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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념론의 존재론과 인식론
변증법적 인식의 전면적 전개
칸트, 선험적 인식과 이율배반을 통한 변증법의 가능성
칸트의 인식론은 경험의 한계와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서 출발한다. 경험의 필요성과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은 원칙에서 출발하는 바, 원칙은 경험 과정에서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며, 동시에 사용이 경험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이성은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조건으로까지 올라간다.”각주1) 인식을 위해서는 경험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험이 무작위적이거나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성의 원칙을 사용해야 경험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경험이 필요하되, 이성의 원칙이 경험에 선행한다. 이성과 경험의 관계도 비가역적이다. “이성은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며 이성이 사용하는 원칙은 경험에 의한 비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하는 이성이 경험 과정에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지만, 경험이 이성의 원칙에 개입할 수는 없다.
경험은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다. “경험은 어떤 사물의 현재 상태를 가르쳐주지만, 사물의 필연성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에 우연적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 축적이 상대적 보편성을 제공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적 한계를 자체 내에 지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필연적 보편성이라고 볼 수 없다. 엄밀한 보편성은 경험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주어진다. “필연적 명제는 선험적 판단이다.” 경험 이전의 인식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아 프리오리(a priori)]으로 확실한 인식을 전제하고 이를 이성의 원칙, 확실성의 기준으로 삼아 경험에 사용해야 한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이성 원칙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류에 빠졌다. “라이프니츠는 현상을 지성화했다. 로크는 오성 개념을 감성화했다.” 라이프니츠는 객관 실체를 작용인과 목적인이 결합된 모나드로 규정함으로써 사물에 정신을 섞어버리는 오류를 저질렀다. 반대로 로크는 오성을 경험의 축적과 체계화로 이해하여 오성과 감성을 섞어버렸다. 이 모든 오류는 경험과 이성의 원칙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오성과 감성이 두 가지 전혀 다른 표상 원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전제로 오성을 선행 원칙으로 하는 양자의 결합을 통해 사물에 관해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칸트 철학은 경험 이전에 마련되어야 하는 선험적 원칙을 규명하는 것이 주된 과제다. 선험적 원칙의 기초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 직관에서 오는 표상이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표상을 통해 사물을 보고 구분한다. 직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대상이 주어질 수는 없다. “공간은 외적 경험에서 추상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외적 경험을 근거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공간 안에 대상이 없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으나, 공간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은 외적 현상에 의존하는 규정이 아니라, 외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즉 선험적 표상이다.
다음으로 “시간은 경험에서 유도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에서 현상을 없앨 수는 있지만, 시간 자체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고, 현상의 실재는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대상이 우리에게 직접 주어져서 어떤 관념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직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 직관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선험적 개념이 경험에 앞서고 이를 통해 걸러진 표상을 얻기 때문에 경험하는 대상은 결코 사물 자체가 아니라 한낱 현상일 뿐이다. 버클리의 현상론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티슈바인의 〈피그말리온〉에 나오는 조각은 사물 자체의 직접 반영이 아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뛰어난 조각가다. 탁월한 조각 솜씨를 발휘하여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상을 만들었다. 여인상을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원했는데, 아프로디테가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림은 자신이 만든 여인상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는 조각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칸트의 문제의식을 적용하면, 만약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각가가 실제 여인을 모델로 삼아 조각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선험적 의식과 무관한 대상을 직접 반영한 것은 아니다. 작가가 모델을 바라볼 때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직관 능력인 시공간 개념으로 걸러진 현상을 받아들인다. 여인의 전체 윤곽만이 아니라 신체 비례, 피부 색과 질감, 몸의 동작 등은 모두 선험적 표상 능력을 매개로 전달된다. 조각가는 표상으로 걸러진 현상을 상대하고 작품으로 표현한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적 직관 능력을 통해 걸러진 대상은 지성 작용을 통해 더욱 확실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계기가 모두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식은 성립할 수 없다. “직관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즉 감성적 직관이 없으면 대상은 아예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에 인식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개념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오성이 없으면 대상은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오직 양자의 결합으로만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오성을 통해 인식은 더욱 고도한 수준으로 나아간다. 오성은 감성과 달리 자발적으로 제시된다. “오성의 인식은 개념에 의한 인식이요, 직관적이 아니고 논증적이다. 모든 직관은 감성적인 것으로서 촉발에 의존하지만, 개념은 기능에 의해서 생긴다.” 직관은 대상에 직접 상관하지만 오성은 그렇지 않다. 오성의 상대는 직관에 의해 걸러진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성은 개념을 판단하는 자신의 기능에 의해 생겨난다. 이때 개념적 판단을 하는 오성의 형식으로서 칸트는 분량 · 성질 · 관계 · 양상을 제시한다.
오성은 이러한 개념적 형식을 구상력을 이용하여 직관에 의해 표상된 것의 관계를 구분 짓고, 표상의 객관적 타당성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라는 개념은 개별 대상 자체는 아니다. 직관에 의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개별 대상의 표상이 오성에 제공된다. 그러면 오성은 한편으로 표상을 재료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 분량 · 성질 · 관계 · 양상의 개념을 사용하여 일반화한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하고 원인과 결과, 가능성 · 현실성 · 필연성이라는 상호작용 형식의 개념을 적용하여 사고하는 구상력이 네 발 짐승의 형태를 일반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개’라는 개념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원인 개념은 물론이고 가능성 · 현실성 · 필연성도 공간 · 시간이라는 선험적 순수 표상과 마찬가지로 선험적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이성에 도달한다. “모든 인식은 감관에서 출발하여 오성으로 나아가고 이성에서 끝난다.” 직관 · 오성 · 이성은 모두 선험적 능력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오성은 직접 대상과 관계하지 않고 개념적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직관과 구별된다. 이성은 오성이 만들어낸 개념과 판단에 관계하고 선험적 능력에 더하여 논리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성과 구별된다. 이성은 논리적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추리 작용을 가능케 한다. “이성이 논리적 형식에 의해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추리하는 능력이다.” 또한 이성이 오성에 의한 개념만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고차원적 인식에 도달한다. “이성의 모든 인식은 개념에 의한 인식이거나 혹은 개념의 구성에 의한 인식이다. 전자를 철학적이라 하고, 후자를 수학적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사실은 칸트의 주장이 대단히 독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가 선험적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문제의식의 상당 부분이 이미 버클리를 비롯하여 기존의 경험론과 합리론에서 제기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둘을 결합시키려는 시도와 과정에서 독자적 기여가 나타날 뿐이다. 칸트의 독자성은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펼쳐나가는 이율배반의 논리 즉 변증법적 사고의 가능성에 있다.
자아 · 우주 · 신과 같은 관념에 접근할 때 객관 실체를 관찰하는 경험적 방법을 취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험을 초월한 형이상학 영역을 경험적 인식방법에 적용하면 네 가지 이율배반에 빠진다.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다. 또는 그것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물자체나 자아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할 때 시공간에 의한 제한과 시공간의 초월이라는 모순된 명제를 모두 포괄해야 하는 이율배반의 상황에 처한다. 마찬가지로 혼합물과 단순 부분의 관계, 인과성과 자유의 관계, 절대자의 존재 등도 같은 식의 이율배반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율배반이란 한 명제를 놓고 반드시 그 명제의 부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정도의 주장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상반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으로서 증명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한다.
기존의 모순율에 의하면 이율배반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상반된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이기 때문에 한 쪽을 폐기해야 한다. 하지만 칸트는 이율배반을 무의미한 상황으로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 가치를 부여한다. 오히려 모순을 목격함으로써 이율배반을 구성하는 명제 중 어느 하나만이 참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자체와 자아 등은 이윤배반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상 이율배반 즉 모순도 인정해야 한다. “모순율을 인식의 불가결한 조건으로 삼지만, 모순율을 인식의 진리성에 대한 결정적 근거로 삼지는 않는다.” 언뜻 보면 무슨 의미인지 잘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칸트의 문제의식을 세심하게 고려하면, 모순율은 경험 영역을 분석적으로 인식할 때 보편적이고 완전히 충분한 원리로서 시인해야 한다는 점, 하지만 형이상학 영역에서는 모순율을 진리성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고 이율배반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변증법의 핵심 개념인 모순을 이율배반 논리를 통해 정당화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 철학은 근대 철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피히테와 셸링, 대립물의 통일을 통한 변증법의 지평 확장
피히테와 셸링은 직관을 통한 표상이라는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직관을 대상으로 구상력과 판단력이 작용하는 오성 활동, 최종적으로 이성에 이르는 인식의 전 과정에 대해 칸트의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대체로 칸트 인식론과 차별화하기보다는 체계화 ·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인식론에서 칸트와 구별할 수 있는 독자성은 주로 변증법적 논리의 지평을 확장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칸트가 이율배반을 통한 모순을 인정함으로써 변증법의 돌파구를 열었다면, 피히테는 나아가 대립물의 상호 침투와 통일을 통해 한 단계 더 진전된 문제의식을 보인다. 칸트는 모순 상황 자체의 불가피성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모순되는 상황 안에서 대립물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리적 규명을 시도하지 않았다. 피히테는 바로 이 비어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먼저 대립물의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비아 안에도 역시 총체성과 같지 않고 오히려 제한된 활동성이긴 하지만 활동성이 정립된다. ··· 비아의 활동성은 자아의 수동성에 의해 규정되지만, 자아의 수동성은 자아의 활동성 감소 이후에 남겨진 양에 의해 규정된다.”각주2) 정립과 반정립의 명제인 자아와 비아는 단지 대립으로 멈추지 않고 대립 상황에서 서로 침투한다. 이를 활동성과 수동성을 통해 설명한다.
비아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자아와 비아는 모두 활동성과 수동성을 가지고 있다. 자아의 수동성에 대응하여 비아의 활동성이 작용하면서 둘 사이에 유기적 관계가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자아의 활동성에 해당하는 부분이 비아의 수동성과 관계한다. 즉 대립은 정태적 상황이 아니라 대립물의 활동성과 수동성을 매개로 한 능동적 운동 상황이다. 활동성과 수동성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체는 절대적 총체성을 형성한다.
대립물이 서로 침투하며 통일로 나아간다. “교체의 특징적 형식은 소멸에 의한 생성이다. ··· 실체 안에 출현하는 것 그리고 출현에 의해 억압되고 지양된 것만이 교체 안에 나타난다.” 대립물의 상호 침투는 서로의 변화 즉 교체를 불러온다. 대립물로서 자아와 비아는 서로 지양하고, 소멸과 생성으로 교체된다. 대립물이 침투해서 서로 부정하고 새롭게 통일된다는 변증법의 기본 골격을 제시한다. 다만 피히테에게 대립물의 부정과 통일은 오직 자아와 비아 사이에 일어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즉 피히테의 변증법적 원리는 객관 세계 자체 내에서 전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 안에서의 단순한 마주침 또는 자기 접촉에 의해 자아의 활동성에 의한 대립과 총괄이 가능해진다.” 오직 의식과 마주쳐야만 가능하다. 주체의 의식과 맞물릴 때만 변화와 통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관념적 성격을 전제로 한다.
셸링 역시 절대적 자아를 확고한 정립 명제로 하고, 이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비아를 설정한 후 양자의 대립과 통일을 모색한다. “자아가 절대적이라면, 자아가 아닌 것은 오직 자아와의 대립 안에서만, 따라서 자아의 전제하에서만 규정될 수 있으며, 나아가 단적으로 정립된 비아 즉 반정립되지 않는 비아는 일종의 모순이 된다.”각주3) 경험론의 오류는 모든 자아에 선행적으로 비아를 정립한 데서 발생한다. 반대로 합리론의 오류는 모든 비아를 배제하면서 자아를 정립한 데서 발생한다. 경험론과 합리론을 결합하고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절대적 자아를 정립 명제로 하되 반정립의 비아를 대립물로서 일상적으로 연관 짓는 변증법적 통일 과정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자아와 비아의 대립은 종합과 통일로 나아간다. “정립은 절대적 존재고 자아 안에 그리고 자아에 의해서만 근원적으로 규정된 절대적 정립 가능성이다. 반정립은 절대적 비존재고, 자아에 대한 대립 안에서만 규정 가능한 절대적 비정립 가능성이다. 종합은 자아로의 수용에 의해 규정 가능한 제약된 정립 가능성이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강조한 셸링답게 피히테에 비해 절대적 자아의 일차성을 더욱 강조한다. 대립과 통일 과정에서 모든 대립을 배제하는 주체는 절대적 자아다. “일자로서의 무제약적인 것이 인식의 전체 계열을 제약하고, 모든 사유 가능한 영역을 기술하며, 인식의 전체 체계를 통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 실재성으로서 지배한다.” 심지어 자아를 일자(一者)로 규정한다. 일자로서 절대적 자아는 대상을 통한 제약이 배제된 순수 자아를 의미한다. 피히테에게 절대적 자아가 비아와 통일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면, 셸링에게 절대적 자아는 비아와 대립하기 이전에 순수하게 정립된다.
비아는 대상과 결합된 경험적 자아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셸링에게 주요한 대립과 통일은 “순수 자아와 제약된 경험적 자아의 모순 해결” 이외에 다름 아니다. 순수 자아와 경험적 자아로서 비아가 동일하게 정립되는 최고 단계에 이르기까지 종합에서 종합으로 계속 나아간다. 모순의 해결은 오직 순수 자아로서 절대적 자아가 주도해야만 가능하다. 피히테에 비해 셸링은 변증법의 관념성을 더욱 강화한다.
헤겔, 관념론적 변증법의 완성
헤겔은 기존의 합리론과 경험론만이 아니라, 칸트에서 피히테와 셸링으로 이어지는 관념론을 비판함으로써 독일 관념론의 완성으로 나아간다. 특히 합리론과 경험론을 넘어서는 관념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도 먼저 관념론 내의 오류와 편향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관념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의 선험론과 형식주의다.
먼저 칸트의 선험적 원리를 비판한다. 칸트는 신이나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기 전에, 인식 능력이라는 도구 자체를 미리 검토해야 하며, 이를 선험적 원리를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도구는 미리 검토할 수 있으나 인식만큼은 인식하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 결국 인식 능력이라는 도구를 검토하는 작업은 곧바로 인식 자체를 검토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칸트의 선험적 원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 논리다. 인식하기 전에 인식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물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하는 법을 배우겠다는 터무니없는 것”각주4) 이다.
선험적 원리는 학문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도 한다. “지를 선취하거나 예단하여 절대적인 것이 주체라고 하는 생각은 절대적인 것의 개념을 실현하기보다는 오히려 개념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각주5) 경험 이전에 세워지는 원리는 명확한 인식을 오히려 방해한다. 왜냐하면 선험적 원리란 지극히 일반적 규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동물’이라고 얘기할 때 이 말이 곧 동물학 개념으로 통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이라는 생각이 선험적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나타낼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등의 낱말은 우리 머릿속에 직접 떠오른 것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선험적 원리는 개념의 자기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다. 선험적 개념은 매개 없는 단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동의 점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정지된 개념을 절대화함으로써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개념 확립을 방해한다.
운동을 상실한 선험적 개념은 형식주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칸트는 개념을 “생명 없는 도식으로 꾸며내 학문적 세계를 한낱 일람표 정도로 전락”시켜 놓았다. 제약과 무제약, 혼합물과 단순 부분, 인과성과 자유, 존재와 비존재 등의 개념은 대립되는 쌍의 형식적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도무지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내적 생명력을 지닌 존재의 자기 운동 대신에 직관이나 감각적 지각에 의한 단순 규정을 표면적 유추를 통해 도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를 내기는 곤란하다. 개념 간의 운동이 빠져버린 형식주의적 개념 나열은 구체적 내용을 상실하고, 관념적 단언만 떠드는 독단주의에 빠진다.
헤겔은 개념이 내면으로 복귀하여 자기 본체를 파악하면서 동시에 대상과 일체가 된다는 점에서 “학문은 교활한 면이 있다.”고 한다. 칸트의 형식주의와 달리 주체가 자기를 해체하여 전체 속에 맞물려 들어가는 행위를 스스로 지켜보는 내밀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참다운 사상과 학문적 통찰은 오직 개념의 노동 속에서만 얻어진다.” 개념의 나열이나 대조가 아니라, 교활할 정도로 섬세한 개념의 자기 운동을 통해 학문은 발전한다.
헤겔은 대립물이 상호 침투와 지양을 거쳐 통일로 나아가는 피히테의 변증법적 논리를 적극 수용한다. 하지만 “자아는 존재한다.”는 동일률을 정립 명제로 출발하는 피히테의 논리에는 비판적이다. ‘’라는 형식을 띠는 피히테의 동일률 아래에서는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은 있을 수 없고 일체의 것이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특히 동일률을 의심할 수 없는 제1원칙으로 내세우는 관점은 내용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인식을 회피하기에 스스로 인식력의 결여를 드러낸다. 내용이 없는 동일률에 기초한 존재는 죽은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 선험적으로 주체를 고정시키면 주체는 자기 내용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대상의 속성이나 술어의 편에서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주체가 상실되고 대상이나 술어가 본체가 되기 때문에 “사유가 반격을 당하는 셈”이 된다.
제1원칙으로 삼아야 할 주체는 생동하는 실체 즉 현실적 존재여야 한다. 주체는 동일률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타자화하는 가운데 자기와의 매개”를 행해야 한다. 자신을 타자화하는 분열 과정을 거쳐 회복된 동일성 즉 “밖으로 향하면서 곧 다시 자기 자체 내로 반성 · 복귀”한 동일성만이 진정한 주체이자 실체다. 최초의 직접적 통일과는 다른 이 두 번째 동일성이 바로 진리다. 피히테가 아무런 대립도 없는 자아를 주체로 설정한 후에 변증법적 대립과 통일 과정을 시작했다면, 헤겔은 자아조차도 대립과 통일의 산물이어야 했다.
주체 자신이 분열과 통일의 과정을 거쳐 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에 철학은 첫 발걸음부터 회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참다운 지를 향한 도정은 회의의 길로 볼 수 있고, 더 정확히 말하면 절망의 길이다.” 순수하게 절대적 명제라고 여기던 지가 진리를 벗어난 것임을 통찰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이때 회의주의는 인식의 대상만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 자신에게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이 분열과 절망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칸트처럼 내용은 사라진 채 단언에서 시작하는 형식주의에 빠진다.
티슈바인의 〈사람을 찾는 디오게네스〉에서 보듯이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손에 늘 등잔을 들고 다녔다. 대낮에도 등잔에 불을 켜서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등잔을 들고 있는 디오게네스의 눈빛이 날카롭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롱하는 듯한 표정이다. 당연히 환한 대낮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등잔을 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진정한 인식을 갖고 행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다. 하지만 헤겔의 논리대로라면 먼저 등잔이 향해야 하는 방향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절대적 자아를 전제로 세상을 향하는 시선이 아니라, 타자와 대립과 분열의 한가운데에 있는 자기 내면을 탐구하고, 또한 이를 통해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을 교활할 정도의 면밀한 시선으로 탐구해야 한다.
칸트나 피히테처럼 절대자를 출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여야 한다. 절대자를 향한 길의 첫 단계는 감각이다. 변증법적 대립과 통일 과정에서 “최초에 등장하는 지 즉 직접적인 정신은 정신이 비어 있는 감각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확신은 사물의 상이나 사태의 존재를 직접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부터 변증법적 운동은 경험하는 과정에 이미 개입된다. 왜냐하면 감각적 확신은 경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데, 경험은 우리가 구태여 조명한 결과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주체와 대상은 서로 맞물려 들어간다.
다음으로 지각을 통해 감각적 개별 사물과 사태를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각은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은 표면상의 수용이 아니라 필연성을 따른 수용 방식”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단순히 개별 대상의 나열이 아니라 구별이나 다양성과 같은 매개와 부정의 관계를 통해 인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부정의 관계는 대상을 구별하기 위해 이것이 아닌 다른 것, 혹은 이것을 지양한 것이라는 사고가 개입됨을 의미한다. 부정의 작용을 통해 사물의 갖가지 성질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소금은 단일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많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흰색이나 짠맛과 함께 정육면체이면서 일정한 무게도 갖고 있다. 이 모든 성질은 그것과 대조되는 성질 즉 다른 색 · 맛 · 모양과의 부정적 관계 위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대조되는 성질은 “사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 즉 눈이나 혀나 손에 귀속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요소를 별도로 존재하게 하는 공통의 매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대상의 개별성과 함께 지각을 통해 성질이라는 일반적인 것이 개입되기 때문에, 개별성과 대립하여 개별성의 제약을 받는 보편적 성질이 나란히 있다.
지각 다음에 오성 단계가 온다. 오성은 표면적 성질을 구별하고 일반화하는 것을 넘어서 “사물의 내면과 간접적으로 관계하며 오성을 작용시키는 가운데 두 힘의 유희가 벌어지는 한복판을 관통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물의 진정한 배후를 투시”한다. 이를 통해 겉으로는 우연으로 보이는 현상 배후에 일반 법칙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오성은 아직 어떤 일반 법칙이 있음을 알 뿐, 법칙의 구체적 내용에 이르지는 못한 단계다. 자신과 대상의 개별성만이 아니라 보편적 법칙성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립한 동일성은 “구별에 대립해 있는 추상적 단일성”이다.
피히테처럼 스스로 순수하게 정립되는 자아가 아니라 자기를 지양하는 운동 즉 분열을 통해 단일성을 얻는 자아가 만들어진다. 즉 주체로서 자아가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과 대치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기의식이고, “이제야 비로소 자기의식은 스스로가 타자화되는 가운데 자기통일의 성립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에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논리를 전개한다. 타자와 관계하는 자기의식이 노예라면 이 관계를 다시 고찰하는 자기의식은 주인이다. 주인은 욕망을 통해 사물과 관계하는 자기의식을 고찰한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순수하게 자립적 자기의식 즉 주인에게 자신을 제공한다. 이렇게 주인과 노예가 욕망과 노동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대립하면서 통일된 존재가 바로 진정한 자아다.
자아에 대한 자기 확신을 거쳐 최종 단계인 이성에 도달한다. 이제 스스로가 타자와 통일되어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타자 존재와 구별하는 부정적 관계는 긍정적 관계로 바뀐다. 타자와 자아의 통일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을, 또한 모든 현실도 이성임을 인식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성이란 곧 ‘온갖 실재’라는 의식의 확신”에 이른다. 이제 자기의 사유가 그대로 현실이 되면서 의식은 곧 관념론 입장에서 현실과 관계하기에 이른다. 현실이 이성과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관념론은 동시에 절대적 경험론”이다. 이성이란 외부의 충격을 받아서 다종다양한 감각이나 표상을 받아들이는 일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 곧 온갖 실재이기 때문에 이성은 세계 전체에 관심을 갖는다. “이성이 자신을 세계로 그리고 세계를 자신으로 의식하기에 이르렀을 때, 이성은 곧 정신이다.” 세계가 곤 이성이고 이성이 곧 세계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각주6) 라는 유명한 명제가 여기에서 도출된다. 철학은 자연적 우주의 고찰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우주를 고찰할 때도 이 확신에서 출발한다. 다만 ‘현실’의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백과》 서문에서 보완하고 있듯이, “우연적 실존은 현실이라고 부르기에는 걸맞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맞닥뜨리고 있는 구체적 현실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은 감각과 경험의 단계에 속한다. 이성과 현실의 통일을 논할 때 현실은 이성 단계에서의 현실 즉 지각과 오성을 거쳐 추상화된 현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종적으로는 관념론 틀 내에서 현실과 이성의 관계 규명이다.
이성과 현실의 통일이라는 명제를 통해 인륜 정신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개인의 반영된 상으로 나타날 때는 자각된 정신이 되고 개인을 자체 내에 포함할 경우에는 본원적 실체가 된다. 이를 현실의 실체로 보면 ‘민족’이고 현실적 의식으로 본다면 민족성원으로서의 ‘시민’이다.”각주7)
이성과 현실의 통일은 개인 차원에서의 자각을 넘어서 민족정신이나 시민정신과 같은 인륜 정신을 포함한다. 시민 의식은 단일한 민족정신을 본질로, 정신의 현실체인 민족 전체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신하면서 민족 속에 자기의 진리가 안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성의 보편성은 개념적 성격을 넘어서 현실의 민족과 인륜성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민족은 이제 임의적 · 비현실적 설정이 아니라 확고한 바탕 위에 군림하는 인정된 정신으로서 자격을 갖춘다. 개념의 자기 운동으로서의 변증법은 최종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내놓음으로서 완성된다. 헤겔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다분히 사유 원리와 존재 원리의 일치를 근거로 정신 법칙이 역사를 실현시킨다는 셸링의 논리에 힘입은 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은 모순을 정당화하는 데 있어서는 칸트, 정립과 반정립과 종합이라는 3단계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점에서는 피히테의 논리에 의존한다. 그리고 사유와 존재가 일치함으로써 정신이 현실을 실현시킨다는 점에서는 셸링의 문제의식에 의존한다. 그러면 변증법에서 헤겔의 독자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피히테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변증법적 사고를 적용한다면, 헤겔은 주체 자체의 성립 과정에서부터 변증법적 원리를 적용한다는 데서 즉 내재적 변증법이라는 면에서 결정적 차별이 보인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자아를 분열된 자아로 즉 사물과 연결되어 있는 자기의식을 순수한 자기의식을 통해 다시 고찰함으로써 자기 내로 복귀하는 시도는 이중적 변증법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변증법의 역동성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절대자를 전제가 아닌 과정과 목적의 문제로 설정함으로써 형식주의적 변증법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차별성과 독자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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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변증법적 인식의 전면적 전개 – 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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