거쳐 고양이과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에서 고양이가 신성한 동물이었다거나 오랜 세월 인간과 맺어진 관계 등은 끼어들 틈이 없다.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물의 보편적 분포에 따라 분류학상의 의미로 이해된 특정 용어다. 전적으로 묘사의 네 가지 변수 즉 형태 · 수 · 기질 · 크기를 기초로 구축된 변수는 언어와 시선에 의해 거의 일률적으로 탐색된다. “이제는 분류 가능하다는 사실이 생물의 속성이다.” 이 과정에서 생명은 생생한 내용이 사라지고, 단지 분류상의 단순한 경계로 표시된다. 인간은 분류 주체로서 특권적 지위를 얻는다.
라캉은 시선의 상호관계를 통해 특권적 지위를 벗어 던지고, 사물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꼬마 장이 파도 표면에 떠다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 ‘저 깡통 보여? 그런데 깡통은 자네를 보고 있지 않아!’라고 말했다. ··· 깡통은 광점에서 나를 응시한다. 그 광점에는 나를 응시하는 모든 것이 있다. 이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각주8) 시선은 사유와 관계를 드러낸다. 시선의 지배는 곧 관계를 지배하는 질서다. 인간이 자연이나 사물을 대상화하는 시선은 특권적 지위의 단적 표현이다. 하찮아 보이는 통조림 깡통조차 라캉이 보기에 시선의 관점에서 일방적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시각이 독립적 기능이 아니라 빛의 기능에 의존하듯이, 빛의 점에서 사물과 우리는 서로를 응시하는 관계다.
인간에 대한 이해
우연성 안의 인간, 흔들리는 주체로서의 인간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특징을 정신을 통한 창조 능력에서 찾는다. “창조란 정신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정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즉시 무로 빠져버린다.”각주9) 정신을 통한 접근은 서양 철학 전통에서 지겨울 정도로 자주 확인해왔던 터라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다. 문제는 내용이고, 창조 능력과 정신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이성이라 할 만한 정신의 출발점을 그리스의 플라톤, 기껏 더 거슬러 올라가봐야 자연철학에서 찾았다. 원시부족의 삶이나 사고는 이성과 상반된 감각이나 본능으로 다루어졌다. 신화는 더욱 의심의 대상이었다. 베버(Weber)는 아예 이성에 기초한 학문의 특징을 탈마법화에서 찾는다. “생활에는 어떤 신비롭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지 않고 모든 것은 원칙적으로 예측에 의해 지배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학문은 모든 형태의 주술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킨다.”각주10) 학문은 주술이나 신화에서 벗어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모든 신비적 사고를 거부하고 기술과 예측으로 대신하는 데서 정신은 비로소 자신의 안식처를 구한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정신은 주술과 신화를 공통의 자궁으로, 감성과 함께 성장했다. 먼저 주술을 살펴보자. “실물보다 앞서가는 그림자처럼 주술은 어떤 의미에서 자체로 완벽하며, 실물은 아니면서도 곧 뒤에 올 실체와 마찬가지로 완성되고 논리 정연한 것이다.”각주11) 주술은 논리 정연한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질서에서 벗어날 때 주술 효과는 사라진다. 주술적 사고나 의례란 결정론적 작용을 전체적 양식으로 추측하고 활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술과 과학은 총체적 · 포괄적 결정론을 전제하느냐, 아니면 여러 차원을 구분하고 그 중 일부에만 결정론 형식을 부여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체계적 결정론에 근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신화에 나타나는 원주민의 사고도 불확실하고 우연적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우리가 숱한 좌절과 안타까움을 대가로 쟁취하는 정신적 조화를 원주민들은 쉽게 얻는다.”각주12) 오히려 현대인의 광기와 대비되는 지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화에서 창조의 근거와 정신을 규명함으로써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원주민 신화는 높은 교훈을 찾을 거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현대 철학과 접근시킬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환경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사색과 성찰에 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각주13) 신화에서 현대 철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한다. 또한 현대인과 서로 다른 생활 조건 아래 있으면서도 비슷한 내적 성찰에 도달해 있다.
현상적으로는 서로 다른 주제에 대해 연관성이 없는, 산발적이고 우연한 내용을 버무려 놓은 비합리성의 덩어리로 보인다. 하지만 구조 분석을 통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반복되는 사고와 대상의 일치를 통해 필수불가결한 측면이나 인간 역사의 베일을 벗길 수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다시 끌어들임으로써 합리주의적 인간 이해를 거부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우주 중심에 선 인간 위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 데카르트적인 주체의 신기루 속에서 현대인은 자기애의 덫에 걸려 확신할 수 없을 때조차 주체의 확실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각주1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독립적 · 초월적 주체의 선언이다. 나에 대해 생각하는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확실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배후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무의식을 발견함으로써 주체의 확실성은 설득력을 잃는다.
라캉은 무의식이 존재의 근원이라고 규정한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변경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무의식의 지배적 영향 아래 있는 한, 인간은 자유자재로 사고할 수 없다. 반대로 의식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나일 수 있다. 무의식적 욕망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무의식적 욕망이 사라진다면 유기체 자체의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라캉에 의하면 두 단계를 거쳐 무의식 구조가 만들어진다. 거울단계와 상징계다. 거울단계는 상상계라고도 한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반가워한다. 이 단계가 거울단계다. “거울단계의 경험은 의심할 수 없는 사고 주체에 근거한 어떤 철학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능력에서 침팬지보다 못한 나이일 때도 아이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각주15) 아이가 일단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습득하면, 놀이 과정에서 그 이미지를 통해 가정된 행동과 주변 상황의 관계를 경험한다. 즉 상상에 의해 가정된 자신과 상황 사이의 허구적 합성물을 경험함으로써 자아는 사회화되기 이전에 허구적 성향을 갖는다.
거울단계는 언어와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사회화 과정 속에서 거울단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으로는 비활동성 상태로 자아에 연결되고 고착된다. 심한 경우 거울단계에서 자신과 대상을 일치시킨 상태 즉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과 타자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아가 갖게 되는 허구적 성향이 개별적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정신분석학은 허구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주체를 인정함으로써 고착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존재의 본질을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의식적 사고와는 아무 관계없는 시기부터 인간은 자신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독립적 이성을 통해 인간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거울단계 경험이 주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신론의 진정한 공식은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신은 무의식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각주16) 프로이트가 코페르니쿠스적 변혁을 가져왔다면, 주체가 거처하는 곳으로서 무의식 장의 확실성을 단언했다는 점이다.
홀바인(Holbein) 〈대사들〉에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확실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회화적 표현의 주요 수단이던 원근법은 데카르트적 주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라캉이 보기에 원근법은 주체의 절대성 위에 세워진 견고한 탑이다. “원근법에 의한 시각 영역이 데카르트적 주체의 구성과 관계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데카르트적 주체 역시 일종의 기하광학적 조망점이자 원근법적 조망점이기 때문이다.”각주17) 원근법은 철저히 독립적 주체의 시점에서 사물의 거리와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홀바인의 그림은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보인다. 가장 먼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두 대사가 보인다. 두 단으로 나뉜 선반에는 온갖 물건이 가득하다. 위로는 온갖 별자리가 표시되어 있는 천구의가 있다. 그 옆으로는 나침반, 해시계, 원통 달력 등 천체 관측과 연관된 과학 측정기구와 발명 성과물이 놓여 있다. 아래 선반에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지구본이 있다. 위도와 경도를 따라 몇몇 대륙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성과 과학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면 의외의 장소에 의외의 상징이 숨어 있다.
그림을 꼼꼼하게 살피면 왼쪽 맨 위쪽으로 녹색 장막이 살짝 열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틈으로 〈대사들-부분1〉처럼 반쯤 가려져 있는 예수 십자가상이 보인다. 화려한 색채로 가득한 그림 한구석에 무채색으로 그려진 것도 특이하다. 왜 그림 한구석에 그것도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렸을까? 신의 자리를 인간 이성이 차지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조심스럽게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라캉은 이 그림을 통해 주체의 소멸을 발견한다. 새로운 단서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하게 서 있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생뚱맞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기괴해 보이기도 하는 물체에서 나온다. 공중을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왜상’(歪像) 즉 왜곡된 형상으로 불리는 그림이다. 왜상은 관람자가 정면으로 보기에는 혼돈스러운 물건이나 얼룩으로 보이지만 보는 자리를 바꾸거나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여 볼 경우 특정 의미를 가진 형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진 이미지다. 르네상스 시기에 시작되어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고, 18세기까지도 빈번했다. 그림을 지나쳐 몸을 돌리는 순간, 이 물체가 해골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화가는 화면에서 거의 안 보일 만큼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로 가서 해골을 내려다보는 지점에 이 물체가 제대로 보일 수 있는 시점을 설정해두었다. 그러면 〈대사들-부분2〉의 모습이 나타난다.
라캉은 이 왜상이 주는 문제의식을 주체의 소멸로 연결시킨다. “주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평면광학이 관심의 대상이던 바로 그 당시에 홀바인은 주체의 소멸을 보여준다. 주체는 이미지로 구체화된 거세 형태로 소멸되고 이것은 우리가 근본적 충동을 통해 욕망을 전체적으로 조직할 때 중심 역할을 한다. ··· 확장된 응시의 기능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그림처럼 응시를 유혹하는 덫이다.” 확실하다고 자신하던 주체의 시선은 그림 속 왜상 앞에서 무너진다. 정상적 위치에서 오히려 혼돈에 빠져든다. 오히려 자신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응시의 덫에 빠진다. 라캉은 응시를 강조한다. 응시는 일상적 시선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항상 은폐된 모습으로 매복하고 있는, 하지만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시선이다. 주체는 그렇게 자신의 독립적 시선이 아니라 만들어진 응시 안에 갇혀 있다. 주체의 독립성 · 확실성은 의심스럽고 흔들리는 위치에 놓인다.
푸코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동하는 인간이 비교적 최근에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18세기 말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의 잠재력, 노동의 생산성 또는 언어의 역사적 밀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식의 조물주가 고작 200년 전에 손수 만들어낸 아주 최근의 피조물이다.”각주18) 생명으로서, 또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노동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존재로서, 나아가서는 언어 안에서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본격적 논의 대상에 올랐다.
중세에는 신의 피조물로서,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라는 이성의 틀 내에서만 비로소 이해되는 존재였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코기토 아래서 인간은 한쪽 발을 딛고 있는 비이성과 단절된다. “오늘날의 우리는 더 이상 비이성을 이해하지 않는다. ··· 현대인에게 비이성은 광기의 한 현상 형태이기 때문이다.”각주19) 이성을 벗어난 영역, 혹은 미성숙한 사유는 정상적인 인간 범주에서 제외되고 광기로 규정된다. 이성과 비이성을 단절시키고 비이성을 광기 · 질병 · 범죄와 연결시킴으로서 이성은 비이성을 명백하게 정복했다.
푸코는 코기토에 기초한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넘어설 때 진정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코기토는 축소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외재성에 따라, 사유 안에서 사유를 중심으로 사유 아래에서 사유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유와 무관하지도 않은 것과 사유 사이의 맞물림을 가로지르고 이중화하고 재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각주20)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 안에서 인간은 제한되지 않는다. 사유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인간 스스로에 의해 언제나 휩쓸릴 수 있고, 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몰이해의 장소다. 즉 사유는 신화나 무의식 혹은 광기처럼 흔히 비사유라고 말하는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유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사유는 사유되지 않는 것과 관계를 맺는다.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반성의 형태 즉 사유가 사유되지 않은 것을 겨냥하고 사유되지 않은 것과 맞물리는 이 차원에서 인간 존재를 역사상 처음으로 끌어들이는 반성의 형태가 확립된다.” 사유의 열린 틈에서 깜빡거릴 뿐 사유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불확실하고 흔들리는 주체다. 주체로서 인간 지위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어떤 사건에 의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관계와 구조, 규칙 안의 인간
레비스트로스는 독립적 이성을 통해 원자화된 인간을 가정하는 합리주의적 인간 이해를 비판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수백만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사회와 그 사회에 하나의 로봇으로서 봉사하는 나의 내부 사이의 투쟁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각주21) 인간은 고립된 자아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순수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일부라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집단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각 사회도 여러 사회 가운데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개인은 자기가 속한 집단과 또한 그 집단에 연관된 여러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산다. 하지만 일방적 관계는 아니다. 둘 사이의 갈등과 투쟁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존재다.
원시부족의 생활을 규정짓는 친족 관계를 통해 기본 구조의 의미를 설명한다. 친족의 기본 구조란 친족 범위와 혼인 범위가 결정되는 체계를 의미한다. “친족의 어떤 타입과의 결혼을 지칭하는 체계 또는 집단의 전체 성원을 친족으로 규정하면서 이것을 배우자로 허용되는 자와 금지되는 자의 두 카테고리로 구별하는 체계다.”각주22) 현상적으로는 집단과 사회에 따라 복잡한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내적 구조로 보면 몇 가지의 원형적 체계를 지닌다. 친족의 구조는 허용과 금지를 통해 결정된다. 구조는 개인이 집단의 체계 안에 내적 일관성을 갖고 정돈되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 개인 행위는 이러한 장치에 종속되어 있어서, 장치를 통해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문제의식은 실존주의 인간 이해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실존주의가 고립된 개인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인류인, 유대관계로서의 인간을 주장했다. 그렇기에 코기토로 나타나는 고립적 주체에 반대하여 타인과 마주선 ‘우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유대라든지 우리, 인류라는 설정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어서 사실상 개별 존재의 실존으로 함몰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은 우리 각각이 하나의 계급, 하나의 사회, 하나의 나라, 하나의 대륙 그리고 하나의 문명 구성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각주23) 개별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타인은 단순히 유대나 인류가 아니라, 체계적 구조를 갖추고 일상을 에워싸고 있는 계급 · 사회 · 국가 · 문명이다. 개인은 기본적으로 그 구조 안에서 규정받으며 사고하고 행위한다.
레크의 〈승강장에서〉는 체계화된 질서 안에서 코드화된 사고와 행위를 하는 현실의 인간과 연관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승강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았다. 뒤로는 정차해 있는 기차가 보인다. 원근법을 무시해서, 뒤편의 기관사와 앞 사람들이 거의 같은 크기다. 명암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한 색 배열로 평면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승강장 천정과 바닥, 기둥을 경계로 인물들이 짜 맞춰져 들어 있고, 표정이나 동작도 기계적이어서 코드화된 틀에 따라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도시의 기차나 버스 정류장 혹은 신호등이 있는 길거리라면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모습이다. 버스나 기차가 오면 정해진 규칙대로 기다리거나 오르내리고, 표시된 안내판에 따라 이동한다. 신호등 앞의 횡단보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쁜 걸음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신호등 색깔이 바뀌기만 기다린다. 그러다가 다시 분주한 발걸음이 도로를 메운다. 신호등 옆의 작은 녹색 삼각형 숫자가 줄어들면 걸음은 더 빨라진다. 다시 빨간 신호등이 들어오면 일제히 다시 동작 정지 상태로 들어선다. 허용과 금지를 통해 만들어진 질서와 구조는 아주 자연스럽게 소리 없이 다가오고 개인의 일상을 지배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며 코드화된 행위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연구 목표를 경제적 토대에 해당하는 하부구조가 아닌, 법 · 정치 · 문화 등을 포괄하는 상부구조 이론 정립에 둔다. “실천과 관습적 행동 사이에는 매개항이 있다. 그 매개항은 개념의 도식인데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본질과 형태가 도식의 조작에 따라 구조 즉 경험적이면서 해명 가능한 존재로 구현된다. 나는 마르크스가 거의 손대지 않은 이 상부구조의 이론을 세우는 데 힘쓰고 싶다.”각주24) 현실 마르크스주의는 관습적 행동이 직접 실천에서 나온다고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실천과 관습적 행동 사이에는 그러한 행동이 나타나도록 유도하는 구조적 조작이 개입한다. 여기에는 경제적 하부구조와 정신적 · 문화적 상부구조가 모두 영향을 미치는데, 인류학이 무엇보다도 심리학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상부구조 이론을 정립하는 데 초점을 두겠다는 문제의식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적 견지에서 문화적 측면에 주목했다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구조를 통한 상부구조 이론 정립과 인간 이해에 접근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실천의 법칙에 종속된 채 살고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알지 못한다.”각주25) 사람들은 스스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 혹은 모르고 있는지를 구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행위를 유도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 안에서 살아간다. 철학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보고 말하며 행하는 것,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처음부터 체계나 구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출발은 우발적 마주침에 있다. 어느 존재가 있으려면 마주침이 먼저 있어야 한다.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 마주침이 응고하면, 다시 말해 세계의 안정된 형상이 구성되면, 안정된 세계와 법칙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각주26)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사위 놀이와 같은 우발성과 그로 인한 마주침이 있다. 마주침이 반복되면서 응고 과정이 나타나고 규칙적 법칙이 생겨난다. 법칙이 누구나 마땅히 따라야 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음으로써 사람들은 규칙을 따르고 법칙에 복종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법칙을 드러내고 저항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철학의 과제다.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의 공간은 철학 안에 있다. 사람들의 사회적 실천 방향과 방식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 구조를 규명하고자 한다. “철학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라는 곧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추상 속에서 실험적으로 완성되는 장소인 이론적 실험실이다.”각주27) 철학 공간이 철학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 밖에 즉 역사적 갈등이나 사건 밖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사회의 주된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세상과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내적으로 고유한 이론적 범주와 기법에 의해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사회를 직접 분석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소외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주체는 현실 인간이기보다는 소외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과정 자체다. “과정에 주체는 없다. ··· 그것은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요한 적극적 부채다. 즉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이다.”각주28) 소외 과정 자체가 자기 목적을 추구하기에 특정 개인을 주체로 설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주체 없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론 어디에도 소외를 만들어내는 특정 주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상품이라는 단위에서 시작하는 처음부터 재생산구조를 거쳐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구조와 과정이 어떻게 현실의 소외를 만들어내는지에 집중한다.
마그리트의 〈겨울비〉는 주체는 사라지고 사회구조에 의해 소외가 일반화된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화면에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개성과 자율성을 가진 능동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없다. 자율적 개인에 의한 다양성은 보이지 않는다. 앞모습과 옆모습의 차이만 있을 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나같이 같은 옷, 특히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장 차림이다. 심지어 배경을 이루는 건물, 건물에 난 창조차도 예외 없이 획일적이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을 통해 화가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다른 한편으로 만약 누군가 빈곤한 상태라면 그만큼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아서라는 경쟁사회의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있는 현대 도시인의 현실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라캉은 무의식 구조를 규명함으로써 자율적 주체의 환상과 거리를 두고 구조 안의 인간에 주목하도록 안내한다. “정신분석이 무의식의 과학으로 성립하려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각주29)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수용하면서 구조주의 성과를 도입한다. 무의식은 특정 구조를 갖추고 있는 이론적 장소다. 거울단계와 상징계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구조의 하나다. 거울단계에서 아이는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나르시스처럼 거울에 비친 모습과 자신을 같다고 생각한다. 거울 속의 자신, 좀 더 나아가야 엄마와 합일되어 있는 허구적 자아다. 그러한 착각을 지닌 채 상징계로 들어서면서 자아 형성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상징계에서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이나 엄마와의 합일이 깨지고 타인 즉 이차적 관계인 아버지와의 관계, 사회적 규칙 등과 만난다. “분명 주체가 자기를 보는 것도 타자의 공간 속에서며, 그가 자신을 응시하는 지점 또한 그 공간 속에 있다.”각주30)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타자에 의해 형성된 규칙 안에서 스스로를 정립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맞닥뜨린다. 거울단계의 착각에서 출발하여, 상징계에서 ‘나’라는 것과의 분열을 거친다. 즉 자기와 분열하고 상징계의 규칙으로 들어가면서 주체로 재정립된다. 상징계의 규칙은 허용과 금지를 통해 코드화된 행위를 요구한다. 허용과 금지라는 규칙의 굴레 안에서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고, 억제된 것에 대한 욕망이 자라난다.
푸코 역시 구조주의라는 표현은 완강히 거부하지만 구조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위치를 추적한다. “주체의 위치는 다양한 영역이나 대상의 집단과 관련해서 처할 수 있는 상황에 의해 정의된다. 그는 명시적인 또는 그렇지 못한 물음들의 어떤 망에 따라 물음을 던지는 그리고 정보의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청취하는 주체다.”각주31) 현실의 인간은 주어진 상황과 프로그램화된 정보 안에서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어떤 면에서는 프로그램 안에서 정의된 특성의 목록이나 기술적 방식에 의존한다.
기호와 언어 안의 인간
소쉬르에 의하면 인간이 정신적 존재일 때 그리고 정신이 언어에 의해 규정될 때 인간은 말하는 존재다. 문제는 언어에 의해 주체의 자율성이 의심스러운 위치에 놓인다는 점이다. “언어란 화자의 기능이 아니라, 개인이 수동적으로 습득하는 산물이다.”각주32) 우리는 흔히 언어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언어는 주체의 선택적 기능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리 깊이 생각하는 행위를 전제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언어 자체에 대해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할 때 성찰이 개입할 뿐이다. 아무리 개인이 원해도 주어진 언어 규칙에서 벗어나거나 변경할 수 없다. 심지어 하나의 단어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대중은 있는 그대로의 언어에 매여 있다.
언어를 구성원이 자발적이고 동등하게 합의한 결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언어와 관련하여 “한 집단 내에서 인정된 법칙은 자유로이 받아들인 규칙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현재와 과거를 포함하는 영역이다. “언어활동은 끊임없이 기존 체계와 동시에 진화를 내포한다. 언제나 현행 제도이자 과거의 산물이다.” 언어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언어의 현재와 과거는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를 분리해서 파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발 더 나아가 언어를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확장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으로서 문자는 인간을 쉽게 예속화시키는 원초적 기능을 한다. ··· 영속적 지배체계 확립에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왔다.”각주33) 사람들은 생활 조건과 무관하게 자신의 신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생존 형태가 이데올로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언어는 생활 조건에 심오한 변화를 초래한다. 문제는 그 변화가 정신의 만족이라든지 공정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지배세력을 강화하고 체제 모순을 은폐하는, 적극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라캉은 언어의 지배적 역할을 무의식 구조에 초점을 맞춰 규명한다. “주체가 언어에 의존함으로써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면 그의 위치는 태어나기도 전에 보편적 운동으로서의 담론 속에 주어져 있는 셈이다. 주체는 사회가 아닌 언어 구조에 의해 종속되어 있다.”각주34) 주체를 공동사회의 경험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허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원의 공동 경험조차 언어에 의해 형성된 담론의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작용하여 권위를 행사하는 언어를 상정하지 않고는 주체를 설명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기표(시니피앙,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와 기의(시니피에, 그 단어들의 의미)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 ··· 기의는 기표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때 기표는 필연적으로 기의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욕구를 충족시킨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사고할 수 없는 존재인데, 언어 자체가 확실성을 지닐 수 없다. 이를 소쉬르의 언어학을 인용하여 기표와 기의 관계를 통해 규명한다. 기표란 언어의 형식이고, 기의는 그 형식을 통해 부여되는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기표다.
예를 들어 어느 두 개의 문 위에 ‘남’이라는 단어와 ‘여’라는 단어가 있을 때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떠올린다. ‘남’이나 ‘여’가 갖는 본래적 의미 즉 기의는 뒤로 젖혀지고 형식으로서의 기표가 무의식과 의식을 지배한다. 기의와 대응관계를 벗어나 기표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한다.
“무의식은 기원이나 본능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표로 이루어졌다.” 기표가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최종적으로는 의식으로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 사고하거나 생각을 표출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는 기표에 의해 지배당하고, 그만큼 자율적이고 확고한 주체라는 설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심지어 주체조차도 기표로 변질된다. “기표가 진정한 기표로서 기능하는 것은 오로지 주체를 하나의 기표로 환원시킬 때다.”각주35) 기표는 의미효과에 의해 주체를 출현시킨다. 그리고 기표가 주체에게 주체로서 말하고 기능하도록 한다. 최종적으로 주체를 기표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굳어버리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하고 자율적인 주체는 허상에 불과하고, 현대인은 자기 확신이라는 덫에 걸려 주체의 확실성이라는 신기루를 좇았던 것이다. 확고한 생각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구조화된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는 무의식을 통해 존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자유자재로 사고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내가 아니며 의식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곳에서만 나일 수 있다.
은유와 환유(어떤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기) 방식으로 굴절되는 욕망에 대해서도 언어를 매개로 설명한다. “기표에 의해 생성되는 의미화의 연쇄 한쪽 끝에는 환유가 있고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은유가 있다.”각주36) 언어가 그러하듯이 욕망도 하나의 기표에 불과하다. 실제 의미는 감추어지거나 왜곡되고, 변질된 형식이 이를 대신한다. 우리는 기표로서의 욕망에 지배받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욕망 즉 환유의 방식으로 변신한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뛰어드는 것은 신기루를 잡는 행위처럼 잡으면 충족은 저만큼 물러나버린다. 겉으로 드러난 욕망을 충족하면 결핍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결핍의 재생산에 머문다. 그 결과 진정한 대상에서 벗어나 굴절된 욕망에 대한 왜곡된 집착을 반복하는 삶을 산다.
문제 해결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억압이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여 현실의 욕망과 차이가 나타나는 지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정신분석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억압을 인식하고 왜곡된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푸코도 언어와 의식의 관계를 통해 주체로서의 인간에 회의의 눈길을 보낸다. “인간의 말과 사유는 처음부터 언어 안에 위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인간이 언어의 주체일 수 있겠는가?”각주37) 언어 체계는 이해 이전에 형성되었기에 이해를 넘어선다. 이제 인식 가능성이 아니라 근본적 몰이해의 가능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자율적이거나 확고한 주체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언어가 시작되었을 때 기표와 기의는 통합되어 있었다. 언어는 기표가 지칭하는 사물과 유사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투명한 사물의 기호였다. 예를 들어 힘이 사자의 몸통에, 패권이 독수리의 시선에 새겨지듯이, 명칭은 지칭되는 사물에 유사성의 형태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언어와 사물의 투명한 관계는 파기되었다. 언어의 일차적 존재 이유인 사물과의 유사성이 점차 사라지고 기표가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이 상실된 유사성의 토대 위에서만, 유사성이 상실된 공백의 공간에서만 말할 뿐이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언어와 사물의 투명성이 사라진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캔버스 가득히 담배 파이프를 정밀하게 묘사해놓았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뿌연 배경색 위에 마치 둥둥 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그 아래 쓰여 있는 글귀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재미있게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안내 글을 첨가했다. 언뜻 보면 장난스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이 작품을 분석한다.
푸코는 이 그림을 보면서 “파이프‘다’라고 정색하고 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파이프를 나타내는 그림이 그 자체로 파이프는 아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파이프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이프’라는 기표가 기호와 이미지에 불과한데도 의식을 지배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손가락이나 화살표처럼, 더 멀리 있거나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는 어떤 파이프를 ‘참조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이프다.” 우리는 단지 파이프 그림을 통해 파이프를 참조하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파이프 자체를 떠올린다.
의식은 결국 이미지와 언어의 감옥 속에 갇혀 있고,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주체가 아님을 폭로한 것이다. 이 그림은 파이프를 단지 ‘그린’ 것일 뿐 파이프 그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파이프라는 말도 대상을 표현할 뿐이며 대상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미지와 언어는 우리를 속인다. 인간이 시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는 말은 반만 그럴듯한 얘기다. 인간은 어떤 인식과 그 반영으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사물을 바라본다. 사물에 대한 이미지를 전제로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사물의 이미지는 그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을 가로막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역으로 인식을 배반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푸코는 기표에 매어 있는 인간의 현실로부터 ‘주체의 희박화’라는 문제의식을 끌어낸다. 흔히 우리는 어떤 책을 볼 때 저자와 텍스트 내용의 통일성을 예상한다. 그의 개인적 삶과 체험, 독자적 사유가 텍스트에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저자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된 담론의 질서 안에 갇혀 작업한다. “문제는 그들의 작동 조건을 규정하는 것, 그들을 취하는 개인에게 일련의 규칙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말하는 주체의 희박화다.”각주38) 요구되는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담론의 질서로 들어가지 못한다. 담론의 질서는 허용과 금지라는 방식을 통해 말하는 주체를 자신의 구조 안에 가둔다. 담론의 질서 안에서 주체는 희미해지고 불분명해진다.
구조주의 인식론
언어와 상징, 체계를 통한 구조분석
개별 요소에 대한 체계의 우위를 언어를 통해 분석하는 구조주의 인식방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쉬르가 제기한 기표와 기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 ··· 기표는 기의에 대해 자의적이며, 기의와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자연적 관계도 없다.”각주39) 여기에서 자의적이라는 말은 화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사회에 채택된 표현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원칙적으로 집단적 습관 즉 일종의 규약에 의존한다. 기표는 그것을 사용하는 언어 집단으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기호에 내재하는 어떤 가치로서의 기의가 아닌 기표의 사용 규칙이 지배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기의와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구체적 실재는 스스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언어는 첫눈에 볼 수 있는 본체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수한 경우에서 기표의 변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 변질이 개념과 체계의 변질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기표가 변질된다고 해서 본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기호는 추상물이 아니라 실재적 사물이다. ··· 본체가 존재하며 이들의 작용이 바로 언어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언어 본체는 기표와 기의 연합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만약 기표만을 고려하면 구체적 사물은 사라지고 오직 추상적 기호만이 남고, 본체의 일부만으로 전체 본체를 파악했다고 착각하게 된다. 기표의 변질에 의해 언어의 구체적 실재가 스스로 우리 눈앞에 즉각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실재를 파악하고자 노력한다면 언어 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나중에 기표의 절대적 우위, 기의로부터 독립하는 데까지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하는 라캉이나 푸코와는 다른 문제의식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상대적으로 소쉬르의 문제의식에 충실한 편이다. 원시부족 언어를 통해 친족체계의 원형을 규명하고자 한다. “혼인의 규칙과 친족체계를 일종의 언어 즉 개체와 집단 사이의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작의 전체로 생각하는 것이다.”각주40) 현실에서 곧바로 두 가지가 일치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일정 단계에서 변질 즉 조작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질이 언어와 실제 친족관계의 동일성 자체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본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복잡한 체계와 언어를 단순화하고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구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신화를 매개로 구조를 분석한다. “구조 분석은 난해하고, 해독하기 불가능한 아주 복잡한 메시지를 축소하고 동시에 가장 경제적으로 기호화하는 것이다.”각주41) 구조 분석은 연구 대상의 실제적인 모든 양상을 성공적으로 철저히 고찰하는 데 있기 때문에 복잡한 현상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에 머문다면 미로 속을 헤매다 길을 잃고 만다.
형식적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신화는 다양한 만큼 그 모습과 내용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면밀히 관찰하면 서로 다른 신화 안에서도 변하지 않는 특성인 ‘골조’를 발견할 수 있다. 각 신화가 이러한 특성에 부여한 기능의 체계를 ‘코드’라 하고, 신화의 내용을 ‘메시지’라 부를 수 있다. “한 신화에서 다른 신화로 이행했을 때 ‘골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코드’는 변형되며, ‘메시지’는 전도된다고 말함으로써 신화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명시할 수 있다.” 신화 속에서 코드는 골조와 곧바로 일치하지 않는다. 기표가 그러하듯이 코드는 변질과정을 거치면서 마치 골조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 신화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골조를 통해 코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전도된 메시지의 원래 내용을 복원할 수 있다. “신화 분석에서 형식 분석은 필수불가결하다.” 형식 분석은 외면상으로 이상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신화 안에 숨어 있는 논리적 골조를 밝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서로 다른 신화 사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단순한 형식 즉 골조를 구분한다. “구조는 어느 경우에나 하나의 축으로 뒷받침된다. 그 축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추상과 구체를 서로 연결해주지만 분류하고자 하는 속성은 어느 쪽 방향을 택해도 언제나 극한까지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각주42) 대부분 이 극한은 이분법적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구조의 단순화 과정이 극한에 이를 때 두 가지 항의 대립 형태를 추출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골조로부터 특정 코드를 읽어내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변질된 코드의 원래 내용을 찾아냄으로써 애초에 신화가 전달하려는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낸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의 구조를 분석해 전도되기 이전의 본래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했다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저작의 구조를 분석해 본래 마르크스가 의도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찾아내는 데 주목한다. “마르크스 철학은 철학적 담론이라는 직접적 형태로가 아니라, 정반대로 《자본》과 같은 텍스트 형태로 자신을 드러냈다.”각주43) 비유하자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연구하고, 궁극적으로 계급투쟁에 관련된 과학적 지식만 취급하는 텍스트에서 논리적 골조를 찾아내고, 코드를 읽어냄으로써 마르크스 고유의 철학적 메시지를 발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철학의 본질적 특성과 연관된다. “철학이 사유한 세계는 철학이 해체했다가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한에서 통일된 세계다.” 진정한 철학은 개념과 개념, 사변과 사변 사이의 추상적 널뛰기가 아니다. 철학은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실천을 그대로 이론화한다고 해서 철학이 될 수는 없다. 철학은 서로 다른 사회적 실천들이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어, 철학의 모든 작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질서 안에 분배되는 세계다. 마르크스의 역설적 작업이 그러하다. 전문적 철학 교육을 받은 그는 독립적인 철학 저작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구체적 실천에 밀접히 연관된 《자본》을 씀으로써 철학 쟁점을 이해하게 하는, 철학적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조분석을 통해 저작에 숨겨진 열쇠를 찾아야 한다. “서술 순서를 가로지르고 넘어서는 장(章)들의 형태로 ‘외부’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획에 불가결한 이론적 요소로서 개입한다.”각주44) 《자본》의 구조, 상품에서 시작해 교환과정과 화폐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을 거쳐 잉여가치 분석으로, 임금에서 자본축적과 회전으로, 잉여가치에서 이윤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룬 전체 서술 순서는 철학적 인식을 반영한다. 또한 각 장 내의 내용을 펼쳐나가는 논리적 과정 역시 철학적 문제의식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자본》 자체가 철학적으로 연구돼야 하고, 이를 통해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알튀세르는 후기로 가면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체계와 질서보다는 점차 무질서로 시선을 돌린다. 에피쿠로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유물론적 기초를 무질서의 다른 이름인 마주침에서 찾았다고 한다. “전체와 질서를 거부하고 분산과 무질서의 편을 드는 철학을 위한 이 기각 속에서 말이다.”각주45) 원자의 우연한 치우침과 충돌에서 출발하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처럼 세계의 기원을 무에서 찾을 때 본질과 이성, 질서는 거부된다. 철학은 세계든 내적 이성이든 모든 체계적 조립 상태와 거리가 먼 곳에 자리 잡는다.
푸코가 보기에, 후기 알튀세르와는 달리 질서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한 문화의 기본 코드, 하나의 문화에서 언어 · 인식의 도식 · 교환 · 기술 · 가치체계, 실천의 위계 등을 지배하는 코드는 각자가 상대하게 되고 다시 처하게 되는 경험적 질서를 처음부터 결정한다.”각주46) 자연적 질서 아래 사물이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철학은 왜 질서가 존재하는지, 질서에 어떤 일반 법칙이 작용하는지, 어떤 원리에 의해 질서가 해명되는지를 설명하는 작업이다.
질서는 개별 요소들의 체계를 내적으로 지닌다. “아무리 단순한 것일지라도 질서 확립에는 요소들의 체계가 필수 불가결하다.” 요소들의 체계는 유사성과 차이, 변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당연히 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은 경험의 작용이 전제가 된다. 그 대신 철학은 경험 과학이 아니기에 어떤 실제적 조건과 경험 자체를 분석하여 질서를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식을 위한 가능 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담론의 질서에 주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자신의 작업을 “전통적 의미에서의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고학”이라고 설명한다. 어느 특정한 시대의 학문 분야나 지식을 대상으로 추출할 수 있는 담론의 질서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푸코는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시녀들〉을 통해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왕족 · 신하 · 시녀는 물론이고 궁정의 어릿광대 · 난쟁이 등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시녀들〉은 그 가운데 대표작이다. 가운데에 있는 황녀를 비롯해서 국왕 부부, 왼편의 화가 자신, 시녀와 시종 등 총 11명이 등장한다. 푸코는 각 인물의 특성보다는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시선의 구조를 통해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질서를 찾아낸다. “우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그림 속의 화가는 우리를 응시한다. ··· 이 상호적 가시성의 가느다란 선에는 불확실성, 교환, 회피하는 시선을 포괄하는 복잡한 망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 단순히 그림을 보는 우리와 좌측 캔버스 앞에서 작업 중인 화가의 시선이 마주치는 장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림 안에서 금방 발견할 수는 없지만, 갑작스런 대면 과정에서 서로 마주친 눈길, 서로 교차되면서 겹치는 시선의 망이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선은 캔버스 앞의 화가에서 출발한다. “화가의 시선에서 출발하여, 캔버스 이면, 벽에 걸린 그림들, 중앙의 거울, 뒤이어 열린 문, ··· 마지막으로 오른쪽 끝의 창문을 지각한다. 이 조가비 모양의 나선 구조는 재현의 전 과정을 온전히 드러낸다.” 여기까지가 재현 과정을 통해 나타난 가시적 영역 안의 구조다. 이 모든 가시적 시선은 질서의 중심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비가시적 영역에 종속되어 있다. 재현 영역 전체를 가로지르고, 모든 시선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중심이다. “주위 사람의 공손한 시선, 어린아이와 난쟁이의 놀란 모습에서 그들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림 끝의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작은 실루엣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바로 거울 속에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는 국왕 부부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그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작 국왕 부부는 그림 외부에, 비가시성 영역으로 물러나 있다. 그런데도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시선의 구조를 통해 재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질서의 중심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 혹은 언어 안에서 기의와 분리된 기표의 숲속에 본체가 숨어 있거나 변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성의 진정한 중심은 복잡한 현상 속에 은폐되거나 변질되어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코드화된 구조를 추적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기표와 기의의 일치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책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읽는다. 그리고 닮음의 번쩍거림만을 증거로 여긴다. 그의 여정 전체는 유사성의 추구다.” 돈키호테는 텍스트의 주인공이자 증인으로서 그가 읽었던 텍스트의 진실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이 오랜 시간 방에 틀어박혀 읽었던 온갖 텍스트의 현실과 얼마나 유사한 관계에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도레(Dore)의 〈서재의 돈키호테〉는 읽은 책 내용이 곧 현실이라고 믿는 돈키호테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사들의 모험을 담은 책 여러 권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그림은 돈키호테의 생각을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다. 좌측 맨 앞에는 흉악한 거인의 얼굴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른쪽 앞에는 어떤 악당이 공주를 거칠게 납치하려 하자 돈키호테에게 팔을 뻗어 간절하게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이 나온다. 위에는 전설 속의 용이 날아다니고 전투를 위해 진격하는 기사들의 용맹스러운 모습이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다. 방 여기저기에는 읽다 만 책이 굴러다닌다. 돈키호테는 책을 암송하다가 스스로 감정에 복받친 듯 칼을 높이 쳐들고 호령하고 있다. 삽화 전체를 압도하는 정밀한 선은 피카소가 그 세밀함에 매혹당한 게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문자와 사물 즉 텍스트로 나타난 기표와 기의가 얼마나 기만적 관계인지를 입증한다. “문자는 세계의 산문이기를 멈추었고, 닮음과 기호의 오랜 일치는 무너졌고, 유사성은 기만하고 망상과 정신착란으로 바뀐다.” 풍차에 달려들고 수도사를 공주 납치범으로 몰아 공격하며 양떼를 군대로 착각하여 돌진하는 돈키호테를 통해 텍스트의 언어가 사물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문자와 사물은 더 이상 비슷하지 않다. 문자와 사물 사이에서 돈키호테는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닌다. “기호는 재현의 내부에 관념의 틈새에 관념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자율적으로 작용하는 좁은 공간에 놓인다.” 이제 언어는 애초에 자신을 만들어 낸 현실과 분리되어, 담론 성격과 효력만을 지닌다.
그러므로 철학은 기표 집합으로서의 언설 구조를 규명하는 작업에 주목해야 한다. “고고학은 언설 안에 숨겨져 있는 또는 드러나 있는 사유 · 표상 · 이미지 · 테마 · 고정관념이 아닌 언설 자체, 규칙에 복종하는 실천인 한에서의 언설을 정의하고자 한다.”각주47) 언설을 특이성 속에서 기술하고, 그들을 작동시키는 규칙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으로 환원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언설을 구성하는 각 요소를 정의하고, 요소 사이의 경계선을 규명하고, 특이한 유형의 관계와 법칙을 도출하여 계열화해야 한다. 나아가서는 서로 다른 계열 사이의 관계를 기술함으로써 구조화된 표를 구성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초이성주의, 초합리주의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연구 방법을 감성의 속성과 이성적 추론을 통합하는 초이성주의에서 찾는다. “마르크스주의 · 지질학 · 정신분석학은 모두 감성의 특성 가운데 아무것도 상실함이 없이 이성에 통합시키려는 초이성(超理性)론이다.”각주48) 그는 마르크스주의 · 지질학 · 정신분석학을 자신의 세 스승이라고 한다. 세 경향은 모두 주관적 체험과 실재 사이의 불연속성을 인정하고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객관적 총합을 주장하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를 인식방법의 주요 교훈으로 수용한다.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문제인 것도 체험과 실재 사이의 연속성을 찾으려는 태도, 주관성의 환영에 호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특히 객관적 총합을 위한 경험과 관찰이 중요하다. “새로운 개념의 출현에는 사물의 속성에 대한 부단한 주의력이 요구되며 서로 구별할 수 있는 특징에 대한 빈틈없는 관찰이 필요하다.”각주49) 직접 경험으로 제한된 주장은 아니다. 철저한 문헌조사를 비롯해서 간접 경험으로 얻은 정보의 엄밀한 분석을 포함한다. 그런 면에서 루소(Rousseau)를 존경한다고 거듭 표명한다. 결코 먼 지역을 여행해보지도 않았지만, 그의 문헌조사는 제한된 시대 조건 안에서는 완벽했다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논리적 범주를 추상적 이론에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감성과 이성의 통합을 추구한다. “날것과 익힌 것, 신선한 것과 부패한 것, 젖은 것과 태운 것 등의 경험적 범주가 어떻게 추상적 개념에 적용될 수 있고, 개념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며, 명제로 연관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 한다.”각주50) 경험적 관찰과 신화를 분석해 얻은 경험적 범주, 이전의 형이상학에서는 개념도구로 쓰인 적이 없는 범주를 사용해 법칙 효력을 지닌 이론으로 전개한다. 신화에서 출발하되, 줄거리 내용을 배제하고 각 신화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고정된 논리 구조를 추출해낸다. 혼돈 뒤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날것과 익힌 것, 신선한 것과 부패한 것 등 경험적 범주에 의한 대립 쌍을 찾아내고 의미를 밝혀나가는 접근 방식이다.
알튀세르는 실천과 이론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합리주의 전통과 거리를 둔다. “이론적 저작에서도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 투쟁이라는 지반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각주51) 합리주의에 의하면 비판이란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출한다는 논리적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 기초를 둔 완전히 다른 기능을 비판에 부여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철학적 의식을 청산했다. 또한 의식과 무의식의 종합이라는 점에서도 합리주의 전통과 구분한다. “외관상으로 철학은 가장 의식적인 담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무의식의 담론이다.”각주52) 철학 내에 무의식적 담론이 자기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가 경험적 범주를 강조했다면, 알튀세르는 경험을 벗어난 추상적 범주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중요한 철학적 대상으로 설정한다. “현실적 경험 준거를 갖지 않는 것, 예컨대 진리 · 유일자 · 총체 · 코기토, 선험적 주체처럼 철학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많은 범주를 발명하지 않을 수 없다.”각주53) 그가 열거한 범주들은 실제로 철학 외부의 경험적 · 사회적 범주가 아니다. 순수하게 철학적 추상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알튀세르는 이 범주 자체가 철학적 대상일 수 있고, 이를 엄밀하게 분석해 사회적 실천에 부과할 수 있는 논리 체계를 수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캉은 무의식을 엄밀한 철학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합리주의적 인식을 넘어선다. 무의식도 의식과 마찬가지로 정교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철학의 엄밀성 내에 있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결코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주의적 무의식이 아니다. ··· 무의식도 의식의 수준만큼이나 정교한 방식으로 말하고 기능한다. 따라서 의식은 자신의 특권처럼 보이던 것을 잃고 만다.”각주54) 무의식은 신비롭거나 이해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니다. 무의식을 의식 이전의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것과 연관시키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의식은 의식이 주체에게 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주체를 규정한다.
의식 영역과 마찬가지로 무의식도 구조 분석 대상이다. “무의식을 하나의 구조, 그것도 시간적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무의식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의식은 그 사이의 틈새로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고정된 공간을 차지하고 안정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극히 짧은 순간에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적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접근이 가능하다. 만약 시간적 구조를 도외시한다면 틈새가 금방 닫히고 무의식은 달아나버린다.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무의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조로서 해명된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에서 틈새를 통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무의식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신발과 발이 중첩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뒤로는 나무 벽이 빠져나갈 틈 없이 가로막았다. 아래는 잘지만 거친 돌이 있는 흙바닥이다. 신발과 발이 중첩된 모습은 여러 가지 틈새를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신발과 발이 중간에서 형태와 색이 섞이면서 변화의 한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순간 발의 모습이 드러났다가 다시 구두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구두 바깥과 안의 틈새가 나타난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신발과 발이지만 좀 더 들어가면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일 수 있다. 각 소재는 현실이지만 두 가지가 섞이면서 비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틈새이기도 하다. 무의식은 의식의 뒷면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일까?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주변을 더 꼼꼼하게 살피면 억압된 현실과 욕망 사이의 틈새와도 연관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른쪽 바닥에 거의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성의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기사 조각이 나뒹군다. 왼쪽으로는 낡은 동전 몇 개가 떨어져 있다. 나체 상태의 몸과 동전은 성과 부라는, 인간의 전형적 욕망 대상이다. 동전과 신문기사 조각 사이에 꺼진 성냥 두어 개가 있어서 실현되지 못하고 억눌린 욕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변의 장치를 고려할 때 신발과 발이 섞여 있는 것도 문명이 만들어낸 규칙으로서의 신발과 날것 그대로의 욕망으로서의 발이 충돌하는 낯선 순간을 보여주려는 게 아닌가 싶다. 억압된 것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징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정신분석학의 제1원리라 할 수 있는 ‘억압된 것의 회귀’를 보여준다.
마그리트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낯선 장면과 역설을 통해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드러내는 작업을 했으나 작업 방식은 매우 논리적이고 이지적이다. 비논리적으로 여겨지는 무의식에서 논리적 구조를 규명하는 라캉의 작업과 연관된다.
변증법적 사고를 통한 구조 분석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부족의 생활과 사고를 통한 인류학적 구조 분석이 변증법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여긴다. “인간은 무대를 옮겨감에 따라서 과거에 소유한 모든 위치와 미래에 소유하게 될 모든 위치를 함께 가져간다. ··· 왜냐하면 우리는 몇 개의 세계 가운데 살기 때문이다.”각주55) 과거와 미래는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현재 속에 과거의 축적된 요소나 체계, 또한 미래의 가능성을 지닌다. 우리가 통과한 단계들은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단계가 그 위에 포개져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동시에 어느 곳에서도 존재한다. 원시부족 연구가 지극히 현실적 의미를 지니는 까닭이다.
연구 과정에서 인식방법도 변증법에 근거할 때 실재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상부구조의 변증법은 언어의 변증법과 같아서 먼저 구성단위를 세워야 한다.”각주56) 개별 요소에 매몰되지 말고, 요소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구성단위 파악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때 구성단위를 변증법적으로 대립되는 쌍으로 대비시킨다. 즉 모순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단위를 세워야 한다. “각각 고립되어 있는 경우에는 어떤 확실한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 대립쌍이 구성되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각주57)
예를 들어 신화에서 웃음이라는 요소가 있을 때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웃음과 관련된 모든 신화에 명백한 모순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웃음은 불행한 결과와 연관되어 있는데, 가장 흔한 불행은 죽음이다.” 신화 속에서 웃음이 불행이나 죽음과 연결된 쌍으로 구성될 때 어떤 의미로 접근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날것과 익힌 것, 날것과 썩은 것, 건조한 것과 습한 것, 고여 있는 물과 흐르는 물, 높은 것과 낮은 것 등 두 극의 대립된 항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신화에 접근한다. 하나의 사고가 다른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두 사고의 이중적 반성운동을 통해 사고 구조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레비치의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 다르고 다양한 요소가 맞물릴 때 어떤 의미가 생성된다. 긴 선과 짧은 선, 선과 면, 원과 다양한 모양의 사각형, 수평과 수직의 배열, 나아가서는 몇몇에 불과하지만 서로 다른 색이 캔버스 안에서 만난다. 각각의 도형과 선 사이의 간격도 천차만별이어서 우연한 충돌의 순간이다. 서로 다른 요소가 만나면서 원은 더 이상 원으로, 사각형은 사각형으로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각각의 도형이 마주치고 배열됨으로써 만들어내는 전체적 이미지에 시선을 둔다. 그리고 나름의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 그 순간 각 도형은 기하학의 차갑고 건조한 이미지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얻는다. 본래 의미란 고립된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변증법은 각 요소가 연관관계 위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구성단위 내에서, 혹은 구성단위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순은 대립에 머물지 않고 종합을 지향한다. “정신은 경험적 다양성에서 개념적 단일성으로, 개념적 단일성에서 유의미한 종합으로 나아간다.”각주58) 대립 쌍의 형식으로 마련된 구성단위를 사용해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체계 형성을 위해서는 추상화 작업이 불가피하다. 경험적 사실을 기호로 변화시킴으로써 사실과 관념을 종합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화 과정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과학적 설명은 복잡에서 단순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난해한 복잡성을 좀 더 이해 가능한 복잡성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다.” 인식 과정도 단순할 수는 없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나선형의 복잡한 축을 따라 진행한다.
알튀세르는 추상적 관념과 구체적 계급투쟁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한다. “관념은 아무리 참되고 형식적으로 논증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체로는 능동적일 수 없으며, 계급투쟁 속에 채택된 대중 이데올로기 형태를 취하게 될 때만 역사적으로 능동적일 수 있다”각주59) 마르크스의 철학은 단순히 사실과 관념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이론에 머물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수행한 변증법적 통일은 사실과 관념이 기계적 결합을 넘어 새로운 차원인 이데올로기로 종합이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관념을 주어진 현상에 대한 설명 원리로 여기지 않고 계급투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 효과에 주목했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세계의 변화’라는 실천의 의미를 이데올로기 효과 측면에서 설명한다. “철학은 토픽이라는 배치 형태 속에서 존재양식을 책임진다는 것을 절대적 조건으로 해서만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확언할 수 있다.”각주60) 철학에 있어서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는 토픽 즉 이론화된 이데올로기를 대상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계급투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정치적 차원에 직접 현실 대상으로서 계급투쟁이 있다면, 인식적 차원에는 지식 대상으로서 이론화된 이데올로기인 토픽이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적 명제는 바로 토픽이라는 형태로 스스로를 실현함으로써 실천의 우위를 설정했다. “철학과 이론이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행동을 실행”할 때 철학의 실천성이 확보된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이라고 이름 붙인 작업 과정에서 변증법적 모순관계에 일차적으로 주목한다. “언설이란 하나의 모순으로부터 다른 모순으로 가는 길이다.”각주61) 지성사를 이루는 언설은 모순에서 모순으로 이어진다. 철학은 언설을 분석하여 그 구조 내에 존재하는 모순을 발견한 후 모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결국 또다시 모순으로 나타나게 하는 작업이다. 철학은 모순이 언설 속에서 행하는 놀이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철학은 모순과 연관된 개념과 범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불연속 · 비약 · 문턱 · 극한 · 계열 · 변환과 같은 개념의 사용은 모든 역사적 분석에서 과정상의 물음만이 아니라 이론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사유 · 개념 · 인식에 관계되는 역사적 분석을 할 때 이러한 범주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지성사는 일종의 ‘암살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인식방법은 연속성을 중심으로 언설을 반성 없이 조직하는 작업이다. 연속성의 직접적 형태를 의심에 부침으로써 모든 영역을 해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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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구조주의 존재론과 인식론 – 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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