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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와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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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이성에서 의지의 실현으로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경계선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합리론과 경험론을 거쳐 독일 관념론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합리적 이성이었다. 이성이 경험이나 감성과 맺는 관계에 따라 이론의 경향이 서로 다르지만, 인식이 도달해야 활 목표는 결국 이성의 절대화와 합리성에 기초한 계몽주의였다. 특히 헤겔에 이르러 이성주의는 정점에 도달했다. 계몽적 이성에 기초하여 미신과 종교가 바탕이 된 비합리적 · 마법적 사고에서 탈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 사회도 이에 맞도록 개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성의 승리가 모든 비합리적 사고와 행태를 단절시키기는커녕 또 다른 광기와 공포라는 괴물로 등장하면서 이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이성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아예 부정되거나 혹은 경험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요소로 지목된, 감성 · 직관 · 상상력 · 환상 등에 새롭게 관심을 갖는다.

이성의 절대화로 치닫던 근대 철학을 다양하게 비판하는 과정에서 현대 철학의 문이 열린다. 크게 구분하자면 두 방향이다. 하나는 이성 자체를 회의하고 극복하는 방향, 다른 하나는 이성에 기초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둘은 또 다시 세분화된 경향으로 나뉜다. 전자는 이성에서 의지로 방향 전환하려는 생철학과 무의식 영역을 통해 의식 자체를 극복하려는 정신분석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이성의 사변적 성격을 실증주의 · 실용주의를 통해 극복하는 경향과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실천을 통해 극복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생철학(生哲學)은 이성주의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근대 철학에서 비합리적 영역으로 여겨 철학 밖으로 던져버린 의지에 주목한다. 이들이 주목하는 의지가 삶에의 의지라는 점에서 흔히 생철학으로 부른다. 생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를 시작으로 딜타이(Dilthey, 1833~1911), 니체(Nietzsche, 1844~1900), 베르그송(Bergson, 1859~1941) 등을 꼽을 수 있다. 철학자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먼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삶은 합리적 · 과학적 이성으로는 접근하기 어렵고, 오히려 이성에 의해 은폐된다는 공통 전제에서 출발한다. 삶이란 항상 역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사물이나 현상을 놓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삶의 본질과 기초이자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통로로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생의 의의 · 가치 · 본질은 합리적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 체험이나 직관에 연관된 의지에 기초할 때 파악 가능하며, 이를 통해 규명된 충실한 삶 속에서 인간의 궁극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생의 의미, 생과 의지의 관계, 욕망 · 고뇌의 역할 등 세부 내용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이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괭이질 하는 사람〉

밀레, 18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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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Millet)의 〈괭이질 하는 사람〉은 생철학자들이 주목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기존의 근대 미술이 대체로 회화적으로 구현하고 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에 자신감이 넘쳤고, 캔버스를 꿰뚫을 듯한 강한 시선은 그 상징이었다.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계몽을 내용 속에 담고자 했다. 또한 정신적 주체인 인간이 자연을 관조하거나 숭고해지는 감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여기저기 돌무더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부인 듯하다. 힘든 일상의 삶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세밀한 표현이 생략되어 있지만, 반쯤 벌린 입에서 노동에 지친 숨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다. 허리가 부러질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이제 자연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무대다. 구체적 삶의 과정 속에서 생생한 감정과 의지를 담아내려고 한 점에서 생철학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생철학은 근대를 상징하는 이성의 합리화, 절대화에 도전하는 물고를 텄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 연장선에서 당시 미술의 주제나 표현 방식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근대 미술과 현대 미술의 경계선에 서 있기도 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모든 세계를 표상으로 이해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인식하는 모든 존재에 해당되는 진리다.”각주1) 독립적인 세계 자체의 인식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지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세계는 인간이라는 표상 주체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시간 · 공간 · 인과와 같은 ··· 생각이 가능한 모든 경험 형식” 속에서 즉 주관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는 표상이다. 큼과 작음, 신속함과 완만함 등은 정신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의 성질일 수 없고, 정신이 지각하고 형성하는 관념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규정한 버클리의 문제의식을 적극 받아들인다.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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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이라는 경험 형식을 통해 칸트의 선험성 논리도 수용한다. “시간과 공간은 모두 독립하여 물질 없이도 직관적으로 표상할 수 있지만, 물질은 시간과 공간 없이는 표상할 수 없다.” 적어도 인식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결합해야 비로소 물질이 생긴다. 모든 객관의 본질적 · 보편적 형식인 시간 · 공간 · 인과성은 객관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기에 선험성을 인정할 수 있다. 선험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미 객관은 주관적 의지를 포함한다.

〈안개 속에 솟는 태양〉

모네,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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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Monet)의 〈안개 속에 솟는 태양〉은 화가의 주관적 시공간 개념이 어떻게 대상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런던의 템스 강을 배경으로 태양광선에 시시각각 노출되는 국회의사당 모습을 담은 연작 중의 하나다. 모네는 같은 대상이 해가 뜨는 아침부터 한낮, 해질녘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다른 인상을 주는지를 탐구했다. 이 그림은 짙은 안개를 뚫고 아침 태양이 비치는 풍경이다. 주관적 시공간 개념 없이 풍경을 마주하면 사물을 분별하기는 사실 어려울 것이다. 이 그림을 보더라도 붉은색과 검푸른색 계통의 색을 무질서하게 배치해놓은 느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주관적 시공간 개념을 전제할 때 사물간의 경계와 거리 등의 조합이 이루어지고 인식에서 객관 세계가 형성된다. 객관이 주관을 이미 자체 내에 포함하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주관적 선험성을 설정한 부분에서 칸트는 옳았다. 하지만 곧바로 오류의 길로 들어선다. 시간 · 공간 · 인과성이라는 선험적 영역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관과 분리된 물자체를 설정하는 결정적 오류에 빠졌다. “세계는 한편으로는 철두철미하게 표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의지이기도 하다. 이 양자의 어느 것도 아니고 객관 자체라고 하는 실재는 꿈에 나타나는 괴물이며, 철학에 있어서 도깨비불이다. 칸트의 물자체도 유감스럽지만 그러한 실재로 퇴화해버리고 말았다.”

칸트는 물자체를 인식이 접근할 수 없는 독립 영역으로 규정하여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킴으로써 선험성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했다. 특히 물자체와 현상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오류가 더 심각해진다. “인과관계는 언제나 여러 객관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인과관계란 경험세계 속 사건들 사이의 관계다. 그런데 칸트는 물자체를 경험을 초월한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경험세계에 속하는 현상과 인과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인과관계를 주관과 객관 사이의 관계로 설정한 피히테와 헤겔은 더 큰 오류에 빠진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전제에 서기 때문에 외계의 실재성에 대한 어리석은 논쟁이 벌어진다.” 피히테와 헤겔의 관념론은 객관을 주관의 결과로, 실재론은 반대로 주관을 객관의 결과로 설정하는 오류를 보인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객관은 이미 주관을 전제로 한다. 객관 세계는 주관적 표상과 뗄 수 없는 관계다. 따라서 둘 사이에 원인과 결과 관계의 설정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그간 실재론과 관념론은 서로 다른 범주를 혼동하는 바람에 이론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주관이란 나의 의지다. 쇼펜하우어는 욕망 · 집착 · 기대 등을 통해 나를 행동으로 몰아넣는 근원적 욕구 전부를 통칭하여 ‘나의 의지’라고 불렀다. 객관이 주관을 전제로 하고, 주관이 본질적으로 의지에 근거할 때 물자체는 주관적 의지와의 통일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니체, 목적론적 · 기계론적 자연 이해 비판

니체는 세계의 배후에 실체가 있어서 세계를 만들고 움직이게 한다는, 서양 주류철학의 발상을 부정한다. “나 또한 배후 세계론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피안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인간의 피안, 진리에 대해서였으리라. 내가 창조한 이 신은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다.”각주2) 절대 존재 혹은 절대 원리가 있어서 세계를 창조하고 자연 법칙을 부여하며, 인간의 삶을 관장한다는 사고야말로 모든 오류의 근원이다.

〈태고의 날〉

블레이크, 17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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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Blake)의 〈태고의 날〉는 배후 세계론자의 사고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격화된 모습의 절대자가 세계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손에는 거대한 컴퍼스를 들고 있다. 세계의 배후에 절대자를 설정하는 몇몇 방식이 있다. 중세 철학에서는 신학과 결합하여 외적 형식만이 아니라 내적 정신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절대자를 상정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그림은 그리스 철학을 비롯하여 근대 철학에 와서 부각된, 절대자를 우주 설계자로서 상정하는 관점을 이미지화했다. 컴퍼스는 우주의 설계자가 만든 세계의 질서 · 법칙 등을 상징한다.

니체가 보기에 배후에 절대자를 설정하는 모든 시도는 문학적 상상력에 불과하다. 모든 영원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비유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일한 것, 완전한 것, 확고한 것, 충족된 것, 영원한 것에 대한 생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절대자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사상일 뿐이다. 절대자에 대한 가르침은 거짓이며, 인간을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악이다.

우주를 절대화시키는 편견도 용납될 수 없다. 먼저 우주를 생명체로 이해하는 입장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만물을 유기체라고 부름으로써 “다만 지각 위에서 인식했을 뿐인 지극히 파생적 · 말기적이며 희귀하고 우연적인 것을 본질적 · 보편적 · 영원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각주3) 유기체는 부분과 전체가 스스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통일적 완결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우주를 유기체로 규정함으로써 우주가 완결성 · 통일성 · 보편성을 지닌 존재라는 거짓을 유포시킨다. 우주는 온갖 우연적 현상에서 나온 파생물일 뿐이다.

다음으로 우주를 기계로 이해하는 입장을 경계해야 한다. “우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구성된 것이 아니다. 기계라고 부르는 것은 우주의 명예와는 거리가 멀다.” 기계란 법칙적 운동을 상징한다. 우주는 법칙을 가진 필연의 영역이 아니다. 달의 규칙성은 예외여서, 그와 같은 정연한 순환 운동이 어디나 있는 것으로 예상해서는 안 된다. 우주의 전체 성격은 영원히 계속되는 혼돈이다. 자연에는 절대적 법칙에 근거하여 명령하는 자도, 복종하는 자도 없다. 그러니 위반하는 자도 없다.

그러므로 세계를 영원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거짓이다. “영속적 실체는 없다. ··· 언제 우리는 자연에 관한 비신격화를 완성할 것인가?” 엄격한 의미에서 실재 개념에 일치하는 것은 없다. 다만 논리 전개라는 인식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 한계를 벗어나 실재로 규정하고, 우주를 완전함 · 아름다움 · 고귀함으로 규정하는 모든 시도는 부당한 도덕적 강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술수다. 우주는 완전하지도 아름답지도 고귀하지도 않고 이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자연을 완전성을 갖춘 실재로 규정하고, 여기에서 출발하는 자연법을 근거로 도덕적 판단에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인류 의식을 지배해왔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말 그대로 자연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더 자연적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더 이상 무구 · 이성 ·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며, 자연을 경멸하는 대신 자연 가운데서 한층 친근하고 기분 좋게 느낀다. 자연이 덕에로 열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존경한다.”각주4) 근대 관념론 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고질적 병폐에 해당하는,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모든 견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에 가치를 부여한 목적 · 통일 · 존재라는 범주를 뽑아내고 자연을 무가치한 것으로 둘 때 자연을 자연으로서 접할 수 있다. 그리하여 허위의 강제에 불과한, 필연성과 법칙이라는 두 가지 통속적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로서의 세계

생철학은 다윈(Darwin)의 《종의 기원》을 분기점으로 확산된 진화론과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생철학은 한편으로는 현실과 감성을 경시하고 피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철학의 허구성과 위선을 고발하고자 했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을 반영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 진화의 한 결과로만 이해하는 진화론 관점과도 명확히 분리하려고 했다.

베르그송은 무기물과 유기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합리론과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무기물과 유기물이 동일함을 인정한다.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의 근본적 동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 무기물을 통해 생물의 진위를 더 깊이 알 수 있다.”각주5) 화학을 통해 무기물과 유기물의 연관성을 설명한다. 화학은 유기물을 합성시킬 뿐 아니라, 세포 분열과 원형질 순환과 같은 유기조직의 변화를 도형으로 재현해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화학과 생물학, 특히 현미경을 통한 세포구조 연구의 영향을 받았다. 화학적 반응을 매개로 한 세포 원형질 운동, 세포핵과 세포질의 작용에 의한 세포 분열의 발견은 무기물과 유기물이 연관되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목적론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 온 것이다. “목적론의 과오는 개념을 너무 먼 데까지 확대 적용하는 데 있다.” 가장 노골적 형태의 목적론인 신학은 물론이고, 정신을 감정이나 행동과 분리시키고 나아가서는 현실을 정신의 실현으로 바라보는 합리론과 관념론 방식의 목적론도 과학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생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을 동인으로, 행동을 결과로 이해하는 합리론과 관념론에 비판적이었다. “본래 우리는 오로지 행동하기 위해서 생각한다. 지성은 행동의 틀에서 찍어낸 대로다.” 사변이 사치인 반면, 행동은 필요이기 때문이다.

생철학이 기계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계론적 세계 이해를 가장 경멸했다. 기계론이야말로 이성으로 세계와 인간을 모두 설명하려는 오만 덩어리였다. “생철학은 기계론과 목적론을 동시에 앞지른다. 그러나 기계론보다는 목적론에 더 가깝다.”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합리론과 관념론의 자연관을 비판했지만, 인간을 자연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로 규정하려는 경향은 합리론이나 관념론 못지않게 강했다. 인간에게 정신 이전에 행동이 중요하지만,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목적이 결정되어야 한다. 생명 유지를 위한 목적이 우선한다. 전통적 목적론은 생명을 지성으로부터 설명하기 때문에 생명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켰다. 적어도 인간 지성이 진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전통적 목적론은 과학적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성이 아닌, 삶의 의지로서 생명 자체에서 출발하는 목적만은 모든 것에 선행할 수 있다.

인간 본질을 의지를 통해 규명함으로써 진화에 대한 기계론적 이해를 넘어서 목적론적 진화 개념인 ‘창조적 진화’로 나아간다. 생물 기관은 사용 정도에 따라 변이 능력이 있다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을 수용한다. “변이는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에서 생긴다. ··· 변이는 또한 의식이나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다.” 자연계의 일반적 진화와 인간의 진화는 같지 않다. 인간의 진화는 의식이나 의지를 내포하면서 목적론적 양상의 창조적 진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의식과 의지는 합리론과 관념론이 주장하는 이성이나 이념처럼 필연성 · 법칙성의 영역이 아니다. 우연이 진화에서 적극적 역할을 한다. 의지와 행동은 필연적 영역이 아니라 우연적 · 주관적 선택 영역이다,

생에 대한 의지로서의 인간

쇼펜하우어, 생에 대한 의지와 이기심

쇼펜하우어는 정신을 매개로 보편적 존재인 인간에 접근하는 합리론과 관념론을 비판한다. “탐구자 자신은 세계 속의 개체로서 존재한다. 인식 작용은 표상으로서의 전 세계를 제약하는 담당자이긴 하지만, 철저하게 신체에 매개되어 있으며, 신체의 감정적 움직임이 오성에게는 세계를 직관하는 출발점이다.”각주6) 인간은 개체로 존재한다. 현실에서 직접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개별 존재일 수밖에 없다. 보편적 특징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시도는 허구적이다. 인간의 모든 기능과 특성은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 신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신조차 신체나 감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고갱, 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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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Gauguin)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순간순간 신체를 매개로 삶을 꾸려가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른편 끝의 아기 탄생에서 시작하여 점차 왼편으로 이어지는 순서다. 모든 단계에서 신체는 가장 본원적 영역이다. 신체는 삶을 유지하는 모든 행위와 연결된다. 또한 왼쪽 위에 있는 석상에서 보듯이 그 과정에서 초월적 영역처럼 여기는 종교와도 관련 있다. 그리고 왼쪽의 노파처럼 신체가 노쇠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신체와 감정에 의존하여 사는 이상 주체는 개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상호작용이 있겠지만 순간순간 개별 인간의 의지와 선택이 전제가 된다.

삶을 향한 개체의 의지가 핵심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큰 차이가 없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개별자가 본래 지니는 의지가 아니라, 오직 이차적 특징인 인식 능력 정도에 있을 뿐이다.” 인간과 동물은 핵심적 · 본질적 영역이 아니라 단지 부차적 · 이차적 영역에서 구분될 뿐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의지라는 본질 영역에서 인간과 동물은 차이가 없다. 감정과 의지의 파생물인 인식 능력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정도다. 이성에 기초한 인식 능력은 동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높지만, 정신 능력조차도 “오직 더 큰 뇌수의 발전을 통해, 즉 신체의 차이를 통해서만 입증”된다.

동물도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오성을 갖고 있다. 오성이란 “인과성에 대한 인식, 결과에서 원인으로의 이행 그리고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인데, 이는 동물에게도 나타난다. 동물도 어떤 행위를 할 때 초보적이나마 행위에 따른 결과를 염두에 둔다. 이 직관이야말로 동기에 따라 운동하게 하고, 나아가서 먹을 것을 찾는다든지, 적어도 어느 물건을 손에 쥐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오성의 예민함 정도나 인식 범위가 인간과 다를 뿐 원리적으로는 인과를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인간에게만 따로 있는 인식 능력은 반성이다. 반성적 사고는 직관적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과 성질을 갖는다. 직관은 대상을 인식하지만, 반성은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인식이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반성적 사고야말로 인간 의식이 동물 의식과 완전히 구별되는, 인간의 행동 전체를 동물의 행동과 다르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다.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유의미한 시간은 현재다. 삶 이후의 시간이나 삶 이전의 시간은 현실적 의미가 없다. 현재가 삶과 의지를 규정한다. 미래나 과거는 개념 속에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 사는 사람도 없고, 미래에 살 사람도 없다. 현재만이 모든 생의 형식이고, 생으로부터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생의 확실한 소유다. “의지에 있어서 생은 확실하고, 생에 있어서 현재는 확실”하다.

생에의 의지가 자기 유지를 향하는 한 개체를 뛰어넘는 보편적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는 도처에서 개체의 다원성으로 나타난다.” 자기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이용 · 소유 · 지배하려 하고 이에 방해되는 것을 절멸시키려 한다. 생이란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에 다름 아니다. 삶을 욕망하고 집착하는 의지는 보편적 · 필연적 법칙과는 무관하다. 맹목적 욕구에 기초하는 삶은 고통스럽다. 욕구는 결핍에서 생기는데, 충족은 한이 없기에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결핍감만이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 자기 욕구에 반하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비록 순간적이라 하더라도 욕구로 얻었다고 여기는 것에는 배타적 소유욕을 드러낸다. 여기에 인간 이기심의 근원이 있다.

〈아벨의 죽음〉

블레이크, 18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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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의 〈아벨의 죽음〉은 채워질 수 없는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고, 그 결과 스스로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인간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의 맏아들인 카인이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 아벨을 죽이고 괴로워하며 도망치는 장면이다. 카인의 행위 역시 결핍을 채우고 필요를 충족시켜 욕구하는 것을 독점하려는 인간 의지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그러므로 의지에 의한 세계는 고통과 혼동, 열정, 악이 항상 동반될 수밖에 없다.

이성 중심의 합리론과 관념론이 인간 본질을 보편 법칙과 질서에 연관시키면서 조화를 향했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중심으로 무질서와 고통을 드러낸다. 세계의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가정은 성립할 수 없다. 철학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조화와 균형이 아니라 삶의 고통이다. 그가 보기에 철학은 개별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일시적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딜타이, 삶의 객관화로서의 객관 정신 이해

딜타이도 이성을 벗어난 삶의 영역을 강조한다. “삶은 이성의 법정에 소환될 수 없다. 시간 안에서 생성된 작용을 통해 파악될 수 있기에 삶은 역사적이다.”각주7) 실질적 삶은 체험에서 분리된 추상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 없다. 삶의 배는 쉬지 않고 끝없이 요동치는 물결에 실려 멀리 이끌려 간다. 우리는 어려움을 감내하거나 새로운 의욕 속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삶을 산다. 단절이나 틈이 없이 체험이 항상 이어진다는 점에서 삶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역사적이다.

딜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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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처럼 삶이나 철학에 정언명령을 개입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은 자연 연구처럼 당위가 아닌 체험과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 “자연 연구가와 심리학자는 존재하는 것만 보려고 하지, 존재해야 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근대 철학이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설정한 존재해야 하는 것에 매몰되었기에 생겨났다. 삶의 체험에서 분리될 때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자기 기반을 스스로 부정한 셈이 된다. 학문 발전은 체험 심화와 체험 내용을 충분히 해명하려는 데서 나온다. 체험 과정에서 표현된 것을 이해함으로써 삶의 객관화로 나아간다. “정신과학은 체험 · 표현 · 이해의 관련 위에 근거한다.” 체험과 이해를 통해 다양한 삶을 객관화시키고 여기에서 정신적인 것을 추출하는 작업이야말로 정신과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체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철학은 개별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지만, 개별자의 삶은 다른 개별자의 삶과 연관되면서 성립하기에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연관으로서의 삶을 고찰해야 한다. “삶, 삶의 경험, 정신과학은 지속하는 내적 연관과 상호적 교통 위에 존립한다.” 삶과 삶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사람이나 사태가 내게 대상에 불과할 수는 없다. 한 쪽에는 나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사람과 사물이 있고, 그 중간에 개개의 사실적 삶의 관계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여러 삶의 상태 즉 희망 · 고양 · 압박감 · 공포 등의 상태가 생성된다. “사물과 사람들은 자기에게 항상 어떤 요구를 던지고 있고, 따라서 자기의 현존재 속에 늘 어떤 자리를 점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나에게 아무런 연관이 없는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지원자이거나 방해자, 혹은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대상이기 마련이므로 연관으로서의 삶이 본질적이다.

개별적 삶과 삶이 지속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 이해는 근대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개념적 사유 과정이 아니다. 헤겔에게 인간은 이념에 의해 구성된 객관 정신이었기에 사변적으로만 개념화될 수 있고, 시간적 · 경험적 · 역사적 관계는 이념적 구성의 배후로 은폐되어 버린다. 딜타이가 객관 정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객관 정신을 부정하면 정신과학이 설 자리도 사라진다. 문제는 어떠한 객관 정신인지다. 삶의 객관화로서 객관 정신에 주목한다. “삶의 실재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삶 안에는 정신적 연관의 총체성이 작용하고 있다.” 객관 정신은 개념이나 형이상학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주어진 개인의 삶을 분석하여 정신을 객관화시키는 방식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객관 정신은 직접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를 전개하는 실존적 인간의 삶에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삶과 삶이 연관을 맺고, 삶이 삶을 파악한다. “모든 각각의 삶의 표출은 객관 정신의 왕국에서 하나의 공통적인 것을 재현하고 대표한다.” 단어와 문장, 몸짓과 공손함을 표시하는 방식, 예술작품과 역사적 행위 등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떤 공통성이 삶과 삶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별자는 항상 공통성의 범위 내에서 체험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며, 오로지 그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개별자의 삶을 이해하고 객관화할 수 있다. 딜타이는 이를 ‘추체험’으로 규정한다. 삶에서 표현된 심정 상태를 내면화해서 객관화시키는 작업 즉 추체험을 이용한 재발견을 통해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생을 맹목적 의지로 규정했다면, 딜타이는 생을 정신적 · 역사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의지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생과 의지에 객관적 · 학문적 탐구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강화했다.

니체, 의지를 통해 얻는 인간의 독립성

니체는 인간에게서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려는 합리론과 관념론을 비판한다. “이제까지 영혼은 육체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그 경멸은 최고의 선이었다. 영혼은 육체가 굶주림으로 인하여 야위고 수척해지기를 바랐다. ··· 그러나 굶주려 야위고 수척해진 것은 오히려 영혼이었으며, 잔혹은 영혼의 기쁨이었다.”각주8) 딜타이처럼 니체도 다윈의 진화론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진화론적 인간관을 넘어서려고 한다. 먼저 정신의 근거를 육체에서 구한다는 점에서는 진화론의 성과를 받아들인다. 대지와 대지에 속한 육체는 인간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뿌리다. 뿌리가 뽑히면 나무가 살 수 없듯이 육체야말로 정신의 근거다. “영혼이란 다만 육체 내부에 속한 그 무엇을 나타내는 언어에 불과하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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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육체의 도구다. 흔히 정신의 독립성을 근거로 자아를 규정하고 이 말에 긍지를 갖지만, “그러나 더 위대한 것은 그대들의 육체며, 육체의 커다란 이성이다. 이 커다란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한다.” 정신은 육체와 무관한 사변적 영역이 아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도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삶과 행위에서 성립한다. 육체와 감성을 부정하고, 피안에 희망을 두는 형이상학적 인간 이해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사실상 없애버리는 진화론적 인간 이해에 대해서도 투쟁한다. 인간이 진화의 길을 걸어왔고, 육체와 감각의 많은 부분이 동물과 맞닿아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통점이 곧바로 인간과 동물이 같음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성에서 찾는 발상이다. 진화론과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뇌 물질과 정신이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육체와 무관한 이성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음을 니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니체는 의지를 근거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한다. 인간의 자유는 이성이나 지식이 아닌, 의지와 결단의 문제다. 특히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초극 의지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다. ··· 여태까지 생을 가진 자는 자신을 뛰어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창출해 왔다. 그대들은 이 위대한 조류를 거슬러 썰물이기를 원하며, 인간을 뛰어넘기보다는 오히려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정신의 근거인 감각이나 육체의 배후에는 진정한 자기 즉 의지가 있다. 의지를 통해 동물과 같은 맹목적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초극 의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이 자유에 있음을 깨달고 목적의식적으로 미래를 창조하는 일이 가능하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의지는 초월의지이자 권력의지이기도 하다. “왜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서도 예외인가 ··· 모든 변화의 궁극적 근거나 성격을 그 속에서 재인식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왜 바로 예외나 행운에 유리한 도태가 생기지 않는지를 밝히는 길잡이를 우리에게 부여한다.”각주9) 인간은 초월의지와 함께 자신의 삶을 물론이고 주변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지를 지니고 있다.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갖기에 집단에 매몰되지 않는 개인적 가치가 실질적 의미를 지닌다. 상호성을 인간관계의 무조건적 원리로 삼으려는 도덕률은 비속하고 졸렬한 입장이다. “여기서는 여러 행위의 가치 등가성이 서로에게 전제되어 있고, 행위의 개인적 가치는 단순하게 무효가 되어 있다.” 집단의 필요를 넘어 주변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개인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된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모두 생과 의지를 강조했지만 구체적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생의 실체는 생에의 맹목적 의지였다.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서의 의지였다. 맹목적 욕구와 집착에 기초한 의지이기에 그 결과로 이루어진 세계는 결핍감에서 오는 고뇌가 지배한다. 금욕과 무의지의 경지에 들어설 때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생철학은 부정적 성격을 보였다. 하지만 니체의 생에의 의지는 초월의지와 권력의지를 통해 창조적 성격으로 변한다. 초월을 통해 계속 변화한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허무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니체의 허무는 염세적 허무가 아니라 창조를 향한 허무이고, 맹목적 허무가 아니라 권력의지를 통해 더 큰 힘을 추구하는 성장과 강화로서의 허무다. 니체는 능동적 생철학을 향한 길을 열었다.

베르그송, 생명의 비약, 진화의 목적으로서의 인간

베르그송 역시 진화론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되, 진화론을 넘어서는 인간학을 추구한다. “지성이든 본능이든 둘 다 엄격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하나의 경향이지 완성품은 아니다.”각주10) 인간에게 지성과 본능은 서로 독립된 완성품일 수가 없다. 육체적 본능에서 분리된 지성을 추구한 합리론도 문제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성을 본능에 의한 것만으로 이해하는 유물론도 지성과 본능을 독립적 완성품으로 사고했다는 점에서 같은 오류에 해당한다.

베르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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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본능에는 지성이, 실제적 지성에는 본능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는 의식과 뇌물질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의식이 신경중추의 신호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합리론은 설득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의식과 뇌물질의 상호 의존성은 여기에서 끝난다. “의식의 운명이 뇌물질의 운명에 얽매여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의식은 자유 자체다.” 의식은 물질 너머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물질 너머로 나아가려면 불가피하게 물질을 가로질러야 한다. 가로지르는 과정에서 의식은 물질과 관계를 맺는다.

물질을 가로질러 물질 너머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의식의 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은 모두 진화의 산물이지만 인간은 특별하다. “단순히 정도의 차이뿐만 아니라, 본성의 차이를 보여준다. ···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이며 목적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이러한 특별한 의미에서다.”

의식의 역량, 언어, 사회생활 등이 인간과 동물의 본성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다. 동물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습관적이다. 특정 개체가 습관의 벽을 허물 수는 있으나, 무의식적 동작에 불과하기에 일회적이다. 인간은 두뇌의 우월성에 기초하여 낡은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무의식적 동작을 의식적 동작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식이 처음에는 물질 흐름에 끌려가다가 언어 작용과 맞물리면서 물질의 한계를 넘어선다. 마지막으로 사회생활은 언어가 사고를 비축하듯이 개인의 노력을 모아 저장함으로써, 평균 수준을 확정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단번에 그 수준에 올라서도록 한다. 베르그송의 생철학은 창조적 진화라는 발상을 통해 생과 의지의 의미를 ‘생명의 비약’으로 규정한 것이다.

문명의 건설도 인간만이 지닌 뛰어난 의식과 언어, 사회생활의 작용 때문이다. 모네(Monet)의 〈생라자르역〉은 근대 문명이 이룩한 성과를 상징한다. 기계문명의 상징으로 느닷없이 다가온 기차는 19세기 유럽인에게 전율을 안겨주었다. 시인 하이네(Heine)는 기차를 처음 보고 “무시무시한 전율, 결과를 예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 혹은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느낌”이라고 했을 정도다.

〈생라자르역〉

모네,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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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하이네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준다. 연기를 뿜어대는 기세가 당장이라도 그림을 뚫고 앞으로 달려나올 듯하다. 기차가 세상의 주인공이고 주변에 서성이는 몇몇 사람이 오히려 풍경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엄청난 크기와 증기기관이 뿜어내는 자욱한 연기 그리고 굉음···. 인류가 본 가장 큰 움직이는 물체였을 기차는 새로운 문명의 전주곡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과학과 문명의 발달에는 인간만이 지닌 뛰어난 두뇌능력, 특히 언어를 통해 축적된 사고와 사회생활을 통해 축적된 개인의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육체나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는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 행위에 관계한다.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것이 행하는 행위와의 관계를 이르는 것이다. 그 관계는 바로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로 인해서 정의할 수는 없다.”각주11) 합리론이나 관념론은 자유의지의 의미를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어떤 행위 외에도 그와 상반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본래 지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인간의 능력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자유가 현재를 벗어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란 본질적으로 개별적 · 구체적 자아가 현재 시점에서 행하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본래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자유는 육체와 연관을 맺는 내적 감정과 갈망에 부합하며 경험과 생에 대한 관념에 상응하는 개인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현재 삶과 무관한 영역에서 자유의 원리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칸트의 오류는 자유를 생생한 삶에서 분리시킨 데 있다. 칸트는 자유를 하나의 실체로 규정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원리로서 주장한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이는 시간과 공간을 혼동해서 생긴 오류다. “자유에 관한 한 그것을 명백히 하려는 모든 요구는 결국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음 문제로 귀착한다. 즉 시간은 공간에 의해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가?” 현재진행형으로 흐르고 있는 시간을 공간이 표현할 수 없다. 연장은 분해될 수 있지만 지속은 분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정언명령에서 드러나듯이 자유를 마치 모든 시간에 걸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동질적 공간처럼 여긴다.

하지만 자유는 공간이나 사물이 아니라 진행의 문제다. 현재진행형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다. 그러므로 자유는 당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과거로부터 자유의지의 당위성을 이끌어오는 방식은 무의식 중에 진행을 사물로, 지속을 연장으로 변형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러한 자유 이해는 자아의 활동성을 고정된 것으로 응결시킴으로써 자발성이 타성으로, 자유가 필연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결국 칸트의 자유가 실제로는 인간에게 자유가 아닌 억압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비판이다.

체험과 직관을 통한 인식

쇼펜하우어, 직관의 확실성과 의지의 객관화

쇼펜하우어는 중요한 것은 의지며 지성은 2차적 · 부수적이라고 단언한다. “지성은 의지의 결정을 후천적 · 경험적으로만 안다. 지성은 당면한 선택에서 의지가 어떻게 결정을 하는지에 관한 재료를 갖고 있지 않다.”각주12) 인식이 앞서고 의지가 뒤따른다는 이성 중심주의는 오류다. 반대로 욕구와 의지가 우선한다. 인식 작용은 “머리가 몸통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의지에서 나와 있는 것” 즉 의지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의지를 객관화한 것이 인식이라는 점에서 인식은 의지에 봉사해야 한다.

오성과 이성은 매우 제한적 기능만을 한다. 오성은 단지 하나의 기능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뿐이다. 오성의 과정이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하게 응용하더라도 결국은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기능에 한정된다. 이성도 하나의 기능 즉 개념 형성 기능을 가질 뿐이다. 개념은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고 오성이 수용한 것 안에서만 작업한다. 이성이 내용 없는 조작 형식일 뿐이라는 점에서 수동적 기능에 한정된다.

인식에서 가장 풍부하고 중요한 영역은 직관이다. “이성 개념은 모든 내용을 오로지 직관적 인식과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얻는다.” 오직 직접적 · 직관적 표상에서 출발하여 오성과 이성으로 이행할 뿐이다. 인위적 변형 과정이 없다는 점에서 직관이야말로 가장 명확하고 견고하다. “추상적 인식과 이성이 생기면, 이론적 면에서는 의혹과 오류가 나타나고, 실제적 면에서는 불안과 후회가 나타난다.” 이성은 확신과 안정을 주기는커녕 반대로 불안과 오류를 생산한다. 직관은 의지와 직접 관계하고 그만큼 순수하다. 순수하게 직관적 태도를 취하는 한 모든 것은 명백하고 견고하며 확실하다. 오직 직관 속에서 평정을 얻고 현재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이고 의지의 지배를 받는 직관이다. “의지는 개체 및 전체의 내면적인 심오한 부분이며 핵심이다.”

신체 움직임 등 인간의 기본 영역도 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동작은 의지의 발현이므로 신체는 가시화된 나의 의지다. 신체 동작은 의지 객관화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의지 자체다. 예를 들어 드가(De Gas)의 〈장갑을 낀 가수〉에서 가수의 모든 표정이나 동작은 그녀의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다. 밤무대의 여가수가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고 있다. 표정이나 동작으로 봐서는 노래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인 듯하다. 동물과 인간의 동작은 다르다. 동물의 동작은 표상과 인식이 아니라 본능과 관습이 지배한다. 하지만 인간의 동작은 표상에 기초하고 인식에 연결된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동작은 습관과 반복을 넘어서 특정한 의지를 객관화한다. 가수의 손짓과 표정은 의미 없는 허우적거림이 아니다. 슬픔이나 고통, 분노나 격정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객관화시키는 장치다.

〈장갑을 낀 가수〉

드가, 18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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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타이, 추체험을 통한 삶과 의지의 객관화

쇼펜하우어가 삶의 의지를 객관화하여 이해할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딜타이는 객관화와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생철학은 인식 주체와 대상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근대 철학 인식론을 비판한다. 인식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여 접근하는 인식방법은 자연과학에는 유용하지만 인간의 삶과 역사에 연관된 인간과학에는 적합하지 않다. 즉 자연과학의 세계와 인간과학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과학에서 세계는 인식 주체와 맞물려 존재한다. “이 세계는 결코 정신과학의 외부에 놓여 있는 어떤 현실성의 사본이 아니다. 인식은 결코 그와 같은 것을 창출할 수 없다. 인식은 직관, 이해 그리고 개념적 사유라는 자신의 수단과 결부되어 있고, 또 결부될 수밖에 없다.”각주13) 정신과학 내적인 인식체계와 정신과학 외적인 인식 대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일회적이고 우연히 일어난 일을 목격하는 순간 이미 세계는 인식 작용과 맞물린 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과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철학은 성립할 수 없다. 생철학이 정신과학 즉 학문으로서의 위상을 지니려면 삶과 의지가 객관적으로 이해 가능해야 한다. 딜타이는 삶이 그 자체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심적인 삶의 경험적 흐름은 어떤 과정들로 구성된다. 왜냐하면 심적 상태는 모두 시간 안에서 시작 · 변화 · 소멸되기 때문이다. ··· 심리학적 기술은 이 과정에서 오로지 사실적인 것에만 관계한다.” 시간 속에서 마주치는 경험적 삶을 하나의 사실로 인식함으로써 삶의 이해에 접근한다. 경험적 사실로서 삶은 이해 대상으로 주어져 있고, 지각되고 규정될 수 있다.

문제는 삶이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 · 기분 · 정서와 같은 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섞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표상 · 판단 · 감정 · 욕구 · 의지의 행위 등은 심적 연관 안 어디에서나 서로서로 얽혀 있다. 이것은 정신적 삶의 경험적 실상이다.” 생철학이 성립하려면 느끼고 욕구하는 인간 감정도 구조적 · 체계적 이해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감정 안에는 흔히 쾌와 불쾌로 표현되는 법칙성만이 존재한다. ··· 감정에서 질적 차이로 인지될 수 있는 것은 좁은 의미의 쾌와 불쾌, 찬동과 반대 그리고 마음에 듦과 마음에 들지 않음이다. ··· 감정은 지성적 · 의지적 체험과 얽혀 있다.” 감정은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감정은 쾌와 불쾌로 나타나고, 지각이나 표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 이해가 가능한 구조 통일체다. 감정과 긴밀하게 연결된 심적 구조는 서로 다른 심적 사실을 서로 연결해주는 질서를 의미하고, 그만큼 체계적 이해의 대상이다.

먼저 삶의 구조적 이해는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구조적 관계에 대한 앎은 체험으로 환원된다. 다른 면에서 이 앎은 모든 정신적 과정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앎은 체험된 것 위에, 또는 지각에 의거해 주어진 것 위에 세워져야 한다. 지각 작용도 엄밀히 말하면 무엇에 대한 감정이나 의욕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체험이다. 오히려 체험과 직관이야말로 그 자체로 확실성을 부여한다.

특히 삶과 의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외적 체험을 넘어서는, 내적 의미 이해로서의 추체험(追體驗)이 중요하다. “모든 체험은 다른 부분과 함께 하는 구조를 통해 연관된다.” 일차적 체험은 자기 내부가 대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기를 넘어서 인간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다른 삶과 연관되어 인간과 사회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타인의 체험, 특히 외적 표현을 내적으로 이해해 들어가는 방식의 추체험을 통해 삶을 내재적 ·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해가 사건의 계열을 따라 진행된다는 사실 때문에 저자와 해석자, 체험자와 추체험자는 완전히 함께 살 수 있다. 추체험이란 사건의 계열에 있어서의 창조다.” 저자의 정신적 삶의 이해는 내적 차원에서 체험 · 표현 · 이해와 관련한 삶의 파악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은 학문적 추상화를 통해 개별 대상자의 삶을 보편으로 포섭하여 개념화 · 체계화한다.

대표적 예로 자서전을 통해 타인의 삶을 파악하는 방식이 있다. “자서전은 삶의 이해와 만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형식이다. 여기서 삶의 흐름은 외적인 것, 감성적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자서전만이 아니라 시인 · 예술가 · 저술가 등의 작품도 같은 기능을 한다. 작품이 직접 저자의 삶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작품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면 삶에 대한 추체험이 가능하다. 언어로 표현된 자서전이나 작품을 통한 파악에만 그치면 외적 이해에 머문다. 시대와 삶의 조건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합적 · 내재적으로 해석하는 추체험으로 심화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딜타이는 이렇게 삶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해석 기술을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문자 뒤의 의미를 해석해 텍스트에 가치를 부여하고, 저자의 의도, 의도가 형성된 맥락이나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삶을 객관화하는 방식이다. 딜타이의 해석 방법론은 이후 문헌학으로서 해석학을 정립하는 직접적 계기를 제공한다.

니체, 객관적 · 당위적 이성 비판과 의지의 분석

니체 역시 이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면서 인식 문제에 접근한다. “오랜 세월 동안 지성은 오류만을 파생시켰다. ··· 영속하는 사물이 존재한다, 동등한 사물이 존재한다, 사물 · 물질 · 물체가 존재한다, 사물은 보이는 바가 전부다, 우리의 의욕은 자유롭다, 나에겐 선한 것은 그것 자체로서 또한 선하다,··· 이러한 명제에 대해 부정하는 자나 회의하는 자가 출현한 것은 최근이다.”각주14) 영속성과 보편성, 물자체 인식 등은 이성이 만들어낸 대표적 오류다. 이성을 완전히 자유롭고 자발적인 활동으로 전제하고 이를 통해 마치 삶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영원한 지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릇된 주장을 펼쳤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주의자들은 충동의 역할을 부정하고, 지식을 통해 삶의 원리를 규정하려고 했다. 이제 이성에 대한 회의주의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쇼펜하우어나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삶과 의지 탐구를 강조한다. 삶과 의지를 중시하는 만큼 이와 연관된 감각의 역할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예전의 철학자들은 감각을 두려워했다. ···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감각주의자이며, 현재와 미래의 학자 모두가 그렇다.” 과거의 주류철학은 감각을 마치 세계와 이념을 변질시키는 오염 물질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니체는 옛날 철학자들을 심장 즉 감정이 없는 인간라고 지적한다. 진정한 철학은 삶과 의지의 핵심 요소인 감각과 감정의 능동적 역할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열려야 한다.

하지만 탐구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수준인 쇼펜하우어를 넘어서는 진전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의지일 뿐이라고 가정했을 때, 태고의 신화를 숭상한 것이었다, 의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내적 욕구에서 분출된다는 의미에서 의지의 단순성과 직접성에만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의지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쾌와 불쾌라는 표상이 필요하다. 불쾌를 줄이고 쾌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의지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쾌와 불쾌는 단순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지성의 해석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같은 자극이 사람에 따라서 쾌로 혹은 불쾌로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쾌와 불쾌 그리고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처럼 모든 유기체의 공통점이 아니라 지성적 존재에게만 발견된다.

기존의 이성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인과관계 중심의 분석이 대표적이다. “원인과 결과, 그러한 이원성은 아마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분리된 점들로서만 움직임을 감지하는 자로 그때, 그리고 그 후에는 실제로 그 움직임을 보지도 않고 그 움직임을 추론하는 때 우리가 조각조각 분리한 연속체에 직면하게 된다.” 이성주의 철학은 오직 두 개의 분리된 것 즉 원인과 결과만을 보았다. 원인과 결과라는 틀 안에 모든 인식을 꿰어 맞춤으로써 점과 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연속을 간과하는 중대한 오류를 저질렀다.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무수한 과정이지, 원인과 결과라는 이원성이 아니다.

인과관계는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는 절대로 원인에 관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않다. 심리학적으로 이 전체 개념을 우리야말로 원인이라는 즉 팔이 움직인다는 주관적 확신에서 얻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다.”각주15) 우리는 힘 · 긴장 · 저항의 감정을, 이미 행위의 시작일 뿐인 근육 감정을 원인이라고 오해했다. 혹은 외적 작용이 주체의 의지에 잇달아 일어나기 때문에 의지를 원인이라고 풀이해 왔다. 이러한 주관적 경험에서 인과관계 관념을 만들어냈고, 온갖 문제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객관 세계를 이성의 실현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고 내부로부터 원인을 투영하는 사고방식 즉 자기 기만에서 비롯된다. 주관과 객관의 구분에 기원을 둔 인과성은 조잡한 관찰의 결과다. “우리가 더 이상 결과를 초래하는 주체를 믿지 않는다면, 결과를 초래하는 사물도 우리가 사물이라고 이름 짓는 저 현상들 사이의 교호작용, 원인과 결과도 또한 믿지 않게 된다.” 주체는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확고한 주체를 전제로 이에 대조되는 객관 세계를 설정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오류고 날조다. 주체와 객체 개념을 포기함으로써 물질 · 정신 등의 보편적 본질이라든지 영원 불변성과 같은 허구적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확고한 주체의 설정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성주의 철학은 언제나 객관적 관찰의 가능성을 전제한 위에서 논리를 펼쳐왔다.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관찰은 천 배나 곤란하며, 아마도 오류가 관찰 일반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이성주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식 도구인 논리 · 범주는 객관적 기준이 아니다. 무언가 대상을 이해하고 산정하기 쉽게 하려는 목적이 만들어낸 도식화 욕구의 산물일 뿐이다. 복잡한 사물을 쉽게 취급하고 계산하기 위해 공통점에 해당하는 것을 동등화하여 조잡하게 구분한 도식화에 불과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식이 아니라 도식화다. 당연히 지극히 부분적 이해 위에서 접근하는 관찰은 오류를 자신의 숙명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오류의 반대편에 진리의 자리를 설정하는 사고방식도 설득력이 없다.

“진리는 나의 사고방법 안에서는 반드시 오류의 반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원칙적인 경우에는 다양한 오류, 서로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연인 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류다. 인식은 오류를 자기 본질로 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유용성이 있다면 절대적 · 보편적 성격이 아니라, 다양한 오류 사이에서 상대적 의미를 지니는 지위 정도다.

정신은 세 가지 변화를 겪는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고, 사자는 어린애가 되는가.”각주16) 먼저 정신은 낙타가 되어서 인류가 객관적 지혜라고 믿어왔던 온갖 오만에서 벗어나 미지의 길을 걸어 정신의 사막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대들은 자신의 이성을 목 졸라 죽여야 한다. ···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이 세계를 단념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정신은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자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당위적 정언명령이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존재하는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일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다. 당위적 의무에서 벗어나는, 신성한 부정을 행하는 사자의 힘은 ‘나는 바란다’라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마지막으로 사자는 어린애가 되어야 한다. 신성한 부정은 다시 신성한 긍정으로 돌아와야 한다. 부정은 자유를 줄 수 있지만 창조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는 새로운 출발이자 유희이고 이를 위해서는 부정을 넘어서는 순결한 긍정 즉 어린애가 되어야 한다.

베르그송, 정지와 공간에서 운동과 시간으로

베르그송은 지성의 역할을 인정하되, 한정된 영역으로 제한한다. “좁은 의미에서 지성의 역할은 신체를 환경에 꼭 맞게끔 하는 일과, 외부 세계 사물끼리의 관계를 표상하는 일, 요컨대 물질을 사고하는 일이다. ··· 지성은 타성적 대상, 특히 고체 사이에 방치되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각주17) 지성의 논리는 고체의 논리다. 지성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개념은 고체의 모습에 따라 형성됐다. 그런데 무기 물질의 가장 일반적 특성은 면적을 차지하는 공간적 요소다. 사물을 임의로 분할하는 작업 수행에 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하학에서 지성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또한 지성의 논리는 정지의 논리다.

“과학은 시간과 운동에서 본질적 요소 즉 시간에서는 지속을 운동에서는 운동성을 제거해야만 그것을 다룰 수 있다.”각주18) 예를 들어 움직이는 두 물체의 운동은 넓이라기보다는 지속이고, 양이 아니라 질이기 때문에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운동의 속도 측정은 단지 하나의 동시성을 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학은 지속과 운동성을 배제하고 어떤 주어진 순간에서의 아킬레스와 거북의 동시적 위치를 공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한다. 그만큼 지성은 정지의 논리 안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지성은 역동적 변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우리의 행동이 작용하는 대상은 동적인 사물이다. 즉 면적과 정지가 아니라 운동성 자체다. 특히 생명과 의지는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화 과정을 자기 본질로 한다. 하지만 지성은 고정된 물질을 넘어서는 생명의 본성이나 의지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사고 범주, 예를 들어 단일성, 다양성, 기계적 인과성, 지적 목적성 가운데 무엇도 생명 상황에 정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주어진 요소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경향을 갖는 지성은 생명과 실제의 삶에서 순간순간 나타나는,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을 놓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미래 창조를 지성이 이해할 수는 없다. 결국 사고는 생명의 부분적 현상이다. “사고는 생명이 발산된 하나의 형태이거나 하나의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각주19) 지성적 이해 능력이란 의지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생존조건에 점점 적확하게, 또 점점 복잡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적응해 가는 능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생명과 의지가 사고에 우선한다.

철학이 인간의 삶과 의지를 다루어야 하는 한,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공간과 정지가 아니라 시간과 운동이다. “시간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실체적 실질은 없다. 왜냐하면 지속되는 시간이란 단지 한 순간을 대신하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단절적 순간의 조합이 아니다. 그동안 지성은 화살이 날아가는 과정을 궤도상 정지된 지점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제논처럼 오직 분할에 의해서 운동을 이해할 뿐이었다. 정지 중의 하나가 곧 다른 정지 중의 하나와 위상이 같다. 예를 들어 1분이 흘렀다고 하면 보통 시계추가 초를 치는 60회 진동 즉 고정된 선상의 60개 점을 생각한다. 단절적 순간의 조합만 남고 계속의 관념은 사라진다. 만약 시간이 고정된 순간의 나열에 불과하다면 현재밖에 없고 현재에 이르는 과거의 연장도, 진화도 없을 것이다. 생명과 삶 그리고 진화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분할될 수 없는 연속적 운동 과정이다.

이성주의 철학에서는 삶이 정지된 순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마치 영화가 수많은 정지된 사진을 이어붙인 연속 필름을 통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밀레의 〈만종〉 속 한 순간이 정지된 시간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그림에서처럼 기도를 하는 부부와 배경이 한 세트가 되어 정지된 사진으로 박히고, 주인공과 배경화면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는 또 다른 정지된 사진으로 이어지는 무수한 과정을 통해 저녁이 밤이 되고 다시 아침이 온다고 여긴다. 단순히 자연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 생활과 인생 과정도 정지된 사진의 연속인 동영상의 일종으로 구성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눈속임이고 착각이다. 〈만종〉에서 정지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그림이나 사진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설정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순간은 오직 관념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은 변화가 이미 그 내적 과정에 있다.

〈만종〉

밀레, 18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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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물질에 관계한다면 삶과 생명은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가? “만일 지성이 물질에 동조되고 직관은 생명에 동조되어 있다면, 이들에 압력을 가하여 자기가 동조한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의 정수를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전체 인식은 물질과 생명 이해를 동시에 포괄한다. 물질 이해 즉 자연과학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까지 인식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직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직관은 지성으로 나아가는 초기 과정에서 부차적 · 부분적 역할이 아니라 지성과 별도로 독립적 역할을 한다. 직관에 의해 비로소 인식이 도달해야 하는 본질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공간과 정지를 넘어 시간과 지속으로 나아가는 즉 변화와 운동으로 나아가는 인식방법인 변증법은 직관의 이완에 지나지 않는다. 직관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증법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변증법이 하는 일은, 변증법을 초월하는 직관의 결과를 확대시키는 일 뿐”이다.

베르그송은 칸트가 공간을 내용과 분리시키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지속을 배제한 추상적 공간 개념으로 인식을 제한하면서 시간 개념은 형식화되고, 시간 · 공간과 뗄 수 없는 관계인 감각도 배제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더 경계한 대상은 경험론이었다. 칸트의 문제는 공간과 내용을 분리함으로써 경험론이 부각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 경험론이 넓이와 같은 공간은 감각의 종합에서 생긴다는 점을 규명함으로써 관념론의 한계를 설득력 있게 공격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보기에 경험론이 더 문제다. 경험론처럼 직관을 감각의 단순한 집적이나 표현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공간이 감각의 추출물은 아니라 해도 감각의 공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발생을 정신의 적극적 개입이 없다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각주20) 감각의 공존 속에서 공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그 모두를 한꺼번에 포용하여 병치하는 정신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신활동은 감각이 누적되거나 전환에 따른 일방적 산물이 아니다. 고유한 정신활동 영역이 감각 활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감각의 공존을 불러일으키는 정신활동은 본질적으로 직관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은 근대에 접어들어 과학 발전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확장하던, 물질의 정지 상태와 공간 중심인 존재론 위주 철학을 운동과 시간 중심의 철학으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새롭게 형이상학의 역할을 강화하고 재정립하고자 했다. 경험론과 실증주의의 부상으로 형이상학 영역을 폄하하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기본적으로 물질과 감각에 부정적이던 합리론과 관념론은 과학 지식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는 속에서 설득력 있게 형이상학의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당시의 과학 지식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방법으로는 설득력이 없는 상황에서 베르그송은 물리학과 생물학 등에서 얻은 지식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즉 물질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물질을 종합하고 생명과 연관시킴으로써 독자적 정신활동 영역을 지키고자 했다. 쇼펜하우어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생철학이 생명과 삶, 의지의 문제를 철학의 핵심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베르그송은 과학적 지식에 근거하되 물질을 넘어서는 형이상학 영역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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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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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철학과 미술 생철학 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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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생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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