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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도덕에 대한 평가와 정념의 치유
‘합리론의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살펴보았듯이 데카르트는 윤리적 가치판단도 의심 대상으로 꼽았다. 그러나 윤리적 가치판단 자체를 부정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강조한 것은 사고의 올바른 순서라는 점이다. 윤리적 가치판단을 사고 순서의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만약 운 좋게 목적이나 가치판단이 진리와 일치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가치판단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목적이나 가치판단의 경우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나는 수학과는 반대로 도덕을 다루는 고대 스토아 철학을 모래와 진흙 위에 세워진 데 지나지 않는 매우 호화롭고 장려한 궁전에 비했다. 덕을 찬미하여 가장 거룩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덕을 인식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들이 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냉혹, 오만 혹은 친족 살해에 지나지 않는다.”각주1)
고대 그리스 사회나 서양의 중세 사회는 보편적 목적이 우리 인식과 독립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객관주의적인 이성이 지배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진리를 검증받지 못한 목적이나 가치가 인간과 사회를 지배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강조한 덕이나 정의는 자신이 속한 계층이나 집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오만으로 가득한 확신과 만족, 다른 한편으로는 타 계층이나 집단을 냉혹하게 박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인류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지식이나 막연한 확신에서 벗어나는 데서 이성의 활로를 찾아야한다.
인간이 선에서 멀어지고 덕을 실현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음이 정념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정념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다. 감각 대상이 감각기관에 작용하는 동안 상념에 작용하듯이 정념도 동요가 멈출 때까지는 상념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은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하면 조그만 소리나 조그만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천둥소리나 뜨거운 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미약한 정념은 억제할 수 있지만 아주 강렬한 정념은 피나 정기의 동요가 멈춘 뒤에라야 억제할 수 있다.”각주2)
마음과 행위를 정념에 모두 맡기자는 의미는 아니다. 정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악용이나 지나친 것”은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정념만 보더라도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두 종류로 구별된다. 하나를 호의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선한 것을 원하게 하는 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욕망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정념이 욕망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욕망의 사랑에 몸을 맡길 때 유혹이 지배하고 정념에 의한 화를 부른다. 베르메르의 〈뚜쟁이〉에 나타나는 광경은 정념이 과도해지고 악용된 결과다. 당시 유럽에 성행하던 매춘 장면을 담았다. 왼편의 사내와 여인은 술잔을 들고 있고, 여인은 취기가 도는지 얼굴이 발그레하다. 붉은 옷을 입은 남성이 뚜쟁이에게 동전을 건네며 매춘 알선을 부탁한다. 벌써 욕망이 들끓는지 다른 한 손으로는 뚜쟁이 여인의 가슴을 더듬으면서 기대감에 한껏 부푼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중간에 있는 악사가 음흉한 눈빛으로 이 광경을 지켜본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덕의 수양이 정념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기존의 도덕률처럼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서 오는 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성을 통한 엄밀한 판단이 전제다. 정념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성에 기초하여 마음 안에 만족할 만한 것을 언제나 지니고 있기만 하다면 외부에서 오는 갖가지 유혹도 뿌리칠 수 있다. 이성에 의한 덕의 수양은 정념을 조율하고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에 유용하다.
스피노자도 데카르트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선이나 악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각주3) 기존의 선과 악 인식은 공동체 경험이나 관습에서 오는 감각적 사고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상적 감정 표출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만큼 판단과 행위의 기준으로는 부족함이 많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 진리를 규명하기 전에 이미 정해진 목적이나 절대적 선이 있으니 이에 따르자는 주장은 나침반도 없이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것처럼 위험하다.
데카르트보다 욕망과 정념 자체를 더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 자체다.” 인간의 모든 정념은 자기보존이라는 충동과 관련되어 있기에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떤 욕망인지, 또한 부정한 욕망일 때 얼마나 과도한지다. 용기나 관용도 일종의 욕망이다. “용기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관용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타인을 돕고, 우정과 유대를 맺으려는 욕망이다.” 절제 · 금주 · 위기상황에서의 침착함이라는 용기와 겸손 · 자애 등의 관용 상태에서 벗어나 있을 때 부정적 욕망이 자라난다.
스피노자가 제안하는 실천적 결론도 역시 이성을 통한 욕망 조절이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기의 권리가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안에 있으며 스스로 좋은 것을 알면서도 나쁜 짓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만큼 운명의 힘에 사로잡혀 있다.” 욕망이 과도해지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힘은 이성에서 온다. “이성에서 생기는 욕망은 결코 과도해질 수 없다.” 이성의 지도에 따르며 사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존재는 자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본성에 일치할 때 가장 유익하다. 이성의 지도에 따를 때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본성과 일치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입장에 반발한다. “신이 행동할 때 어떠한 목적과 선도 설정하지 않았다고 여기거나 또는 선이 그의 의지 대상이 아닌 것처럼 목적인을 제거하는 견해는 위험하다.”각주4) 이 세상에 정해진 목적이나 절대적 선이 없다고 여기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견해는 잘못이다. 신은 최선의 세계를 창조했다. 도덕적 질서를 포함하여 세상 만물이 질서를 갖추도록 만들었다. 절대적 선이 플라톤의 주장처럼 이데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에 의한 질서로서 선과 악의 구분 기준은 있다. 인간 정신은 이성적 진리와 사실적 진리가 혼재되어 있고, 오직 신만이 온전하게 이성적 진리를 실현하므로 도덕 역시 오직 신과 연결된 가운데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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