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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와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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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철학

차이 생성과 욕망의 철학

미시권력과 통제사회로의 이행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체주의 국가와 파시즘을 비교하면서, 미시권력에 대한 푸코의 문제의식을 수용한다. “파시즘은 나치 국가 안에서 전체적으로 공명하기 이전에 이미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건너뛰고 급격히 번식하는 분자적 초점들과 분리할 수 없다.”각주1) 전체주의는 전체적으로 집중된 국가를 통해 거시적 지배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파시즘 국가는 사회 내의 다양한 부분에서 점과 점으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미시적 단위를 생산해낸다.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성격의 파시즘 단위를 확대 재생산한다. 국가 전체로서의 파시즘으로 집중되기보다는 농촌 · 도시 · 지역 차원에서 각각의 조건에 밀착한 파시즘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청년층 · 노년층, 가족 · 학교 · 직장 심지어 우익 · 좌익 등 각각 서로 다른 성격의 단위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번식하는 파시즘을 창출한다.

미시권력이 권력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혁명은 방향을 상실한다. 국가권력 중심으로 집중된 전체주의는 상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하기에 한 곳을 향해 질주하면 됐지만, 분산된 미시권력 상태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갈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심지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바로 이것이 권력의 중심이 능력에 의한 지배보다 회피와 무능력에 의해 훨씬 더 잘 정의되는 이유다.” 미시권력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외면상 지배계급의 장악력은 약화된 듯 보이고 심지어 무능력해보이기조차 한다. 하지만 회피의 효과에 의해 저항에서 비켜남으로써 권력의 안정성과 실질적 지배력은 오히려 높아진다. 사회 각 분야에 마치 모세혈관처럼 분화된 권력에 의해 권력의 편재 즉 어디에나 권력이 있는 상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권력의 편재는 개별 단위를 넘어 단위에 속한 개인으로까지 파고든다. “그것은 더 이상 장군이 아니라 하급 장교와 하사관, 내 안에 있는 군인이며 ··· 갈등과 힘 관계를 갖는 개인이다.” 권력의 효과는 분자적 단위 내의 구성원으로 침투한다. 군대라는 권력을 유지하는 힘은 이제 모든 권한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무서운 장군이 아니라 직접 병사와 생활하는 말단의 상급자, 심지어 병사 자신 안에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장이나 권한을 가진 교사가 아니라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나뉘어 스스로 경쟁의 도가니로 뛰어드는 학생 스스로에 의해 학교의 지배는 행사된다. 억압받는 자 스스로가 권력의 수호자가 된다.

국가 문제에 대한 들뢰즈의 독창성은 미시권력의 규명보다 ‘통제사회’ 운영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푸코는 징계사회를 18~19세기로 설정해놓았다. 징계사회는 20세기 초에 절정에 달하여 거대한 감금의 공간을 형성했다. ··· 현재 감옥 · 병원 · 공장 · 학교 · 가정 등 모든 감금 장소의 전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 지금 한창 ‘징계사회’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 ‘통제사회’다.”각주2) 푸코가 제시한 징계사회에서 개인은 닫힌 공간에서 또 다른 닫힌 공간으로 끊임없이 전전한다. 가정에서 학교, 병영과 공장, 때로는 병원이나 감옥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장소는 독립적 규칙을 지닌 감금의 공간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감금의 공간은 더 이상 폐쇄적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의 발전, 사회와 생활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흐름 등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 폐쇄적 체제에서 징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던 방식에서 통제 방식으로 지배 형태가 변화된다.

징계사회의 감금과 통제사회의 통제는 서로 다른 원리에 기초한다. “감금은 변별적 주형이지만, 통제는 변조 즉 순간순간 스스로 변하는 주형 혹은 이리저리 변형될 수 있는 그물과 같다.” 감금은 꽉 짜인 규율과 일탈에 대한 징계라는 고정된 형식이 지배한다. 하지만 통제 방식은 훨씬 유연하다. 규율은 느슨해지고 징계는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과거 감금 공간으로서 공장은 세부적 작업 규칙과 정직 · 감봉 등 제재조치를 통해 움직였다.

하지만 현대 기업은 자율적 통제 형식을 지닌다. 성과급이나 상여금 등을 통해 봉급 크기를 철저히 조절하면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경쟁 논리, 근로 도덕을 내면화한다. 노동자가 규율의 감시자이자 자기 통제 역할을 함으로써 지배는 안정화된다. 공장의 감금과 징계 체제 아래에서 개인은 노동조합을 통해 눈에 보이는 감시자이자 징계자인 고용주에게 집단적 저항을 조직하는 데 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봉급제도의 변화를 통해 노동자 내부 경쟁이 주요 측면으로 부각됨으로써 계급적 단결과 투쟁은커녕 노동자 사이의 감시와 통제, 이간질이 대신한다. 경쟁을 통한 자기 검열과 자기 통제 논리는 기업을 넘어 학교나 지역 등 전 사회로 확대된다.

같은 통제 원리가 지배하면서 이제 미시권력 단위와 단위 사이의 경계는 없어진다. “징계사회에서는 끝없이 다시 시작하게 되어 있었는데, 통제사회에서는 아무것도 끝이 나지 않는다.” 징계사회는 서로 다른 규율과 징계를 가진 독립적 단위를 전제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학교에서 병영으로, 병영에서 공장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규율에 속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작과 끝이 없다. 무한히 지속되는 경쟁과 통제만 있다. 학교에서 학생 사이의 경쟁과 기업에서의 노동자 사이의 경쟁은 형태가 바뀌었을 뿐 같은 성격의 통제 원리로 작용한다. 바뀌는 것은 없다. 오직 통제의 뫼비우스 띠에서 구분할 수 없는 안과 밖이 있을 뿐이다.

통제사회로 변화하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저 새로운 무기를 찾을 일이다.” 노동조합을 비롯해 사회 각 단위가 징계사회에서의 투쟁 방식을 통제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때 성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변화된 지배 원리에 대응할 새로운 투쟁 형태를 고안해내야 한다. 과연 노동조합이 그러한 투쟁 형태에 맞는 조직 단위일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 스스로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연수와 평생교육을 요구하는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엇에 이용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전통적 의미의 정치투쟁도 미시권력의 지배적 작용 아래에서 나아갈 방향을 못 찾는다. “뱀의 고리들은 두더지 굴의 구멍들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징계사회보다 훨씬 어려운 통제사회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새로운 저항형태를 고안해 제시할 뿐이다.

지식인의 종언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자를 비롯한 지식인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혹은 예술가는 민중을 창조해내는 일에 전적으로 무능하다. 단지 전력을 다해 민중에게 구원을 청할 수 있을 따름이다.”각주3) 철학자는 현실의 예속과 수치,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공유할 수 있지만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능력은 없다. 이론이 기표의 미로에서 헤매는 마당에 현실의 이해조차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애초에 민중의 힘은 완결적 이론이나 특정 지식에 의존하기보다는 가공할 만한 경제적 · 사회적 고통 속에서만 창조될 수 있기에 지식인의 주도적 역할은 더욱 제한되어 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민중 자체에서 나오며 지식인은 여기에 의존한다. “철학은 세 번 재영토화한다. 한 번은 그리스인에 의거하여 과거 안에서, 또 한 번은 민주국가를 토대로 현재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새로운 민중과 땅에 기초한 미래 속에서다.” 철학은 재영토화 즉 새롭게 의미작용을 받아들이면서 변해왔다. 정치변혁으로 좁혀서 보자면 그동안 철학은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와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의미를 확보해왔다. 이제는 민중을 통해 새롭게 의미를 충전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을 인정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단순히 현실을 변혁하는 최종적인 물리적 힘이 민중에 있다는 언급이 아니다. 그동안 지식인의 역할로 인정되어 왔던, 현실 이해와 변화의 방향 · 방법 등도 민중에게서 생성된다는 주장이다.

리오타르는 더 분명하게 지식인의 위상이 변했음을 강조한다. 기존의 지식인상, 특히 실존주의의 한 축을 담당한 사르트르는 우리가 희망하는 지식인의 상을 정해놓고 이를 지식인 개념으로 만들어놓았다. “지식인의 책임은 보편적 주체의 이념과 분리될 수 없다. 볼테르 · 졸라 · 사르트르가 공인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책임 때문이다.”각주4)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보편적 지식인이 존재하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엄밀하고 정확히 접근하기 위해서는 희망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이 존재하는 형식이나 양태를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지식인은 계획 입안자, 전문가 등 행정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책임을 떠맡고 있거나 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다.

지식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학교나 연구소에서 사회적으로 훈련시킬 때, 보편적 주체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최상의 수행성을 실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오늘날 교육에서 요구하는 것은 계몽된 시민의 육성이 아니라, 수행적 직업교육이다. ··· 지식의 획득은 더 좋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적 자격부여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행성은 최소 투입으로 최대 산출을 만들어내는 것 즉 효율의 극대화에 의해 규정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혹은 그것이 옳은지에 대한 즉 목적에 대한 고민은 상실한 채 재정과 시간의 이득이나 손실, 작동 결과에 대한 평가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기술적 기준에 해당하는 지식만을 축적한다. 분업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지식인은 이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존재다. 확장된 분업 조건이 그물처럼 촘촘하고 강하게 전문 기술자들을 옭아매고 있다. 이 조건을 벗어나서 전문 기술자는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전적 의미에서의 지식인이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다.

사회적 모순의 폭발이 일어난다고 해서 지식인의 보편적 역할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전문기술자로 전락한 지식인에게 학문적 양심 따위는 사라졌다. 전문기술자들은 대중이 자신의 견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의 수신자는 대중이 아니다. 예술가, 작가 등의 공동체는 더욱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자신의 수신자인지 모른다.” 만약 대중의 반응에 예민하게 신경 쓴다면 그토록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나 문장을 동원해서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전위적 음악이나 무용, 혹은 현대 미술은 일반 대중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제기돼도 학자나 예술가는 철저하게 무시해왔고, 점점 더 난해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 현실에 어떤 대중적 메시지를 제시하고, 사회와 인간을 변화시킬 세계관을 제기해 대중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보편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푸코는 보편적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하지만 아직 지식인에게 미련이 남은 듯하다. 자신이 속한 전문 영역에서 역할을 하는 특수적 지식인이라는 기능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리오타르가 보기에는 그마저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위기의 깊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사르트르 · 촘스키 · 네그리 · 푸코 같은 사람들이 굴복한 비극적 오류에 대해 생각해보라. ··· 이런 과오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명부 속에 기재되어야 한다.”각주5) 보편적 영역이든, 특수한 영역이든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다. 보편적 영역이냐 특수한 영역이냐를 가리지 않고 무명의 대중이 지식인의 허락 없이 자기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행동하고 있다. 과거에 지식인이 하던 역할을 이제 대중이 스스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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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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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철학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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