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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와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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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

실천 철학과 변증법적 · 사적 유물론

정통 마르크스주의, 계급지배 수단으로서의 국가와 계급 혁명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통 이해를 대변하는 보편적 영역으로서의 국가를 부정한다. 국가는 단지 지배계급의 통치 수단일 뿐이다. “현대의 국가권력이란 전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사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각주1) 지배계급이란 그 시대의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소유한 계급을 의미한다. 국가란 고대 그리스나 로마와 같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주,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귀족과 지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 등 지배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하다.

국가는 사회 내의 모든 계급이나 계층의 구별을 강화한다. “국가는 출신성분 · 사회성분 · 신분 · 교양 · 직업 등 모든 구별을 폐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을 전제로 해서만 존재하고 이러한 모든 인자와의 대립 내에서만 자기를 정치적 국가로 감지하고, 또 자기의 보편성을 완성한다.”각주2)

우리는 흔히 국가 안에서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라도 열리면 계급과 계층의 구분을 넘어서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국가 안에서 공동 존재로 느끼는 감정은 정치사회 영역에 국한된다. 국가는 정치사회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정치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시민사회 영역이 있다. “다른 하나의 생활은 시민사회에서의 생활로서, 그 속에서 인간은 개인으로서 활동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서만 인식하며 자기 자신마저도 수단으로까지 하락시켜 다른 세력의 노리개가 되고 만다.”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속에서 이중생활을 한다. 시민사회는 물질적 생활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물질생활은 생산수단 소유를 둘러싸고 구분되는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사회 구성원 내의 여러 구별을 전제로 존재한다. 정치적 국가는 시민사회에 대해서 마치 천상이 지상에 대해서 하듯이 정신주의적으로 군림한다.

〈사회의 기둥〉

그로스, 1926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로스의 〈사회의 기둥〉은 국가를 지배하는 집단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맨 앞에 나치 문장을 단 정치 지도자가 한 손에 맥주, 다른 손에 칼을 들었다. 머리 안에는 기마병이 있어서 온통 침략과 약탈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뒤로는 머리에 부패를 상징하는, 김이 피어오르는 똥을 얹은 정치가가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다. 그 옆으로는 신문과 연필로 봐서 언론인임이 분명한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종려나무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이 환영하는 뜻으로 흔들었음을 고려할 때 언론의 파쇼 정권 찬양을 의미한다. 뒤로는 야비한 표정의 성직자가 열렬한 몸짓으로 기도하는 중이다. 그림의 전체 구성으로 봐서는 종교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세뇌하는 과정을 암시하는 듯하다. 맨 뒤로는 총과 칼로 무장한 군인이 나온다.

정치 · 언론 · 종교 등 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모든 영역은 군사력이라는 폭력을 기본 수단으로 갖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정신적 지배는 물리력을 동반한 두려움을 근간으로 할 때 비로소 힘을 갖기 때문이다. 국민을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들이 주인이다.

하지만 실질적 주인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지배 집단 역시 완전히 자립적이지는 않다. “부르주아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이 자기 계급 성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피착취 계급에 대하여 맺은 상호 보험에 지나지 않는다.”각주3) 보험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역사 전개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독점한 지배계급이 피착취 계급을 직접 억압하는 일이 점차 곤란해진다. 전통사회에서는 신분제와 폭력에 근거하여 직접 지배하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쉬웠으나, 시민혁명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자를 비롯한 피착취 계급을 노골적으로 직접 지배하는 방식이 곤란해진다.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직접 통치에 나서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를 외견상 자신에게서 독립적 · 중립적인 기구처럼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 통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과 이를 정신적 · 문화적으로 뒷받침하는 TV · 신문을 비롯한 언론 · 종교 등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다.”각주4) 조국은 노동자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침해할 때 적으로 간주한다. 처음에는 점잖게 교화하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이해에 반한다고 여겨질 때 국가의 이익과 안전이라는 구실로 폭력적 탄압에 나선다.

〈포위된 파리〉

메소니에, 1876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메소니에의 〈포위된 파리〉는 노동자에게 조국이 없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과장만은 아님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대혁명의 한 부분인 1871년 파리 코뮌 당시의 상황이다. 1870년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덫에 걸려 항복한다. 하지만 파리시민은 자치정부인 코뮌을 구성하고 시민군을 조직한다.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프러시아에 항복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손안에 있는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랑스 부르주아들은 적국인 독일과 비밀 협상을 한다. 독일군이 파리 외곽을 포위한 가운데, 부르주아 정권은 독일에서 돌려받은 군대로 같은 국민인 프랑스 시민군을 학살한다. 그림은 자국 군대가 학살한 프랑스 민중의 처참한 모습을 담았다. 이미 여기저기에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다.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여인도 보인다. 심지어 어린아기조차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한 어머니가 죽은 아이를 안고 넋이 나간 얼굴로 하늘을 원망하듯 쳐다본다. 중앙에 삼색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전쟁의 여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죽음의 악마를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당시 수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민중이 학살당하고 10만여 명이 체포됐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우선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해야만 하며, 국민적 계급으로 올라서야 하며, 스스로를 국민으로서 정립해야만 한다.” 하지만 정치권력을 장악한다고 해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소유관계에서의 불공정은 결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 근대적 생산 제 관계에서 생겨난 것”각주5) 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지배를 결정적으로 타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승리는 일시적이다. 부르주아적 생산방법과 사적 소유를 폐지할 때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변화를 필연으로 이해한다. “생산양식은 즉 생산력이 발전되도록 하는 관계는 결코 영원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에 조응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력 속에서 일어난 변화는 필연적으로 생산관계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준다.”각주6) 물질적 생산력은 끊임없이 발전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즉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특정한 관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노예주와 노예, 봉건지주와 농노,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특정 발전 단계에서 현존 생산관계와 또는 그의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소유관계와 모순을 일으킨다. 생산관계가 일정한 단계에서 계속 발전하려는 생산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전환된다. 이때 사회혁명이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각주7)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관계 자체의 철폐로 나아가는 계급투쟁의 주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생활 조건을 지양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상태 속에 집약되어 있는 현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생활 조건을 지양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생활 조건을 지양할 수 없다.”각주8)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적과 역사적 행동은 자신의 생활 상태 속에 그리고 오늘날의 부르주아 사회의 조직 전체 속에 확연하게 그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은 정치투쟁이다. 국가권력 장악을 둘러싼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정치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불가피하게 일정 기간 계급적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 “계급적 차별의 일반적 폐지, 계급차별의 기초로 되어 있는 현재의 모든 생산관계의 폐지, 이들 생산관계에 대응하는 현재의 사회관계 폐지와 그러한 사회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념의 변혁을 위해 필연적인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재가 필요하다.”각주9) 하지만 독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예상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반혁명을 제압하고,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간으로 한정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의 지양과 무계급사회에 이르는 과도기 형태를 이루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폐지를 제시한다. “계급적 차별이 소멸되고 협동단체를 만든 개인의 손에 모든 생산이 집중되었을 때, 공적 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잃는다. ···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체하여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조건이 되는 공동사회가 출현한다.”각주10) 국가의 폐지는 계급을 폐지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다. 계급이 폐지되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조직적 권력의 필요성도 스스로 없어진다. 문맥을 잘 보면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공적 기구 자체의 부정은 아니다. 계급 지배 기구로서의 정치적 성격을 상실할 뿐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이 하나로 결합되는 공동사회가 사회질서를 관장한다.

“협동단체를 만든 개인의 손에 모든 생산이 집중”된다는 내용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대안으로 마르크스가 국유화만을 제시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직접 저술한 저작 중에서 국유화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오직 1848년에 쓴 《공산당 선언》뿐이다. 몇몇 혁명적 방책으로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한 정도였다. 그나마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다. “이들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어디서나, 언제라도 당면하는 역사적 조건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2장 끝에 제안된 혁명적 제 방책에는 결코 특별한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대목은 지금 다시 쓰인다면 대폭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 국유화가 중심인 방책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 또한 방책의 근거가 되는 원칙조차 획일적이지 않고 항상 구체적 · 역사적 조건에 의해 변경 가능하다. 그나마 국유화를 근본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아니다. 국유화를 포함하여 몇 가지 방책을 제시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소유 문제에 대한 본질적 대안으로 협동단체를 만든 개인의 손에 모든 생산이 집중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즉 국가에 의한 소유가 아니라 생산자 개인의 협동단체에 생산이 집중되어야 한다. 《자본론》에서 대안적 방향으로 내놓은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조직적으로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소유와 관리를 책임지는 주체로 서야 한다. 전체 사상을 고려할 때 마르크스는 국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관되게 국가에 의한 통제에 반대한다. 그래서 《고타강령 비판》에서는 라쌀레의 ‘국가에 의한 생산통제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엥겔스의 정치철학도 대부분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체계화 · 구체화하는 방향이다. 국가는 사회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도, 헤겔의 주장처럼 ‘윤리적 이념이 현실화된 것’이거나 ‘이성이 형상화되고 현실화된 것’도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단계의 사회적 산물이다. 국가는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다. 하지만 실제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예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예외적 현상이지만 투쟁하는 계급 간의 세력이 균형에 도달하여 국가권력이 외견상 두 계급의 조정자로서 어느 정도 독립성을 한동안 획득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각주11) 예를 들어 귀족세력과 부르주아지 세력이 서로 비등하던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군주제가 대표적이다. 또한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지를 사주한 프랑스 제2제국의 보나파르티즘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폐지에 대해서도 유토피아적 발상과는 일정한 선을 긋는다. “사람들에 대한 통치에 대신하여 사물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도가 나타난다. 국가는 폐지가 아니라 사멸되는 것이다.”각주12) 마르크스도 강조했지만 모든 공적 기구의 폐지가 아니다. 억압 기구가 폐지되고 사물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도 등 공동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은 존재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밝힌다. “공산주의자는 그렇게 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반대하지 않는다. ··· 공산주의자는 혁명이 의도적 · 자의적으로 일으켜지는 것이 아니며, 혁명이란 언제 어디서나 개별적 당파나 계급 전체의 의지와 지도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는 정세의 필연적 결과였음을 매우 잘 알고 있다.”각주13) 폭력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혁명은 구체적 정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평화적 방법을 배제하지 않지만, 만약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이 폭력적으로 억압되는 상황이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과업을 옹호할 것임을 주장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폭력 문제에 대해 더 완고하다. “계급투쟁의 승인에 지나지 않는 자는 아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 계급투쟁의 승인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승인으로 확대시키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자다.”각주14) 계급투쟁의 인정만으로는 부르주아 정치의 테두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계급투쟁에 관한 학설로 한정시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축소 · 왜곡하여 부르주아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부르주아적 국가형태는 다양하지만 본질은 오직 부르주아지 독재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다양한 정치형태를 통해 나타날 수 있지만,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경과해야만 한다.

혁명 과정에서, 특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과정에서 폭력 사용도 불가피하다. “독재는 직접 폭력에 입각하고 어떠한 법률에도 구속되지 않는 권력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으로 쟁취되고 유지되는 권력이며 어떠한 법률에도 구속되지 않는 권력이다.”각주15) 국가가 존재하는 한 어느 사회나 통치 · 지휘 · 지배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강제기구를 자기 손아귀에 장악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도 폭력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과 계급 독재 과정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혁명과 자유

베른슈타인은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과 정치원리에 회의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의 계급 양극화 논리 자체가 현실에서 부정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유산자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 중산층은 성격이 변하긴 했지만 사회적 계급구성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각주16) 엄청난 사회적 부가 늘어나면서 자본가 부호의 숫자는 줄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여러 계층의 자본가들이 함께 늘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중산층도 두터운 편이어서 사회적 갈등의 폭발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의 붕괴를 예상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현실에서 근거를 상실했다는 비판이다.

혁명 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독재에 대해서도 “계급 독재는 더 저급한 문명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거부한다. 실현 가능성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현대 정치에 사용될 수 없는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계급 독재는 전통 사회의 유물일 뿐이다. 만약 현대사회에서 독재를 고집한다면 이는 정치적 복고주의에 다름 아니다.

현대사회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기본 방법 즉 선거를 무시하는 방식으로는 혁명은 합목적성과 실현 가능성 모두에서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의 선거권은 유권자를 잠재적으로 사회공동체에의 참여자로 만들며 이런 잠재적 참여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실상의 참여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노동자가 사회 구성원 중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고 낮은 교육 수준에 머물던 상황에서는 보통선거권이 단지 자신을 지배할 사람을 선택하는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인식도 높아지면서 이제 선거가 민중의 대표자를 지배자로부터 참된 민중의 봉사자로 바꾸는 도구로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여러 모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회주의의 전제다. 그것은 단지 수단일 뿐만 아니라 실체이기도 하다.” 민주적 제도와 전통이 없었다면 오늘날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회주의 정당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지속적으로 교의를 보통선거권의 토대인 민주주의 위에 세우고, 전술을 그것과 일관성 있게 맞추어 채택해야 한다.

루카치가 보기에 혁명과정에서의 독재와 폭력 자체를 반대하는 베른슈타인의 견해는 전형적 기회주의에 속한다. “역사 속에서 폭력의 의의를 이론적으로 과소평가하고 과거 역사로부터 폭력의 역할을 지워 없애는 것은 속류 마르크스주의에게는 기회주의적 전술을 위한 이론적 준비다.”각주17)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속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폭력은 경제적 힘이라는 점에서 계급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폭력과 무관한 과정일 수는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민 투쟁이 정점에 달했을 때 무장투쟁 양상을 보였다. 유럽에서 봉건체제 질서가 흔들리던 18~19세기에 집중적으로 농민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후반기에 갑오농민전쟁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농민의 무장 봉기가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폭력 양상을 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생존을 위한 농민의 간절한 호소에서 시작하지만 귀족이나 지주의 무자비한 보복이 뒤따르면서 무장봉기로 바뀐다. 다시 말해 혁명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루카치는 폭력을 유일한 혁명의 경로로 설정하는 발상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 경고한다. “기회주의자들의 뚜렷한 특징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합법성을 고수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당은 그와 반대의 것 즉 비합법성을 원하는 것이라고 확정짓는 것이 결코 옳은 일은 아니다.” 합법성과 비합법성, 폭력과 비폭력은 고립적 영역일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고정화하는 방식은 모두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합법주의도 문제지만 대부분의 혁명운동에서 나타나는 비합법성의 낭만주의도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올 수 있는 소아병의 하나다. 성숙한 운동은 폭력과 비합법을 유일한 전략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 할 전술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 계급의 혁명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본주의사회가 어떻게 노동자 계급의 혁명성을 둔화시키는지에 주목한다. 상반된 태도를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성이 현실 자본주의에서 어떤 장치에 의해 어떻게 교묘하게 왜곡되는지를 추적함으로써 혁명성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본주의가 구축한 소비사회가 노동자의 의식을 왜곡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사람들은 상품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자동차 · 하이파이 전축 · 주택 · 부엌시설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한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풍요로움과 자유를 가장한 지배는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을 포함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모든 진정한 반대를 통합하고 모든 대안을 흡수한다.” 발달된 산업사회는 풍요로운 소비를 약속함으로써 억압적 기능을 유지한다. 과소비를 향한 정신적 마취를 통해 노동 착취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기술을 통해 누구나 대량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호도하는 기술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통해 사회와 자연, 정신과 육체를 영원히 이용하는 전체주의적 세계를 창조한다.

이제 직접적 지배에서 간접적 관리로 계급 통치의 형태가 변화한다. 사회의 억압적 관리가 더욱 합리화 · 생산화 · 기술화 · 전면화 될수록 더욱더 관리를 받는 개인은 자신의 노예상태를 부수고 스스로의 자유를 얻는 수단과 방법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즉 저항을 무력화시킨다. “정치영역에서 이 경향은 저항의 통합 또는 수렴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저항의 통합은 체제의 발전을 저지하는 사회계층 즉 한때 체제 자체를 거부하던 계급을 포용해서 사회변화 가능성 자체를 억제한다.” 물질적 풍요, 안락한 생활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일차원적 인간을 대량 생산함으로써 정치적 반대 계급을 통합한다.

그런데 수렴과 통합은 일정한 물질적 근거를 갖고 이루어진다. 먼저 “기계화는 노동으로 소모되는 신체에너지의 양과 강도를 계속 감소”시킴으로써 착취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인다. 특히 자동화는 생산력이 노동자 개인의 생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듯 보이게 한다. 또한 대중매체의 보급도 계급적 통합 현상을 촉진한다.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양적으로 증가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가 순종을 합리적 · 기술적 태도로 만드는 한 자유의 쇠퇴와 억압은 오히려 객관적 사회과정이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주의를 공허한 껍질로 만들어 사회 구성원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근대인은 전통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는 고립되고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외재적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자아를 뿌리에서부터 위태롭게 하고 그를 약화시키고 위협하여 새로운 속박으로 자진해서 복종하게끔 한다. 그에 대해 적극적 자유는 능동적 ·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을 포함해서 개인의 여러 능력의 충분한 실현과 일치된다. 자유는 자체의 다이내믹한 운동법칙에 따라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전환하려는 위협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도달했다.”각주18)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를 구분한다. 소극적 자유는 전통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 권위란 신분적 권위를 비롯해 근대 이전의 억압적 질서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부터의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종교적 · 신분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 결과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탄생했다.

문제는 그렇게 탄생한 개인이 “고립되고 무력한 존재”, “외재적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왜 신분적 자유를 얻고 자유로운 개인이 역사적으로 탄생했는데 고립되고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을까? “개인주의가 공허한 껍질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는다. “순수한 개인주의 발전을 약속하는 물질적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자본주의는 이러한 기반을 만들었다. 물질적 기반이란 당연히 생산력 발전을 말한다. 그런데도 개인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고립되는 이유는 소수에 의한 “숨은 지배력” 때문이고 “사회의 비합리적 · 무계획적 성격” 때문이다. 또한 인간을 정보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전문가의 진단에 자신을 맡기게 만들고, 전체와의 연관성이 사라진 개별 사실에 매몰되게 만드는 사회적 조작이 개인을 고립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개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속박으로 자진해서 복종하게끔 한다.”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된 개인은 고립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고립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문제는 사람들은 고립감에서 벗어나는 길을 자유를 확대하는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속박으로 자진해서 복종하여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개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고독감이 오히려 무언가 하나의 강한 흐름 속에 자신을 속하게 함으로써 어떤 귀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심리를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유럽에서 자발적으로 히틀러와 나치즘에 열광적으로 복종하는 경향을 만들어낸 원인도 복종을 통해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자체의 다이내믹한 운동법칙에 따라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전환하려는 위협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도달”한다. 즉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생긴다. 자유의 상태가 자유의 기피를 만들어내는 역설적 · 이중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개인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사상의 이데올로기적 목표이던 개인주의의 실현에 달려 있다.”

개인주의를 더 발전시키면서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프롬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소극적 자유에서 벗어나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로부터의 자유’에서 더 나아가서 적극적이며 창조적 자유인 ‘~에로의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개체성이 존중되는 방향으로의 자유, 개인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지는 자유, “능동적 ·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을 포함해서 개인의 여러 능력의 충분한 실현과 일치”되는 자유로 가야 한다.

적극적 자유를 가진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경제와 정치를 인간의 발전에 종속시키려면, 새로운 사회의 모델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 지향적 개인의 요구에 부응하여 설계되어야 한다. ··· 인간이 자유로워지려면 다시 말해, 병적 과소비로 산업을 추진시키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려면, 경제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있어야 한다.”각주19) 병든 인간을 제물로 삼아 건강을 유지하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 목표를 향한 중요한 첫걸음은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생산의 수행이다. 합리적 소비는 전적으로 기업 이익과 성장 관점에서 생산을 결정하는 기업 경영인과 주주의 권리를 과감하게 제한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산업적 · 정치적 참여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한에서만, 우리는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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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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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철학과 미술 생철학 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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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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