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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개막
근대 이후 서양 문명은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근대 이후 데카르트 중심의 합리적 이성을 이성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한다. 이성 개념에 기초하여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대단히 익숙해져 있다. 그만큼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합리론을 정립한 대표적 사상사로는 프랑스의 데카르트(Descartes, 596~1650), 네덜란드의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독일의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 등을 들 수 있다.
서양 철학을 근대 이후와 이전으로 구분할 때 데카르트를 경계로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서양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데카르트 한 사람이 근대철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동안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인간과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합리론이 근대적 사고 형성에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고, 이를 옹호 · 수렴하거나 반박 ·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향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결정적이었다. 그리하여 이후 주류 철학의 자리를 거의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합리론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의 주관화 · 형식화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성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지만 객관주의적 이성을 내세운 점에서는 같았다. 소피스트가 이성의 객관성보다는 생각하고 논의하는 방법으로서 이성을 더 강조했지만, 그리스 철학을 주도한 이들은 객관주의적 이성관에 충실한 편이었다. 개인적 의식만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 속에서 즉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회 계급 사이의 관계, 사회 제도와 기관 그리고 심지어 자연 속에서 이성의 현존을 주장한다. 정의와 덕, 아름다움 등 객관적 가치를 인정하고 규명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목적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위계질서 또는 포괄적 체계를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졌다.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이러한 총체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따라 규정될 수 있었다. 주관적 이성은 객관적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객관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로 이성의 역할을 전환시킨다. 또한 계산 가능성과 증명 가능성을 실현하는 수학적 사고방법을 이성의 핵심으로 규정해서 객관적 가치를 폐기하고 더 나아가 이성의 형식화를 향한 길을 열었다.
합리론은 근대적 주체의 선언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세계의 모든 것은 의심스럽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모든 출발을 의심하는 주체에서 찾는다. 세상의 실질적 주인은 더 이상 자연도 신도 아닌,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으로는 아직 신학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인간 외부의 자연, 나아가서는 타인에게서 독립한 원자화된 개인이 근대적 주체가 되어 모든 사고와 행위의 출발로 자리 잡는다.
당시 프랑스 미술에서 뚜렷한 위치에 있던 르냉 형제의 〈아카데미〉는 합리론 이후 나타난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탁자를 중심으로 남자 일곱이 모여 있다. 탁자 위에는 책이 몇 권 놓여 있고, 한 사람은 책을 들고 막 읽는 중이다. 책의 두께로 봐서 성경은 아닌 듯하다. 탁자 왼편에 앉은 사람이 펼쳐 놓은 책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고 있어서 어떤 구절을 놓고 논의하는 듯하다. 실제로 이들은 아카데미 애호가 모임의 회원이다. 주인공이 예수나 열두 제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다. 당대의 특별한 사상가도 아닌, 복장으로 봐서는 중간층 정도의 일반사람이다. 이들이 책 읽고 토론하는 장면에는 이성이 새로운 사회의 희망이고, 또한 누구나 다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합리론의 특징이 녹아 있는 듯하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양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양식은 음식이 아니라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이성 능력을 의미한다. 이성은 절대자의 은총으로 제한된 존재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게 갖는 능력이다. 누구나 이성의 사용방법만 정확히 지킨다면 진리 탐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는 처음에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나 1629년 이후에는 자연 연구에 몰두한다. 철학자만이 아니라 수학자로서도 유명한데,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본격적 철학 탐구라고 할 수 있는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이외에도 자연 탐구에 해당하는 《우주론》,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 등을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근대 학문의 새 장을 열었다.
데카르트 초상화는 그의 철학이 당시 유럽에 준 충격을 담고 있다. 프랑스 화가가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 최고 인기 화가 중 한 사람인 할스가 그렸다. 할스만이 아니라 당시 여러 네덜란드 화가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왜 프랑스 화가가 아니라 네덜란드 화가였을까? 데카르트는 1629년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죽음도 프랑스가 아닌 타국에서 맞았다. 그래서 이후 프랑스 사람들조차 그를 네덜란드 화가의 초상화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기존에 진리라고 믿어 오던 모든 사고를 의심하여 확고한 것만을 인식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전통적 학문과 세계관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쓸 당시 파리 의회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물리학 이론을 주장할 경우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결정할 정도였다. 데카르트는 당시 프랑스 상황에 위협을 느꼈고 학문적으로 자유로웠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유럽 국가에 종교적 광풍이 남아 있었지만, 네덜란드는 1579년 건국헌장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관용 정책을 폈다. 데카르트에게는 내적 평온을 유지하며 학문 활동에 전념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실체로서의 세계와 인간 이해
자연 · 인간 · 신과 실체성
데카르트가 보기에 외부 물체는 실체에 해당한다. 자연은 인간 정신과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다. 물체는 연장 즉 길이 · 높이 · 크기 · 깊이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실체다. 물체가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은 모두 필요하지 않고, 물체 자체로서 독립성을 지닌다. 다만 존재하기 위해 신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유한실체다. 인간도 신의 협력이 필요하기에 마찬가지로 유한실체다. 존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무한실체는 오직 신뿐이다. “지성적 본성과 물체적 본성의 합성은 의존성을 나타내고, 의존성은 분명히 결함이다. 그러므로 신이 두 가지 본성의 합성일 수 없다.”각주1)
자연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인식과 무관하게 외부에 존재한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없이 물체는 스스로의 본성을 지닌다. 자연은 연장을 특징으로 하는 물체적 본성만 지닌다. 인간은 신체라는 물체적 본성에 지성적 본성이 합성된 존재이므로 자연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합성된 존재는 순수하지 못한 결함이 있기 때문에 완전성을 갖춘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은 유한실체다. 그런데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에서 나오기에 완전성을 가진 무한실체인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가 중세 신학과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존재에서 불완전한 존재가 나온다는 유출설 냄새가 배어나온다. 자연을 객관 실체로 인정하지만 신의 협력이 전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신학 논리와 같지는 않다. 신이 이성 원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지적이다.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 속에는 삼각형 세 각의 합이 두 개의 직각과 같고, 구체의 모든 부분이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명확하게 현존이 포함되어 있다.”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의 확실성과 신 존재의 확실성을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
푸생의 〈계단 위의 성가족〉은 데카르트 철학의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데카르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푸생은 17세기 프랑스 최고 화가며 중세 회화에서 근대 회화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림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성화의 단골 주제인 성가족을 담았다. 중앙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고, 아버지 요셉은 ‘동정녀’ 마리아를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왼편으로는 나중에 예수에게 세례를 주는 요한이 등장한다. 아기 예수가 아기 요한에게 과일을 주는 구도를 통해 영적인 상하관계를 분명히 했다. 여기까지는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의 성가족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 화가는 물론이고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화가도 같은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그림 배경을 보면 이전 성가족과 차이가 뚜렷하다. 중세 회화에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주로 옥좌에 앉아 있다. 옥좌는 지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세상일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그 지위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주로 자연을 배경으로 성가족을 묘사한다. 미켈란젤로는 자연과 인체를 배경으로 성가족을 그렸다. 자연과 인체를 배경으로 한 것은 초월적 존재보다는 현세적 의미와 감성에 친근하게 다가서는 의도였다. 하지만 푸생의 그림에서 성가족은 생뚱맞게도 그리스 · 로마 풍의 신전 계단에 앉아 있다. 나사렛 마을이 아니라 전형적인 그리스 · 로마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다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서양의 문화 전통에서 그리스 · 로마는 이성을 상징한다. 푸생은 후세 추종자들이 ‘화가 철학자’로 부를 정도로 그리스 고전에 정통했다. 그리스 · 로마를 배경 삼아 신을 이성 원리 위에 세우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 비해 더 분명하게 자연의 실체성과 객관성을 강조한다. “모든 존재는 신에 내재되어 있다. 어떤 것도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생각될 수도 없다.”각주2) 신을 유일한 본원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보다는 신과 자연 사이에 확실히 더 넓은 간격을 둔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로 인해 움직이는 모든 양식은, 움직이는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움직이게 하는 물체의 본성에서 생겨난다.” 물체의 운동은 외부적 힘의 작용이 아니라 물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산물이다. 실체로서 물체의 독립적 성격이 강화된다.
신과 자연의 관계도 더 분명하게 제시한다. “모든 자연물은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작동하게 하는 힘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자연물의 자연적 힘은 절대적 자유인 신의 힘 외에 다름 아니다.”각주3) 자연물은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작동한다. 그만큼의 권리를 독자적으로 지닌다. 중세 신학의 절대적 전제였고, 데카르트에게는 절충적이던 신에 의한 창조가 상당히 퇴색됐다. 자연은 초월적 절대자에 의한 일방적 제작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고 운동하는 지위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심지어 자연물의 자연적 힘이 곧 신의 힘과 같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창조주로서 기독교적 신이라기보다는 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의 법칙이 곧 신의 법칙이다. 신이 곧 자연일 때, 신은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일 수 없다. 적극적으로 “물체적 실체가 신의 본성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의문에 반론을 편다. 이 모든 의문은 물체적 실체가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가정을 통해 나타나는데, 이는 잘못된 논리다. 신의 무한성을 전제하고 이로부터 물체의 유한성을 이끌어내는 논리는 부조리한 연역에 불과하다. 자연 자체도 측정할 수 없는 무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신과 마찬가지의 본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자연을 초월하지 않으며 내재한다. 자연은 능동적 · 창조적 본성을 지니며, 모든 사물을 생기게 하는 역량이고 물질적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보편 원리다.
라이프니츠는 반대로 신과 자연의 관계를 더 좁히는 방향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비판한다. 먼저 신의 존재를 수학적 원리를 통해 증명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수나 도형의 본질과 같이, 최고의 정도가 불가능한 형상 또는 본성은 완전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수 중에서 가장 큰 수는 모든 도형 중에서 가장 큰 도형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모순을 포함하지만, 가장 큰 지식과 능력은 어떠한 불가능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과 능력은 완전성이며, 이들이 신에게 귀속되는 한, 어떠한 한계도 갖지 않는다.”각주4) 수학이나 기하학에서의 정의는 한정적이지만 신은 어떠한 한계나 불가능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수학을 통한 신의 설명은 성립할 수 없다. 가장 큰 수라든가 가장 큰 도형이라는 설정이 성립할 수 없듯이 수학이나 기하학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이 세상에 가장 큰 수나 도형이라는 설정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신은 존재나 능력에 있어서 모순이나 불가능이 없으므로 이 둘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오류다.
자연의 원리가 신의 원리와 같다는 스피노자의 주장도 오류다. 특히 자연물을 존재하고 작동하게 하는 힘이 곧 신의 힘이라는 스피노자의 논리는 ‘힘’을 잘못 생각한 데서 빗어진 오류다. 힘을 물리적 특성으로만 파악해서는 안된다. “이 힘은 크기 · 형태 · 운동과 다르다. 물체 개념의 의미가 단지 연장과 그의 변형뿐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추방했던 본질 또는 형상을 다시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물의 존재와 작동은 물리적 크기나 운동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힘을 물질적 운동량과 구별해야 한다. 물체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장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힘에는 자연물의 배후에서 존재하고 움직이게 하는, 즉 본질에 해당하는 형상이 작용한다. 당연히 형상은 신과 연결되고, 물체는 신이 창조했다. 그러므로 창조된 실체는 “유출과 같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산출하는 신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명백”하다.
나아가서는 물체를 아무리 ‘유한’이라는 제한을 두더라도 실체로 규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연장에서 생긴 개념은 허구를 포함하기 때문에 실체를 구성할 수 없다. 연장 즉 크기 · 형태 그리고 운동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에 실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고, “필연적으로 거기에서 영혼과 관련이 있고 사람들이 흔히 실체적 형상이라 부르는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실체가 될 수 있다. 실체는 공간적 특성을 가져서는 안 되고, 오직 비공간적인 속성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체 자체의 작용 원인 즉 작용인을 완전히 부정하고 형상에 의한 목적인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처럼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비물체적 본성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다 같이 만족시키기 위해서 목적인으로 이르는 길과 작용인으로 이르는 두 길의 화해”가 필요하다. 목적인만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스럽고 미신적인 사람”에 불과하다. 두 방식의 결합이 가장 바람직하다.
라이프니츠는 작용인과 목적인이 결합된 실체를 모나드(monade單子)라 부른다. “모나드는 복합된 것 안에 있는 단순한 실체다. 단순하다 함은 다시 말하면 부분이 없다는 뜻이다. ··· 부분이 없는 곳에서는 연장도, 형태도 또한 분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나드는 자연의 진정한 원자고, 사물의 요소다. 또한 그들의 해체를 염려할 필요도 없다.”각주5) ‘원자’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한의 독립적 단위라는 점을 거론했지만, 모나드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는 다른 개념이다. 신이 창조한 모나드는 영혼이라 불릴 수 있기에 물질적 개념을 넘어선다. 단순한 실체는 단독의 모나드이고, 복합된 실체는 모나드의 집적이다. 한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에 미치는 영향도 물질을 넘어 관념 작용을 포함한다. 관념도 신의 관념 안에서, 신의 매개를 통해서만 작용한다.
정신의 실체성과 자유의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문제의식을 여러 면에서 집약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 이해는 물론이고 인식 원리를 담고 있다. 이 명제를 자신의 철학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제1원리로 규정한다. 우선 정신의 실체성을 강조한다. 정신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정신은 존재를 규정하는 실체다.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요, 그 본질 내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요, 또 존재하기 위하여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음을 알았다. 따라서 ‘나’ 즉 나를 나 되게 하는 정신은 신체와 전혀 다르고, 또 신체보다 인식하기가 더 쉬우며, 설사 신체가 없어도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한다.”각주6)
정신은 신체와 다른 독립적 실체다. 신체와 세계, 내가 있는 장소도 없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것의 진리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내가 존재한다. 여기에서 신체나 장소가 없다는 상상이 물체 · 모양 · 연장 · 운동 · 장소 등 물체의 실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는 의미고, 정신이 독립적 실체의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적 · 논리적 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영양을 취할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 감각도 신체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 생각하는 일은 어떤가? 생각이야말로 나에게 속한다. 이것만은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각주7) 인간의 생존과 감각은 물체로서의 신체가 전제다. 하지만 정신은 독립적이다. 논리적 차원에서 감각이나 자연적 요소 즉 육체적 요소는 떼어낼 수 있지만 정신은 떼어낼 수 없다. 정신만은 ‘있다’라고 할 수 있고,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의 생각’, ‘하나의 정신’, ‘하나의 이성’일 따름이다.
신체보다 정신을 더 인식하기 쉽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신이 물체보다 분명하게 알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실체 속에서 상태나 성질을 인식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명석하게 실체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정신 속에 다른 어떤 사물보다 한결 많은 상태나 성질이 있고, 우리는 그 성질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각주8) 확실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분석할 수 있는 많은 성질을 내적으로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물이나 대기 중의 공기, 돌멩이 등은 단순한 성질만을 가지고 있어서 분석할 수 있는 성질이 적다. 신체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기능이 있지만 성질이 생존으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상태에 속한다. 그러므로 확실한 인식이나 진리가 작용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객관 세계는 거기에 ‘있다’거나 어디에서 어디로 ‘변화한다’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기 힘들다. 하지만 정신은 엄청나게 많은 상태와 성질을 가지고 있다. 분류와 추론 능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수많은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정신은 수시로 변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판단을 요구한다. 정신은 관찰 · 분석해야 할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더 분명하게 존재하고 확실성을 지닌 실체다.
또한 확실성을 지닌 정신으로부터 본질이 규명될 수 있다면, 인간은 자기 활동의 자유 원인이 될 수 있고,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거나 하는 절대적 능력도 가질 수 있는 존재 즉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일 수 있다.
스피노자도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중요성과 정신의 독립성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정신이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정신은 독립적이다. ··· 이성에 인도된다면 인간은 매우 자유로운 존재다. 행동 결정에 여러 원인이 작용하겠지만, 인간은 자연적 본성이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원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각주9) 하지만 구체적 내용, 특히 자유의지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면밀하게 검토하면 ‘정신이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라든지, ‘자연적 본성이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원인에 따라 행동’이라는 식으로 제한을 둔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지만,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독립적 정신을 지니고 있기에 저절로 자유로운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데카르트식 자유의지는 성립할 수 없다. “정신 속에는 절대적 의지 즉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없다. ··· 정신은 자기 활동의 자유 원인이 될 수 없으며, 또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거나 하는 절대적 능력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저것을 의도하도록 원인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이 원인도 또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 그 원인도 역시 다른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 이렇게 계속된다.”각주10) 정신 자체로는 절대적 자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의지일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자유의지와 욕구를 혼동한다. 그래서 젖먹이가 젖을 열망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며, 화가 난 아이가 복수하려는 것, 겁먹은 아이가 도망가려는 것을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라고 믿는다. 또한 술 취한 사람의 횡설수설도 정신의 자유에 의한 행동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욕망일 뿐이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다.
순간적 욕구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자유의지는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존재 즉 의심하는 존재로부터 직접 주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행위의 결정 원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특히 사고와 행위를 결정짓는 본성의 법칙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도 스스로의 본능을 보존하기 위해 행동한다. “오직 본성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작동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각주11)
정신과 신체의 합일과 이원론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물체라는 실체와 정신이라는 실체의 구분을 전제로, 두 실체가 합성된 존재다. 물체로서의 신체는 자연이 그러하듯이 기계적 작용이다. 《방법서설》에서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는 정교한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원숭이조차 태엽 장치가 있는 기계와 마찬가지다. 심지어 동물의 모습과 기관을 가진 기계가 있다면, 동물이 아니라고 말할 방법이 없다. 물체적 실체인 동물과 정신적 실체와 합성된 인간은 정도가 아닌 종류의 차이에 해당한다.
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모방하는 기계가 있다 해도 자기 생각을 말이나 신호를 사용해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무엇을 원하느냐고 되물을 수 있고, 다쳤다고 울 수 있는 기계, 말하는 기계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상황에 맞게 말을 바꾸지는 못하기에 인간과 전적으로 다르다. 동물이나 기계는 정신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본능과 기계적 배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물체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의 합성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데카르트의 글에는 언뜻 보면 합성의 성격과 관련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모순처럼 보이는 대목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확인했듯이 《방법서설》에서는 “정신은 신체와 전혀 다르고, ··· 설사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정념론》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영혼이 소멸되는 것은 열이 사라지고 몸을 움직이는 기관이 변질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신은 신체가 없어도 존재한다는 규정과 신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소멸한다는 규정이 공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르다고 보기 쉽다.
이러한 곤란함 때문에 데카르트를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데카르트의 ‘실체적 구분’을 완전한 기계적 분리, 가장 흉악한 형태의 이원론으로 규정하는 성급함이다. 신체에 속하는 것은 영혼과 무관하고, 반대로 영혼에 속하는 것은 신체와 무관하다고 쉽게 단정 짓는다. 그래서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몸과 관련 없는 영혼이 담겨 있을 뿐이라는, 정신을 물질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기계적 이원론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한다면 데카르트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심지어 중세 신학의 반복이나 아류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기계적 이원론이라면 영혼은 신체와 무관하게 독립적 생명력을 지니는 것으로서, 신체에서 완전히 독립해서 실재한다는 발상으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전혀 다르다. 《정념론》에서는 현실적 차원, 《방법서설》에서는 논리적 차원에서의 검토로 구분해서 이해할 때 비로소 데카르트의 생각에 올바로 다가설 수 있다.
《정념론》에서는 중세적 오류, 영혼이 신체를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관장한다는, 그리하여 죽음과 함께 영혼이 분리된다는 오류를 반박한다. 이러한 오류는 영혼이 떠나서 시체에 열과 운동이 사라진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생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몸의 열과 운동이 영혼에 의한 것이라고 아무 이유 없이 믿어 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신체의 죽음을 통해 영혼이 소멸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 사체와 다른 것은 시계의 태엽이 감겨 있어서 운동의 원동력을 갖추고 있는 경우와, 시계가 부서져서 원동력이 사라졌을 경우의 차이와 같다.” 영혼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신체와 결합해서만 활동이 가능하다. 둘은 현실적으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방법서설》에서 강조한 내용은 순수한 논리적 설정이다. “신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세계도 없으며, 내가 있는 장소도 없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설정은 말 그대로 ‘상상’이지 현실적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각이야말로 나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신의 실체성 ·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감각을 배제한 순수한 이성적 사고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리적 가정이다. 논리적 추상을 위해 부차적 요소를 일단 없다고 가정하는 사상 작업과 비슷한 설정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부분에 대해 각을 세워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 “정신은 신체와 함께 완전히 파괴될 수 없으며, 영원한 것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 ··· 우리는 신체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을 상기할 수가 없다. ··· 하지만 스스로 영원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정신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상기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사물을 보고 관찰하는 정신의 눈이 그 증명이다.”각주12)
기본적으로 인간이 정신과 신체의 합성이라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에 동의한다. 하지만 합성을 시간에 의한 제약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반발한다. 신체의 죽음과 동시에 정신의 모든 부분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정신 중에는 신체의 상태와 무관하게 영원성을 지니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소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체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를 신체 속에서 상기하여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물을 보고 관찰하는 정신의 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사물을 보고 관찰하는 정신의 눈이란 대상을 관찰 · 분석하면서 적용하는 정신의 도구, 예를 들어 전체와 부분, 보편성과 개별성 등의 관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접 신체로부터 소멸되지 않는 정신의 부분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관념이 정신 작용 속에 미리 있다는 것을 통해 신체의 지속과 상관없는 정신 영역이 있음을 증명한다.
칸트의 ‘아 프리오리(a priori)’ 즉 경험 이전에 선행하는 지식이라는 문제의식과 적어도 형식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물론 칸트와는 문제의식의 출발 자체가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 스피노자가 신체와 무관하게 지속성을 지니는 정신 영역을 설정하는 데는 신을 대하는 태도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이 어떤 것은 신의 본질인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생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원할 것이다.” 죽음과 함께 영혼이 사라진다는 데카르트의 주장대로라면 신과 인간을 연계할 수 있는 핵심 고리가 사라질 수 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원성을 지닌 영혼 영역을 설정하되, 영혼 전체를 영원성 속에 두기에는 이미 과학적으로 부인되는 증거가 많기에 부분적 영역으로 제한함으로써 현실적 곤란을 피해가려 한 듯하다. 인간과 신의 관계를 데카르트보다 더 좁혀놓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앞에서 보았듯이 물체의 실체성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보다 신과 물체 사이에 더 간격을 두었다. 그런데 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좁혀놓았을까?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논리를 이미 중세 신학에서 익숙하게 확인한 바 있다. 물질의 이해에서는 이성의 힘을 확장하고,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는 이성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이성과 신학 사이의 조화를 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발상법을 스피노자가 다시 차용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분리와 합성 자체를 부정한다. “우리는 한 실체를 둘로 분할할 수 없고, 두 실체를 합성하여 하나로 만들 수도 없다. 실체는 가끔 변화되기는 하지만, 그들의 수는 자연 상태에서 증가나 감소하지 않는다.”각주13) 인간의 본질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 아니다. 영혼이 홀로 인간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신과 함께 자족한다. 영혼은 절대적 독립성이 특징이기에 불멸성이 성립한다. 영혼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나드에 해당하는데, 영혼의 소멸은 세계가 스스로 파괴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육체라고 불리는 연장된 덩어리의 변화가 영혼에 무언가를 부가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붕괴가 분할 불가능한 실체를 붕괴시킬 수도 없다.”
인간에게 오직 영혼만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으로 존재한다.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과 같이 전적으로 분리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만이 전적으로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각주14) 문제는 육체의 소멸이 영혼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나왔듯이 하나의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없다. 영혼은 고유한 법칙을 따르고 육체도 자신의 법칙을 따른다. 영혼은 욕구 · 목적 · 수단을 통하여 목적인의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육체는 작용인 또는 운동의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모든 실체는 신의 예정된 조화를 통하여 서로 합치되어 있다. 작용인과 목적인의 왕국은 서로 조화로운 상태에 있지만 작용인이 목적인의 존재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다른 쪽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 없으면서도 영혼과 육체의 일치와 자연스러운 결합이 존재한다. 모나드는 자신에게 고유한 육체와 더불어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를 형성한다.”각주15) 영혼은 모나드가 그러하듯이 분할될 수 없는 단일한 실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 중에 어느 부분은 소멸되고 어느 부분은 남아서 영원성을 지닌다는 스피노자의 견해도 오류이기는 마찬가지다.
신체의 죽음이 영혼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자연적 사물과 인공적 사물을 혼동해서 발생하는 억측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인간의 죽음을 기계가 부서져서 원동력이 정지됐을 경우와 같은 상태로 여기기 때문에 그릇된 결론에 도달했다. “자연의 기계와 인간의 차이가 단지 큰지 작은지 정도의 차이에만 있다고 생각했다.”각주16) 인공적 기계 장치와 전혀 다른, 자연의 장엄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단적 견해에 이르렀다.
인공적 기계와 자연의 신체는 정도가 아닌 종류의 차이다. 동물과 인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데카르트는 신체를 기계와 동일하게 여김으로써 물체적 신체만을 가진 동물과 신체와 영혼이 합성된 인간을 종류의 차이로 구분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다르다. “동물의 영혼도 정신보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전 우주를 표현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반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 · 보편적 진리를 발견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각주17) 인간과 동물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의 실체가 모두 모나드에 근거하는 이상, 인간과 동물은 종류의 차이가 될 수 없다. 모나드가 그러하듯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 결국 인간과 동물은 영혼과 물체를 모두 가지고 있고, 다만 동물의 영혼은 자기반성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도덕적 성질을 지니지 못한다.
원자화된 존재로서의 인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독립적인 ‘나’를 전제로 존재의 본질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원자화된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를 보여준다. 데카르트가 ‘인간’은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를 제1원리로 삼고 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핵심 논리에 의하면 필연적 귀결이다. 현실의 인간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포함한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 덕이나 정의로 부르는 가치도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행위가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정신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오직 확고한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비추어볼 때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정신 작용은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 타인의 내적 정신 상태를 인식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그만큼 불확실하다. 타인의 생각은 오직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가변적일 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진위 여부 확인도 난감하다. 심지어 말이나 행동을 얼마든지 속이거나 감출 수 있다는 점에서 극도로 불확실하다.
결국 확실성을 가지고 진리를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정신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에서 데카르트 철학의 모든 내용은 시작한다. 이성은 결국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속하고, 이를 정확하게 사용할 때 인간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다. 독립적인 ‘나’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되찾고 세상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규명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근대적 주체 선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고립되고 원자화된 존재로 한정된다.
방법론적 회의와 연역적 방법으로서의 인식
방법론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에서 ‘생각’이 방법론적 회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여기에서 ‘회의’라는 표현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의주의 즉 절대적 진리나 도덕 ·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과 전혀 다른 의미라는 점도 상식에 속한다. 방법론적 회의의 의미는 “나는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각주18) 하는 데 있다. 기존에 진리라고 여기던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함으로써 더 의심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함을 회의의 목표로 삼는다. 의심이 진리에 접근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방법론적 회의다.
우리의 정신은 어렸을 때부터 잘못된 견해를 참된 것인 양 받아들여 왔다. 사회적 통념이 마치 진리인 양 활개 치거나 경험을 곧바로 일반화시켜서 확고부동한 사실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교육이 일방적으로 주입한 견해가 지배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이렇게 얻게 된 사고방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거의 결정적일 정도로 크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에 증명으로 인정한 모든 근거를 거짓으로 던져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할 때 대상은 무한정 확대된다.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를 더 분명하게 정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씩 검토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일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기초의 파괴는 필연적으로 나머지 모든 건물의 파괴를 초래하므로, 우선 전에 가졌던 모든 견해의 근거를 이루는 원칙을 따져 보아야 한다.”각주19) 정신 작용의 오류를 발생시키는 기초를 파괴하면 나머지 부분적 · 세부적 영역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생각을 초래하는 근원적 의심 대상으로 감각, 윤리적 가치판단, 상상력 등을 꼽는다.
방법론적 회의의 필요성에는 스피노자도 공감한다. “오류란 기형적이고 혼란스러운 관념이 내포하는 결핍에서 생겨난다. 잘못된 관념은 허위이기 때문에 확실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만일 잘못된 관념에 만족한다면, 확실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하다.”각주20) 인식이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확실성이다. 확실성은 오직 의심에서 출발한다.
감각을 의심하다
일상생활에 연관된 사고는 감각의 지배를 받기가 쉽다. 르냉 형제의 〈대장간〉은 감각으로 둘러싸인 인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용광로와 작업에 필요한 공구 주변에 모여 있다. 작업장의 일상은 흔히 오감이라고 부르는 각종 감각을 통해 순간순간 삶을 규정했으리라.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시각을 자극하고, 날카로운 쇳소리는 청각을 때린다. 아이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각종 공구가 주는 차갑고 묵직한 촉각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용광로를 지피는 연료 냄새가 작업장에 진동하고 옷에도 찌들 정도로 배어 있어서 후각을 찌를 것이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일상만이 아니라 학문 활동에서도 감각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지금까지 가장 진실하고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나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감각에 의해서 배웠다.”각주21) 감각은 오랜 기간 축적되면서 정신 활동에 가장 익숙하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가장 밀접하고 폭넓게 영향을 주는 만큼 사고 활동에 오류를 일으키는 첫째 원인이 된다. 의심은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므로, 감각이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각주22) 하는 데서 출발한다.
정신 활동에 불쑥불쑥 나타나서 혼란스럽게 하는 불확실한 사고를 방치하고는 이성은 단 한 발짝도 진리를 향해 행군할 수 없다.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대상은 감각이다. 많은 사람이 가장 진실하고 확실하다고 받아들이던 것은 대체로 직접적 · 간접적 감각으로 얻은 내용이다. 대부분 감각에 의존하여 현상에 접근한다.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외래관념 즉 직접 보거나 만지고 들은 경험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토록 분명해 보이는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는 점이다. 시각 · 청각 · 촉각 · 미각 · 후각 등 감각에 속하는 어느 하나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주지는 않는다. 여러 감각이 우리를 속이거나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에 인식을 오류로 이끈다. 가장 확실한 정보처럼 보이는 시각적 경험도 한정된 현상을 지시해줄 뿐 모든 정보를 주지는 못한다. 사물 확인이나 색 구별은 부분적이고 한정된 작업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라고 볼 수 없다. 감각에 기초한 사고가 진리로 인도할 리가 없다. 감각적 · 감성적 사고를 배제하고 철저히 이성적 사고에 기초해야 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정신 활동에서 이성 외에도 감각, 상상과 기억, 오성 등이 영향을 준다. 감각은 상상력에 물체의 상을 새기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기억은 조건반사처럼 기존의 상상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오성을 자극하고, 오성은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상력은 사유운동신경의 힘을 빌러 신체의 외적 감각을 대상에 적용시킨다. 결국 감각, 상상과 기억, 오성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성이 물질 이외의 것을 다룰 경우에는 오성 능력이 도움을 줄 수 없다. 정신적 사유가 오성 능력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물질적 감각은 배제되어야 하며, 상상에서도 가능한 한 감각에 의한 인상이 제거되어야 한다.”각주23) 모든 감각, 혹은 감각에 기초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피노자도 감각이나 감각에 의한 관념을 가장 먼저 의심 대상으로 꼽는다. 감각에 기초한 사고는 눈이나 귀, 피부 등 신체 기관의 기능과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신체가 갖는 한계를 고스란히 포함한다. 감각에 의한 관념은 인식에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 “감각에 의한 관념이 정신에 관계되는 경우, 그 관념은 명료한 것이 못된다. 도리어 혼란스럽다. 신체에 의한 관념은 외부 물체와 신체 자체의 본성을 포함하고 있다. ··· 정신은 사물을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지각할 때 언제나 혼란스럽고 기형적인 인식만을 갖게 된다.”각주24)
라이프니츠도 지금까지 자기 논리의 연장선에서 당연히 감각을 가장 먼저 의심 대상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감각을 의심하여 이끌어내는 결론은 데카르트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색 · 냄새 · 맛 등을 구별하지만, 단순히 감각을 통한 작업일 뿐, 진술 가능한 특징을 통한 인식과 식별은 아니다. ··· 그들로 하여금 이전의 유사한 지각을 상기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맹인에게 무엇이 붉은색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와 유사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명백히 제시하지 못한다.”각주25)
데카르트의 경우 감각을 의심함으로써 도달하는 결론은, 아무리 의심해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상태로서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즉 생각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확신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결론은 다르다. 의심하는 현실의 ‘나’가 아니라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관념의 ‘상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사물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관념은 경험 이전에 형성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물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사물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파악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인과적 정의가 유용하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경험할 때, 단순히 당장 나타나는 상태나 변화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원인을 사고한다면, 이미 경험 이전에 인과관계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게 된다. 그러므로 감각을 의심한 결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데카르트처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아니라, 선험적 관념이다. 영혼 가운데 일부의 영원성을 “정신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상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느끼기 때문”이라고 여기던 스피노자와 비슷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예 노골적으로 플라톤의 상기설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미 정신 안에, 생각 형성 재료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영혼이 지금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전에 이미 명확히 알고 사유했다고 상상하지만 않는다면 매우 확고한 이론인 플라톤의 상기설에 훌륭하게 서술되어 있다.”각주26) 본질적 관념이 완성된 형태로 실재한다는, 이데아론의 편향만 제거한다면 상기설의 기본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감각에서 어떠한 개념도 생길 수 없다는 과격한 주장은 아니다. 감관의 도움으로 외부에서 받아들여 형성되는 개념도 있다. 다만 모든 개념이 외적 감각이라 부르는 감관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오류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 · 실체 · 행위 · 동일성과 다른 많은 사물에 관하여 가지는 개념은 내적 경험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을 의심하다
데카르트는 감각 다음으로 중요한 의심의 대상으로 윤리적 가치판단을 거론한다. 감각의 한계는 비교적 분명한 편이기 때문에 설득이 쉽지만 지혜라든지, 윤리적 가치판단과 같은 경우는 우리를 더 유혹하기 쉽기 때문이다. 뭔가 진지하고 깊이가 있어 의존하기 쉽다. 하지만 지혜나 윤리적 가치판단도 관습적 경험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오랜 기간 공동체 생활을 해오면서, 다양한 개인의 경험이 축적되고 삶의 지혜나 윤리적 가치판단이 형성된다. 그런데 사회적 경험은 아무리 축적된다 해도 진리로 나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특히 사회적 경험과 공동체적 관습은 사회 각 계급이나 계층의 이해관계를 직접 반영하기 때문에 객관적 · 절대적 기준이나 원리의 성격을 가질 수 없다.
지혜나 윤리적 가치판단은 경험과 행동의 축적에 정신이 섞여 있다. 직접 경험이나 감각보다는 정신적 요소가 더 많이 개입되어 있는 혼합물이다. 하지만 정신적 요소가 더 섞여 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순수한 정신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복병일 수도 있다. “많은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유식할 것 같지만,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로 인해 틀린 믿음을 갖게 될 수 있기에 더 무지한 자이다. ···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럴 듯하게 보이는 모든 지식을 내던져 버린다.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만을 믿기로 한다.”각주27)
더 많은 정신이 결합되어 있다고 해서 더 명확한 것은 아니다. 정신적 요소가 상당히 있더라도 진위를 가려내기가 어렵다면 지식이 늘기보다는 오히려 지식을 갉아먹는다. 오직 의심할 수 없는 영역에만 정신 활동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리 의심해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확실한 대상으로 좁혀야 한다.
상상력을 의심하다
상상력은 어떨까? 통념으로 보아 상상력은 감각과 다르게 육체적 경험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순수한 정신 활동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서구 전통에서 상상력은 그리스 · 로마 신화와 긴밀하다. 미술에서도 그리스 · 로마 신화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원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부셰의 〈레다와 백조〉도 그리스 신화를 담은 전형적인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 앉아 있는 여인은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인 레다다. 백조는 아름다운 레다를 유혹하기 위해 변신한 제우스다. 백조를 좋아하는 레다가 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중 다가온 백조를 반기고 있다. 레다의 아름다움에 반한 제우스는 그녀가 백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백조로 변신하여 접근한다.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 레다가 백조의 목을 감싸 안고 부드럽게 깃털을 쓸어주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사랑을 나눈다. 이로 인해 레다는 알을 두 개 낳게 되는데, 그 중 하나에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는 그리스 최고 미녀 헬레나가 탄생한다. 신화 내용 자체가 워낙 에로틱하기 때문에 성적 표현을 원하던 수많은 화가가 같은 신화의 내용을 화폭에 담았다. 기원전과 후의 그리스 항아리 그림이나 로마 신전의 모자이크 복제품에서 발견되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심지어 종교개혁 시기의 틴토레토 그림에도 등장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상상도 기본적으로는 감각에 기초한다. “상상이나 구상이 내 잘못을 알려준다. 보통 내가 무엇이라고 상상할 때 물체적인 모양 혹은 상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미 나는 물체의 본성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망상일 따름임을 확실히 알고 있다.”각주28) 앞에서 감각에 대한 의심을 다룰 때, 데카르트가 지적했듯이 상상은 감각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감각의 영향을 받는 영역은 다양한 기능에 맞게 순수오성, 상상과 기억 또는 감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상력은 사유운동신경의 힘을 빌러 대상에 적용시키면서 감각에 작용할 수 있고, 반면 감각은 상상력에 물체의 상을 새기는 방식으로 상상력에 작용한다. 결국 상상력은 감각과 직접 관계가 있다. 감각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이 모든 요소는 오직 물질 혹은 물질과 연관된 대상을 인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상상을 허구관념 즉 감각에 의한 외래관념을 기초로 하여 우리가 만들어 낸 인위적 관념이라고 보았다.
순수한 정신적 사유를 방해하는 상상이 진리 인식에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나란 무엇인가를 좀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하여 상상력을 사용해 보련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나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참된 것을 더러 보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으므로 잠들어 보자, 꿈속에서는 좀 더 참되고 분명한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특히 신화적 상상력이나 문학적 상상력은 사람들에게 신비한 주문을 하기 때문에 과학적 논증이나 입증 가능한 인식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정신이 그 본성을 분명하게 파악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주의하여 상상력을 멀리해야 한다.
수학적 · 연역적 사고 방법으로서의 이성
데카르트는 감각과 가치판단, 상상을 다 의심스러운 외래관념, 상상에 의한 인위적 관념 등으로 배제하고, 순수한 이성 영역만을 정신 활동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모든 감각이나 가치판단을 제거한 순수한 이성을 보장해주는가? “물리학 · 천문학 · 의학을 비롯해 기타 복합물의 고찰에 좌우되는 학문이 매우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고 말한다면, 대수학이나 기하학 등 매우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만을 취급하는 학문은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상관없이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고, 사각형은 결코 네 변 이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게 명백한 진리는 거짓이나 불확실하다고 의심할 수 없다.”각주29)
감각과 감정이 배제된,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에 있어서 물리학 · 천문학 · 의학조차도 의심스럽다. 복합물의 고찰에 좌우되는 학문은 불확실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 · 천문학 · 의학만 하더라도 물질적 요소를 전제로 한다. 물리학은 물질의 운동, 천문학은 우주라는 물질, 의학은 인간의 육체 등 구체적 물질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성적 · 논리적 요소가 아니라 자연적 · 감각적 요소가 개입될 우려가 있다.
그의 결론은 수학이다. 추리의 확실성과 명증성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의 세계를 수학은 보여준다. 모든 학문은 수학과 기하학에 기초해야 한다. 데카르트가 제1원리로 제시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결론이다. 이를 통해 “명석함과 판명함”이 가능해진다. 명석은 “정신에 나타난 명백한 인식”이고, 판명은 “명석하면서 또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어 그 속에 명석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인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고한 인식 수단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고의 순서를 강조한다. 기하학자들이 가장 곤란한 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상 사용하는 아주 단순하고 쉬운 여러 추리의 긴 연쇄가 정확한 사고 순서에 해당한다.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수학 원리에서 시작하는 인식은 연역적 사고 방법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의심할 수 없는 최초의 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최초에 발견된 원리로부터 그 원리에 의존하는 다른 사물의 인식을 연역하기에 애쓰는데, 이 연역의 과정 전체에서 극히 명백한 것만을 추진해야 한다.”각주30) 인식 범위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사물은 같은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물 가운데 어떠한 참되지 않은 것도 참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연역에 필요한 순서를 항상 지키기만 한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것에도 결국 도달할 수 있고, 아무리 숨겨져 있는 것도 결국은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사실의 인식에는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경험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연역에 의한 길이라고 한다. 경험에서 나온 추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반면에 하나의 인식에서 다른 하나를 추론해내는 합리적 연역 방식이라면 잘못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고찰로부터 나오는 결론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연구 대상이 대수와 기하학뿐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수나 기하학적 논증과 대등할 정도의 확실성이 없는 것과는 씨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고, 연역적 · 수학적 사고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성이 갖는 방법론적 성격을 제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후대의 철학자 가운데 데카르트의 이성 즉 근대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적절한 정식화에 해당한다. 보편적 가치와 같은 목적이 사라지고, 방법론적 · 수단적 차원이 중심인 점에서 도구적 이성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다. 데카르트는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의 이성 개념을 변경했다. 올바름이나 덕을 인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객관주의적 이성관을 모래 위에 세워진 호화로운 궁전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부정한다. 그는 이성을 불확실한 목적이나 대상에서 구출하여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체계화된 방법 문제로, 도구적 이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뒤메닐의 〈데카르트와 토의 중인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 철학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궁정에서 여왕과 토론하는 데카르트를 그렸다. 오른편 탁자에 여왕이 앉아 있고, 건너편에 서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데카르트다. 높은 교양을 갖춘 크리스티나 여왕은 17세기 중반에 일련의 저작을 통해 주목 받던 데카르트를 교사로 초빙했다. 데카르트는 이에 응해 스톡홀름으로 갔고, 이 그림은 여왕과 궁정 인물들에게 철학을 강의하는 장면이다. 재미있는 것은 철학 강의를 하는 자리에, 정작 탁자 위에 펼쳐놓는 것은 두꺼운 책이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에 필요한 도구다. 왼손에 컴퍼스를 든 데카르트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하고 있는 것은 기하학 도형이다. 탁자 위에도 길이를 재는 자와 각도계로 보이는 도구가 놓여 있다. 철학의 출발을 수학적 사고방법에서 찾았던 데카르트를 형상화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감각이나 상상에 의한 사고에 대해서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감각에 의한 지각은 “감각에 의해 손상되고 혼란해져 지성적 질서 없이 나타나는 개별 사물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나는 이런 지각을 확실치 않은 경험에서 오는 인식이라고 부른다.”각주31) 마찬가지로 상상 역시 감각에 의한 속견의 단계로서 포괄성이 결여된 천박한 지식에 불과하고 단지 유용할 뿐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연역적 이성을 최종 인식방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성이 감각보다 우월한 것은 확실하다. 감각이 개별 지각이라면 이성은 표상과 공통관념 형성에 의한 인식이다. “이 개념은 사물의 특질에 관하여 공동관념 및 충분한 관념을 갖는 데서 형성된다. 이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감각이 우연의 성격을 지닌다면 “이성의 본성은 사물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추리를 통한 간접 인식인 이성은 연역의 논리를 통하여 더 많은 관념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의하면 이성은 공통 관념을 만드는 데 머무를 뿐 모든 존재의 전 체계에 관한 포괄적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 우연적 · 개별적 지각인 감각, 공통 관념 형성에 한정되는 이성을 넘어서야 하다. “두 인식 이외에 제3의 인식 즉 직관이 있다. 직관은 신의 형상적 본질에 관한 충분한 인식에서부터 사물의 본질에 관한 충분한 인식으로 옮겨간다.” 직관은 공통 관념을 넘어서 원리를 직접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존재의 전 체계에 관한 포괄적 지식을 가능케 하고, 나아가서는 개체가 실체인 신의 변용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인식방법이다.
라이프니츠는 이성이 데카르트처럼 방법론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일관되게 형이상학의 복원을 주장한다. “모든 특수한 자연 현상이 수학적 ·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물체적 자연과 기계학의 일반 원리는 기하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적이고, 현상의 근거로서 형상 또는 분할 불가능한 본질에 속한다.”각주32) 세계의 인식은 수학적 원리보다는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가능하다. 형이상학이 신과 맞닿아 있는 이상 인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진리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식은 인간의 지식과 신의 지식으로 구분된다. 인간은 물질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정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온전하게 이성적 진리만을 가질 수 없고, 사실의 진리와 혼재된다. 하지만 신에게는 모든 진리가 이성의 진리다.
이성을 사용할 때도 수학적 원리보다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에 주목해야 한다. “이성적 추리는 두 가지 원칙에 기인한다. 첫째 원칙은 모순율인데, 모순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거짓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참이라고 판단한다. 둘째 원칙은 충족이유율인데, 어떤 것이 왜 이래야 하고 달리 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하여 충분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실이나 명제도 참된 것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없다.”각주33)
모순율은 모순된 상태에 있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두 명제 모두가 거짓이거나 둘 중의 하나만 참일 수 있다. ‘A는 ~A가 아니다’라든지 ‘A는 B임과 동시에 ~B일수 없다’는 규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성적 인식은 모순율에 저촉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진리는 논리적 합리성을 요구한다. 충족이유율은 존재와 변화의 근본 원인을 밝히는 작업만이 진리로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떠한 사물도 이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명제도 근거 없이는 참이 될 수 없다.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을 통해 사실의 진리를 규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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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합리론의 존재론과 인식론 – 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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