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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대상을 넘어
팝아트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해밀턴(Hamilton)의 〈네 개의 자화상〉은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을 유화 물감으로 여기 저기 가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하듯이 빠르고 거칠게 칠해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워낙 선명한 색조여서 사진보다 물감이 더 두드러진다. 화가가 물감 틈새로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하다. 자화상의 주인이 색이고, 화가는 색과 붓질에 의해 뒤로 물러서 흐릿한 상태다. 사실적 재현이든 아니면 표현주의 방식으로 변형을 거쳤든, 그간의 자화상은 화가의 특징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색은 화가의 외모 특징이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해밀턴의 자화상은 노골적으로 자기 특징을 가리거나 지우는 작업이다. 오히려 화가의 얼굴이 낙서처럼 보이는 색칠 작업의 수단이다.
- 1~4〈네 개의 자화상〉
해밀턴, 1990년
몇 가지 점에서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왜 스스로를 가리거나 지웠을까? 형태와 구조를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전통적 회화와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찾으려 하면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맬 것이다. 의미가 아닌 색의 사용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후기구조주의가 주장하는 의미의 비결정성을 반영한다. 화가가 우연한 손놀림으로 칠한 색이 자신의 사진과 만나면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우연한 마주침에서 의미 결정체로서의 구조나 주체는 사라진다. 가려지고 지워진 자신, 작가로서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해석 가능한 텍스트로서의 자신이 남는다.
왜 네 개의 얼굴을 하나의 자화상에 담았을까? 대부분의 화가는 서로 다른 시기의 모습을 따로 화폭에 담음으로써 인생의 궤적을 볼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해밀턴의 네 얼굴 사이에는 어떠한 시간적 · 공간적 서열도 발견할 수 없다. 시기별 나열도 아니고 특정 공간에서의 의미도 없다. 중심을 지닌, 일관된 논리적 체계로서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후기구조주의의 발상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한 네 개로 분할시킴으로써 단일한 주체라는 환상을 거부한다. 나아가서 네 개의 얼굴을 배열하되, 서로 다른 색과 붓 흔적이 결합됨으로써 동일성을 부정하는 반복, 차이로서의 반복을 드러낸다.
자화상 재료로 사진을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팝아트 화가들은 같은 대상을 다르게 반복하는 작업을 자주 선보인다. 수많은 복사본을 인정하고,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반복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로 한다는 후기 구조주의 핵심적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같은 대상을 우연히 그리고 다양하게 재현함으로써 단일한 절대 재현을 거부하고, 역설적으로 재현에서 벗어난다. 선험적 · 보편적 구조를 강조한 초기구조주의에서 벗어나, 구조의 상대성 · 유동성 · 불안정성 ·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자신을 포함한 텍스트를 다양하고 끝없이 해석할 가능성이 열린다.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구분 자체가 논란 대상이다. 문화 · 예술 분야에서 나타나는 다양하고 파격적인 스펙트럼을 근거로 둘 사이 간격을 확실히 떼어놓으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질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이성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적 도그마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려 한다는 점, 중심을 전제로 한 질서의 거부, 주체와 주체, 사물과 사물, 주체와 사물 사이의 경계 개념 와해, 단일하거나 보편적인 의미의 부정과 불확실성 강조 등에서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 특히 들뢰즈의 문제의식이 미친 막대한 영향을 지나칠 수 없다. 대표적 사상가로 들뢰즈(Deleuze, 1925~1995), 데리다(Derrida, 1930~2004), 리오타르(Lyotard, 1924~1998) 등이 있다.
객관 세계에 대한 이해
들뢰즈는 일관된 질서 개념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부정한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발상도 성립할 수 없다. “세계를 만드는 신의 계산은 결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 계산이 잘 맞아떨어진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언제나 어떤 잔여와 같고, 세계 안의 실재는 오로지 가분수나 심지어 무리수를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각주1) 세계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물이 아니다. 만약 정확한 계산이 적용됐다면 불규칙한 산과 강의 경계, 종잡을 수 없는 대기 변화 등이 나타나는 현실의 자연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사불란한 법칙과는 무관한 우연과 차이, “고도차 · 온도차 · 압력차 · 장력차 · 전위(電位)차 · 강도차 등의 상관항”이 핵심으로 작용했기에 현실이 다양해졌다. 세계는 두 개 이상의 불균등하고 비동등한 것이 마주치면서 생성됐다.
우리가 신의 작품으로 여기는 멋들어진 산과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강을 처음에는 흉물처럼 느낄 수도 있다. 끝 모를 정도로 펼쳐진 평원에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땅을 뚫고 치솟은 산맥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실제로 거대한 산맥은 지구 표면 아래 흐르는 판과 판이 충돌하면서 솟아오른 지형이다. 우연한 마주침과 불균등성이 만들어낸 부조화의 산물이다. 오랜 세월 그 안에 살면서 부조화 상태를 조화라고 생각할 뿐이다. 자연이 조화로운 유기체에서 출발했다는 사고방식은 근거가 없다. “카오스에서 환경과 리듬이 탄생한다. 극히 오래된 우주기원론의 문제다.”각주2) 자연은 유기체가 아니라 혼동 속에서 진동하면서 만들어졌다. 생성 이후 일정한 리듬과 함께 주기적 반복이 생겨났지만 자연의 법칙과는 거리가 멀다. 일정한 코드가 만들어져도 항상 변환 상태에 있다. “환경 개념은 단일하지 않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환경 역시 이행한다.” 우주는 질서정연한 체계인 코스모스라는 말보다는 서로 다른 환경의 충돌과 변화 안에서 리듬을 갖는 ‘카오스모스(chaosmos)’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리오타르도 “무한의 형태로서 신과 자연은 붕괴되어야 한다.”각주3) 라고 강조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시간 · 공간과 인과율의 제약에 물질이 순응하는, 전통 물리학의 세계 관념은 설득력이 없다. “물리학은 실재의 제약에 순응하는, 애매성이 없는 객관적 물질을 전제한다. 사실을 믿는 것은 잘못이다. 기호만이 있다.”각주4) 객관 물질을 통해 물리학 법칙을 이끌어낼 때, 물질은 기표에 의존하는 언어로 규정된다. 사물 사이에 기계적 법칙이란 없다. 사물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물의 운동은 더욱더 언어에 의해 표현된다. 세계에 관한 모든 규정은 함축적 · 복합적 언어활동이다. 사실이 아닌 기호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스스로 고정된 질서를 재생산하지 않는다. “객관성은 세계의 상태라는 명확한 내용 혹은 고정된 본질이라는 관념적 의미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이해
자립적 · 이성적 주체의 소멸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구분 중의 하나가 주체의 위상 문제다. 이미 둘 사이의 경계에 있는 푸코와 라캉에 의해 주체는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위치에 처했다. 들뢰즈는 이를 더 밀고 나가 자립적 · 이성적 주체의 죽음을 선고한다. “화자는 하나의 거대한 기관 없는 신체다. ··· 비자발적 감수성과 기억력, 비자발적 사유는 여러 기호에 대해 기관 없는 신체가 매순간 보이는 강렬한 전체적 반응이다.”각주5) 우리는 기관 없는 신체다. 그가 규정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작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당황케 하는 ‘기관 없는 신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인간을 거미에 비유해서 기관 없는 신체의 의미를 설명한다. 거미는 눈 · 코 · 입과 같은 감각 기관이 없어서 보거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뇌 기관이 없어서 지각이나 기억 기능도 없다. 그저 거미줄 꼭대기에 앉아 파장을 타고 몸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전형적 감각 기관이 없는데도 진동을 느끼자마자 정확히 먹이에게 덤벼들어 거미줄을 감아댄다. 거미줄을 통해 전달되는 미세한 진동은 기호에 비유될 수 있다. “미세한 기호는 거미에게 침투해 들어간다. 기호는 파장처럼 신체를 관통하고 먹이에게 덤벼들게 만든다.” 각각의 줄을 기호가 건드리고 거미가 비자발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정신에 의해 사고가 출발하는 주체가 아니다. 주어진 기호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비자발적이다. 감각과 무관하게 독립적 기능을 하는 정신이 성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스로의 감각기관 작용으로 객관 사물이나 사건의 경험적 정보를 직접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언어로 표현된 기호 상태의 정보를 접촉할 뿐이다. 기호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긴다. “현대는 시뮬라크르 곧 허상의 세계다.”각주6) 푸코는 기표가 기의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 상태 속에 있는 의심스러운 주체를 사고했다. 하지만 들뢰즈는 기표가 기의에서 분리 · 독립하고 스스로 실체가 된 상태에서, 허상의 세계 안에 있는 주체에 주목한다. 사실에서 분리된 허구적 기호가 건드릴 때 우리는 반응한다. 사실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상태로 특권적 지위를 점유한 기표에 반응하며 사고할 때 우리 스스로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일상생활에 발이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된 논의가 아니다. 철학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지금까지도 서양 철학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표적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뒤샹의 콧수염을 기른 모나리자를 생각하듯, 철학적으로 털투성이인 헤겔과 철학적으로 면도한 마르크스를 상상한다. 이제 과거의 철학 책에 대해 말하되 마치 상상의 책, 위조된 책인 듯이 말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일단 뒤샹(Duchamp)의 〈콧수염을 기른 모나리자〉가 어떻다는 것인지 알아야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뒤샹은 어느 날 다빈치의 〈모나리자〉 사진이 있는 엽서에 낙서를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듯 검정색 팬으로 얼굴에 수염을 그린 후 밑의 여백에다 ‘L.H.O.O.Q’라고 적었다. 프랑스식 발음에 연음을 적용하여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는 통속적 은어가 된다. 뒤샹의 괴팍한 수염과 은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수염은 단지 모나리자의 얼굴을 훼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묘사를 넘어 서양 미술을 대표할 정도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뒤샹은 그 권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수염과 문자를 덧붙이는 행위만으로도 새로운 미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 작가의 예술적 창조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작가의 독립적 창조 정신에 의해 예술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예술에 대한 전통적 정의와 관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확고한 주체로서 작가의 유일무이한 독창성과 작품의 현존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헤겔과 마르크스에게도 철학적으로 비슷한 작업을 한다. 깔끔한 헤겔의 얼굴에 털을 그리고, 마르크스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수염을 밀어버린다. 권위가 형성된 모든 철학자에게 필요한 작업이다.
지금까지 모든 철학자는 명석한 정신에 의존해서 객관 사물이든 아니면 객관과 주관의 통일 상태라고 강변하는 개념이든 어떤 사유 대상을 규명하려 했다. 하지만 철학적 사유의 전제로 여겨졌던 주체와 정신 자체가 허구일 수 있다. “정신은 정신 안의 관념과 동일하다. ··· 정신은 주체가 아니다. 정신에게는 자신을 정신으로 삼을 주체도 필요하지 않다.”각주7) 정신은 관념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독립적 지위를 지닌 무엇이 아니다.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기억 안에 들어와 있는 관념의 활동이 곧 정신이다. 그리고 관념이 언어라는 기호 즉 기의와 분리된 기표 작용에 지배당하는 게 현실인 한 정신은 이미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 철학자들은 더 많은 언어와 관념을 지니기 때문에 더욱더 정신을 주체로 세울 수 없다.
기표와 기의의 언어적 관계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분리됐고, 기표는 폭군 지위를 차지했다. “기표에 대해 오직 한 가지만 말할 수 있다. 즉 기표는 잉여성이고, 잉여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기표의 믿기 힘든 전제주의와 성공이 연원한다.”각주8) 기표의 전제적 지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언어활동의 기초 단계에서부터 ‘됐어?’ ‘예.’ ‘계속 해.’ 등 매우 짧은 문구로 이루어진 명령어를 통해 길들여진다. 남성-여성, 단수-복수 등 문법의 이원론적 기초가 머리에 각인되고 그 틀 안에서 사고하도록 강제된다. 정보는 소통과 믿음이 아니라 복종을 위해 사용되고 체화된다. 언어활동에 대해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명령어와 그 안에 포함된 암묵적 전제의 집합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 기표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스스로가 독립적 주체라고 착각한다.
호크니(Hockney)의 콜라주 작품 〈고속도로〉는 반복적 명령과 복종을 통해 내면화되는 언어활동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운전할 때 익숙하게 마주치는 풍경이다. 도로에는 ‘천천히’, ‘정지’,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알리는 화살표, 진행 방향 등을 알리는 온갖 지시어가 가득하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노란색 중앙선 두 줄은 누구도 넘어서는 안 될 철칙의 권위를 지닌 채 그림을 좌우로 가른다. 또한 길거리에 세워진 각종 교통 표지판이 운전자에게 명령한다. 명령을 거부할 때 단속 대상이 되고 처벌받는다. 교통 기호에 의한 명령과 순종이 일상의 반복적 습관이 되었을 때 자연스러운 듯 행동한다. 자기 의지에 따라 운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신호등과 교통 기호가 명령권자고, 인간은 기호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존재가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노예다. 기표라는 전제군주가 지배하지만 우리는 지배자의 존재를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지배가 일상적으로 관철되지만 자율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한다고 착각한다. 기표의 지배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노예 혹은 순수한 이성, 코기토라는 새로운 노예제도가 발명된 것이다.” 순수하게 이성적일수록 즉 기표에 종속되어 있을수록 자신을 정신의 주체로 여기는 경향이 강화된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확신이 더 선명해진다. 그 결과 명령에 대한 복종은 넓고 깊게 각인된다. “우리를 직접 구속하는 것은 유기체, 의미화, 주체화다.” 자신을 모든 감각 기관이 체계적으로 소통하고 완결적으로 통합된 유기체로 여길수록, 언어와 의미 사이의 연관성을 신뢰할수록, 자율적 판단 주체라고 확신할수록 예속 강도는 높아진다. 언어와 정신활동의 주체라는 확신이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노예상태는 심화된다.
그러므로 ‘기관 없는 신체’는 기표에 지배당하는 인간 존재의 현실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기체 · 의미화 · 주체화로 향한 노예의 대열에서 일시적 · 부분적으로 벗어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유기체의 연장과 기관의 조직화 이전 즉 기표에 의한 의미화나 주체화 이전의 상태로 회귀함으로써 기표의 지배력을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육체적 퇴행이 아닌 발상의 전환과 현재적 의미에서 스스로에 대한 가정이다.
데리다는 음성과 문자를 포함한 모든 언어는 자의적 기호 체계라고 주장한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은 생각과 사물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믿는 음성 언어를 표현의 한계와 인위적 조작 가능성을 태생적으로 지닌 문자와 구분함으로써 이성의 명확성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하지만 말과 문자의 질적 구분이야말로 자의적이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는 형식의 차이일 뿐 본질의 차이가 아니다. “문자는 말의 겉, 말의 이미지나 상징이 아니며, 이미 문자가 되어버린 말의 내부임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각주9) 문자 언어와 달리 음성 언어는 인간의 주체적 작용이라는 점에서 자율적 주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지만, 음성도 기호에 의존하기는 마찬가지다. 기원적 · 자연적인 것은 언어로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모든 언어는 인위적 기호 체계 안에서 성립한다. 기호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언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완벽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신화를 전제로 하는 이성중심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기호는 기호만을 가리킨다. 즉 기호에서 기호를 지시한다. 의미 형성을 가능케 하는 근원은 유희하고, 기호로 존재하기 위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끝없이 뻗어나간다.” 기표가 대상을 지시한다는 믿음이 근거 없음은 물론이고, 기표와 무관하거나 기표를 초월하는 언어도 없다. 세계의 사물 자체가 일종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의 형태나 운동을 관찰할 때 기표로서의 의미 부여가 이루어진 기호 안에서 작업한다. 기호의 생성과 함께 사물이나 현상에 어떤 의미가 생긴다. 그러므로 기표가 없다면 사유도 없다. 주체의 자율성은 물론이고 인간 중심의 모든 사고방식도 자기 근거를 상실한다. 더 나아가 인류 역사에서 이성을 통해 그어놓은 모든 영역의 경계도 설득력을 잃고 허물어진다.
리오타르도 언어가 사물을 반영하거나, 어떻게든 연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언어는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규칙체계에 종속되는 문장 섬들로 형성된 복잡한 군도일 뿐이다.”각주10) 언어는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기호로서 독자적 규칙체계를 지닌다. 인간이 말이나 문자를 통해 어떤 문장을 만들 때 기호체계에 종속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 또한 규칙체계는 단일하지 않다. 국가나 종족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를 씀에 따라, 혹은 같은 언어 내에서도 사용되는 분야에 따라 다양한 규칙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규칙체계를 따르는 문장을 다른 규칙체계에서 정확히 사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더 서로 다른 규칙체계 사이의 소통을 기대할 수 없다. 당장 학문 분야만 하더라도 수많은 세부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인문학이나 사회학 분야는 물론이고, 특히 과학 분야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매우 생소한 규칙체계가 새로 만들어졌다. “어느 누구도 이 언어들을 전부 다 말할 수 없으며, 하나로 묶어줄 보편적 메타언어도 없다. 체계-주체의 기획은 실패했다.”각주11) 대부분의 사람은 다양한 규칙체계 중 어느 하나에 구속되어 있다. 실증주의 사고의 영향 아래서 상당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종속되어 있다. 각각의 작업은 축소되고 구획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고도 제한된 틀 내에서 벗어나기 더 어려워졌다. 누구도 모든 분야를 전부 배울 수 없다. 일상을 촘촘하게 둘러싸고 있는 언어 현실은 사용자인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다. 더 이상 주체는 없다.
차이와 복수성으로서의 인간
들뢰즈는 기존 서양 철학 존재론이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 인간의 상정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존재론적 명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존재는 일의적’이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오직 하나의 존재론만 있었다. ··· 똑같은 목소리가, 저 홀로 일의성의 모든 국면을 담아내는 메아리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다”각주12) 같은 것이라는 동일성 원리 위에서 존재론 논리를 펼쳤다. 영혼과 인간의 동일성을 주장한 소크라테스를 비롯해서, 생각하는 자신과 존재를 일치시켰던 데카르트도 마찬가지다. 모두 재현으로서의 존재론이다. “오랜 오류의 역사 곧 재현의 역사, 모상의 역사다. 사실 같은 것, 동일자는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통 철학에 의하면 연관성이나 유사성에서 벗어나 일치로 나아가려는 관념의 산물 즉 재현적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재현적 주체, 동일성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실제 인간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다. 동일성을 넘어서는 다양성 안에서 인간을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다양체들의 연극이다. 모든 점에서 재현의 연극에 대립하는 새로운 연극에서는 더 이상 재현된 사태의 동일성은 물론, 작가의 동일성도, 관객의 동일성도, 무대 위 등장인물의 동일성도 존속하지 못한다.” 기관을 가진 신체와 인간, 감각과 인간, 정신과 인간, 더 나아가서는 무의식과 인간을 동일성 안에서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관계는 차이에 기초한 다양성 안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모든 것 사이에 문제와 열려 있는 물음이 있을 뿐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동일성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인류나 일반화된 인간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도 무의미하다. “타인과 동일한 공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정의된 편파성의 복수성으로 인해 모순과 폭력이 있게 된다.”각주13) 타인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유사성과 동일성은 전혀 다르다. 유사성은 차이를 전제로 한다. 단지 외모나 성격, 사고방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의사소통을 통한 동일성 형성이 불가능하다. 자의적 기호체계 아래서 사람들 사이에 합리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하니 언어를 사용한 의사소통이 동일성을 만들어줄 리 만무하다.
들뢰즈와 가타리(Guattari)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 동일성에 기초한 일반화된 인간 개념의 부정 위에서 다양체 즉 복수성을 의미하는 인간 개념을 제안한다. 인간은 다양한 이질성이 결합해 만들어진 리좀(Rhyzome) 방식으로 존재한다. “의미화도 주체화도 없다. n으로 쓰는 것만이 있다. ··· 리좀은 출발하거나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 사이에 있는 존재요,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관계지만 리좀은 결연관계를 이룬다.”각주14) 리좀은 원래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가리킨다. 땅속에서 수평으로 뻗은 덩굴이 새로운 식물로 자라난다. 뿌리 · 줄기 · 가지 · 잎 등의 수직구조, 기존 나무가 씨앗을 통해 새 나무와 친자관계를 이루는 서열구조, 서로 다른 나무와 독립 · 배척하는 대립구조를 갖는 수목모델과 대비된 의미로 리좀모델을 사용한다.
리좀은 이질성이 결합해 만들어진,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관계이기 때문에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없다. 땅속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정해진 바가 없다는 점에서 의미화된 실체로서의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복수성을 의미하는 n으로 존재할 뿐이다. 연속적 계열관계가 아닌 표면에 불연속적으로 다양하게 배치된 결연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복수성 존재 양식의 발견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해버렸다는 점에서 철학적 후퇴의 길로 돌아갔다. “무의식의 가장 위대한 예술 즉 분자적 복수성의 예술을 발견하자마자, 프로이트는 끊임없이 아버지 · 페니스 · 질 · 거세라는 친숙한 주제로 돌아오면서 통일성으로 회귀한다.” 무의식 발견을 통해 정신적 존재라는 동일성 족쇄에서 벗어나 차이에 근거한 다양체로서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성적 원리를 중심으로 무의식의 근원을 설정함으로써 다시 리좀이 아닌 수목모델의 뿌리로 돌아갔다. 만약 중심과 근원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은 복수성을 향한 소중한 철학적 입구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프로이트의 실패를 넘어설 수 있는 발상이다. “기관 없는 충만한 신체는 복수성으로 가득 찬 신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조직화된 유기체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에 근원적 구조나 중심의 해체에 닿아 있다.
세잔의 〈다섯 명의 수영객〉은 들뢰즈의 문제의식을 회화적으로 설명하는 데 쉬운 면이 있다. 그림 속 여인들은 얼굴을 구성하는 주요 기관이 흐려진 상태다. 코만 흐릿한 형태가 있을 뿐 눈은 그림자처럼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몇몇 인물에게서 입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에서도 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들뢰즈도 세잔을 자신의 문제의식과 직접 연결시킨다. “세잔은 진실을 신체 위에 국한함으로써 형의 변경을 하지 않고서 기형적 변형을 이루어 낸 최초의 화가일 것이다.”각주15) 그림에서 신체 자체는 사라지지는 않는다. 형상이 사라진 추상적 형태로 변질되거나 동일성 속에서 일반화되지도 않는다. 개별 인간의 특징은 유지한 채 얼굴에서 감각 기능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이 사라질 뿐이다.
기관 없는 신체에서 특히 얼굴의 해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얼굴의 해체는 기표의 벽을 돌파하고 주체성의 검은 구멍을 벗어나는 것과 동일하다.”각주16) 얼굴은 감각 기관이 집중된 조직 작용의 핵심 영역이다. 얼굴 안에 기관의 특징 전체가 담겨 있다. 각종 감각 기관과 이를 종합하는 뇌기능이 모여 있다는 점에서 얼굴은 기표를 통한 의미작용, 정신적 주체라는 허구적 확신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얼굴 해체는 기관 없는 신체의 가장 중요한 시도다. 기관 없는 신체를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를 독립적 · 배타적 관계로 강제하는 의미화와 주체화에서 벗어나 리좀으로서 결연관계에 들어선다.
데리다도 인간이 기호로 존재하는 한 동일성 원리는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 차이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현존,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여태 간주해온 의식은 의식 바깥으로 추방된 것이며, 존재의 절대적 형식이 아니며, 단순히 체계인 차연에서 결정된 효과다.”각주17) 의식은 기호에 의해 의식 바깥으로 추방되어 있다. 사물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한 우리는 오직 기호라는 우회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사물에게 주관적 기호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미 오래 전부터 부여된 기호에 의해 표상한다. 우리의 의식은 기호이고, 인간이 존재한다면 기호에 의해 유보된 존재일 뿐이다.
기호가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사용과정에서 변질을 동반하고 정착과정을 겪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언어 체계 이전에 존재하던 생각이나 소리를 지니지 못한다. 타인과의 의사소통도 언어 체계에서 유래하는 차이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같은 의미의 대화는 아니다. 서로 다른 의식에 머문다. 철학자들조차도 의식에 필연적으로 흐르는 엄연한 차이를 보지 못하고 동일성이라 믿어버리는 잘못을 범했다. 데리다는 차이를 ‘차연’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한다. 기존의 차이라는 말이 주로 공간적 의미의 차이만을 담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질을 반영하지 못하는 면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화와 공간화에 다른 차이 모두를 내포하는 신조어로 차연을 사용한다. 인간은 절대적 형식이나 동일성이 배제된, 차연에 의해 결정된 효과 안에서 차연에 의존하며 존재한다.
리오타르도 인간이 개별 자아가 아닌 복잡한 관계망 안에 존재함을 강조한다. “개별 자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각주18) 자아는 들뢰즈나 데리다도 충분히 강조했듯이 의식 바깥에 있는 기호를 통해 허구적으로 존재하기에 대단치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심한 복잡성과 유동성 안에 사는 현대인의 자아는 더욱 대단찮다. 고정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던 전통사회와 달리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관계를 날마다 마주치며 살아간다. 더군다나 자율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관리자의 요구, 심지어 기계의 타율적 작용에 몸을 맡겨야 하는 현실이다. 고도로 기계화 · 자동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기능과 조절기능 아래서 기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자아도 독립적인 섬으로 존재할 수 없다.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만, 관계의 규칙과 사회적 조절 기능 안에서만 자신을 확인한다.
욕망으로서의 인간
들뢰즈는 전통적 인간관과 자아관 극복을 주장한다. 무엇에 의해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단서는 수목모델에 대비되는 리좀모델이다. 다른 하나는 푸코와 라캉이 강조한 바 있는 욕망의 회복이다. “자아와 나는 극복되어야 하되 개체화에 의해, 또 개체화 안에서 극복되어야 하고, 유동적인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구성하는 개체화 요인을 향해 극복되어야 한다.”각주19) 개체화 자체는 부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개체를 원자화된 독립적 존재로 여기는 오류, 또한 동일성을 통해 인간 전체를 하나의 일반화된 원리로 묶으려는 오류다. 인간은 타인과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되 이질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개체를 전제로 한다. 자율적 · 완결적 주체로서의 ‘나’는 극복되어야 하되, 동일화가 아닌 개체의 독특성을 통해서다. 개체화의 핵심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요소 즉 욕망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프로이트는 인간 이해에서 욕망과 쾌락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다양성을 벗어난 원리적 구조로 환원하기에 동일성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어떻게 쾌락은 과정이기를 멈추고 다시 원칙이 되는가? 어떻게 쾌락은 국소적 과정이기를 멈추고 이드 안에서 생물심리학적 삶을 조직화하는 경험적 원리 자리에 올라서는가?” 프로이트의 이드(id)는 쾌락 원리만을 따르는, 본능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저장고다. 어린 아기의 정신은 대부분 이드로 구성되고, 이드의 일부가 외부 세계와 만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그 결과 쾌락은 개체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나는 과정의 성격을 잃고 절대적 원리로 자리 잡는다. 결국 프로이트는 하나의 성적 원리 안에 모든 인간을 동일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디오니소스는 성적 욕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욕구조차도 욕망에 포함된다. 성적인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예술적 욕구, 화폐 · 권력 · 지배, 심지어 파시즘도 욕망이다. 디오니소스 세계는 고정된 원리가 아니라 개체 안에서 다양하게 실현된다. 그리고 리좀이 그러하듯이 서로 차이를 지니면서 횡적 연결을 맺으며 퍼져나간다.
욕망은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성중심주의가 일관되게 욕망을 억압하고 인간의 근거를 정신에서 마련해 왔기 때문이다. “욕망이 배반당하고, 저주받고, 내재성의 장으로부터 뿌리 뽑힐 때마다, 배후에는 욕망에 3중의 저주를 내리는 사제(司祭)가 있다. 그것은 부정적 법칙, 외재적 규칙, 초월적 이상이다.”각주20) 욕망 회복은 스스로 욕망 상태로 ‘되고자’ 할 때 실현 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되기’를 스스로 과제로 삼아야 한다. “노래하는 것, 작곡하는 것, 그림 그리는 것, 글 쓰는 것은 되기의 사슬을 풀어헤치는 것 외의 어떤 다른 목표도 갖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이 강제하는 합리적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할 수 없게-되기 등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모든 되기는 개체에서 출발하되 서로 다른 다양체 속으로 퍼져 나가는 감정의 운동에 속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들뢰즈의 심리학은 감정과 감정의 마주침 속에서 형성되는 감응의 심리학이다. “정신의 심리학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구성 불가능하며, 그 대상에서 심리학에 필연적인 항상성도 보편성도 발견할 수 없다. 오직 감응의 심리학만이 참된 인간과학을 구성할 수 있다.”각주21) 심리학의 과제는 절대적 원리에 의해 모든 정신의 구조를 일률적으로 구조화하는 일이 아니다. 욕망이라는 감정을 지닌 개체가 다른 개체나 대상과의 마주침을 통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감정 운동 과정을 탐구해야 한다.
리오타르는 들뢰즈의 ‘되기’에서 더 나아가 과학기술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조차도 적극 수용한다. 온갖 문명의 산물과 결합된 욕망이 인간 소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도 일축한다. “소외에 대해 겁낼 필요는 없다. 소외 개념은 기독교신학이나 자연철학에서 유래된 것이다. 무한 형태로서 신과 자연은 붕괴되어야 한다. 전화나 텔레비전이 하나의 수단으로 다루어지는 한, 이것에 의해 소외당하지 않는다.”각주22) 먼저 소외 개념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다. 소외는 기독교신학이나 자연철학에서 신으로부터 멀어진 상태, 혹은 자연의 원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강제됐다. 신이 죽고 단일한 원리에 의한 과학적 거대 담론이 무너진 상태에서 소외라는 개념도 함께 무덤으로 갈 필요가 있다. 문명의 산물을 수단으로 다루기만 한다면 이에 대한 욕망은 소외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해밀턴의 〈오늘날 가정을 색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는 과학기술 문명이 만들어낸 도구의 숲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생활을 보여준다. 팝아트의 상징이 된 같은 제목의 1956년 작품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면서도 생활공간을 채운 개별 요소는 매우 다르다. 이전 작품에서는 구석구석에 당시 산업문명을 상징하는 물건이 가득했다. 예쁜 여배우 얼굴이 담긴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녹음기 · 진공청소기 등의 가전제품, 신문과 대형 햄 통조림, 자동차 소유를 알리는 포드 휘장이 등장했다. 하지만 1992년 작품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오른쪽 벽에 자신의 이전 작품이 걸려 있어서 시대 변화를 암시한다. 텔레비전 주인공은 로봇이다. 책상에는 컴퓨터와 이동식 전화기로 보이는 물건이 있다. 벽지는 반도체 회로 무늬다. 액자에 인공위성이 보이고, 천정의 등은 우주의 어떤 행성이다. 탁자 위에는 전자레인지가 자리 잡고 있다. 왼쪽 벽에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을 뜻하는 AIDS 글자로 장식된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의 이미지가 마치 푸른색과 녹색 바탕 위에서 춤추는 나신들이 어우러진 마티스(Matisse)의 〈춤〉을 보는 듯하다. 사람의 모습도 바뀌었다. 근육질 신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체됐고, 남성은 다소 왜소하게 나온다. 현대인의 다양한 욕망을 볼 수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한 욕망, 편리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욕망, 온라인을 통한 소통 욕망, 현대화된 이미지에 대한 욕망, 신체와 성에 대한 욕망 등이 뒤섞여 나타난다.
리오타르는 이처럼 일상의 삶에 스며들어 자극하는, 과학기술 문명에 의한 욕망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만 사고한다면 말이다. 또한 의식을 좌지우지하는 기호체계인 언어에 대해서도 겁낼 필요는 없다. 조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다. “유일한 위험은 의지가 이들의 존속 즉 믿음의 구조만을 중요시하는 국가에게 이것들을 넘겨주는 것이다.” 언어에 의한 메시지 변형이 국가가 아닌 인간 집합에 의해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태로 나타나는 현상은 소외가 아니다. 메시지 자체는 불안정한 정보 상태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유희하는 생활을 하면 된다.
인식론
감각과 감성의 역할, 의미가 아닌 사용으로서의 기계
들뢰즈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경험주의 방법에 기초한다. 하지만 초기 경험주의 방식의 좁은 의미보다는 흄에 가깝다. “흄에게 경험주의는 관념의 감각적 기원에 의해 본질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관계 · 경우 · 착각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발전시킨다.”각주23) 관념의 감각적 기원 즉 사물에 대해 감각을 통한 직접 경험이 의식에 반영되는 방식이 아니다. 관계 · 경우 · 착각은 지각에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경험적 차원에 해당한다. 사물의 관계에 대한 사고, 현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에 대한 사고 등은 주관의 작용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은 상상력의 작용이다. 어떤 현상이 상상력 안의 부합되는 관념과 연결되면서 인식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의 경험은 경험을 넘어서는 경험, 초험적 경험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면 감각은 감각 기관과 어떤 관련을 갖는가? 기관 없는 신체를 주장했기에 이 점은 특별한 이해가 필요하다. 감각 기관이 없다면 감각이 가능한가?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한다기보다는 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적 구성에 더 반대한다. ··· 감각은 질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감각이란 강렬한 사실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실성은 재현적 여건이 아니라 동소적 변화를 결정한다.”각주24) 기관 없는 신체는 보거나 듣는 것, 만지는 것 자체의 부정이 아니다. 각 기관의 기능은 인정한다. 하지만 감각의 확실성은 부인된다. 특히 개별 감각이 체계적으로 종합되는 유기체적 감각의 확실성을 부인한다. 기관 없는 신체란 유기적으로 되기 이전의 신체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러한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있어서 그렇게 상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들뢰즈는 이 감각이 유기체적 종합이 아니라 각각 분리된 사실을 접한다. 그림 속에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난 인간처럼 주관적 관념 작용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개별 현상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지만 관념이 결합된 감각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객관적 구조로 정의될 수 없다. 좌에서 우로의 연속적 질서나 위와 아래의 계열적 질서를 규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각은 종합적 · 질적 작용이 아니다. 감각이 관계하는 사실성은 의식에 반영되는 재현적 작용이 아니다. 상상력 안의 부합되는 관념과 연결되면서 인식이 생긴다.
감각이 감성을 낳는 과정도 일방적 · 기계적이지 않고 관념 작용과 연결된다. “마주침의 대상은 감각 속에 실질적으로 감성을 분만한다. 이것은 감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각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어떤 질(質)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기호다.”각주25) 먼저 대상과의 우연한 마주침 속에서 감성이 나타난다. 하지만 감각에서 직접 수동적으로 주어지지 않기에 감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주관적 작용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감각‘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감정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감정을 통해 대상이 주어진다. 감정은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질이 아닌, 주관적으로 해석된 기호다.
감각과 감성을 중심으로 하면 형이상학은 어떻게 출현하고 성립하는가?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이 현전할 때 감성은 고유한 한계에 부딪히고, 초월적 실행으로 고양된다.” 만약 대상 없이 감각만이 사용될 어떤 심적 현상을 마주할 때 감성은 대상을 넘어 초월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감성은 대상과 연관되지 않기에 스스로 좌충우돌하면서 순수한 기호의 유희에 놓인다. 이때 감성 운동은 형이상학의 성격을 갖는다. 형이상학은 생성의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감성에서 출발하는 기호의 유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식의 과제를 객관적 진리나 질서 탐구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일차적으로 객관적 조화와 질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설사 부분적으로 있다 하더라도 불안정한 감성과 유희하는 기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유가 여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기호에 의존하는 한 인식은 고정된 의미화가 아닌 단지 사용 문제로 발상이 전환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안티 로고스, 기계, 기계 장치는 로고스, 기관, 논리학에 대립한다. 전자는 오직 작동에 달려 있으며, 작동은 부품에 의존한다. 이에 비해 후자는 자기 의미를 자기가 속해 있는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각주26)
우리의 신체는 물론이고 욕망과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사유는 기계여야 한다. 흔히 사용하는 ‘기계적’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객관적 진리나 완결적 기관, 체계적 논리에 대립한다. 사물이나 현상의 원리를 규명하는 의미화 작용과 상반된, 단순한 사용 문제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각 영역에서의 사유를 기계로 파악할 때, 본질적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올바로 사용하는 것인지에 관심을 두는 발상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각할 때 의미를 묻지 않고 타는 데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계화될 때 비로소 사유는 고정된 의미를 넘어 역동적 실행으로 다시 태어난다.
데리다도 형이상학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이성의 고유 작용이 아닌, 감각과 기호의 관계에 주목하여 설명한다. “기호를 생산하는 기억은 감각적이며, 외부적인 것을 억압함으로써 기호를 내면화시킨다. 그리고 사유하고 기억하기 위해 이런 틀은 자연/정신, 자연/역사, 자연/법이라는 대립 구조를 사용한다.”각주27)
기호는 감각과 감성에 기반을 둔 기억에 연관된다. 기억은 스스로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반복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감성은 자신 안에서 더 오래 기억하고 사유의 재료로 쓰기 위해 효과적인 반복 형태를 고안한다. 이를 위해 이분법적 대립 구조를 만든다. 물질적 · 외부적인 것과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개념 쌍을 하나의 기호로서 인위적으로 고안한다. 자연/정신, 자연/역사, 자연/법 등의 대립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립 구조를 이루는 쌍의 한편에 감각에 밀착된 자연이 자리 잡는다. 여기에서 감성 작용의 일부인 은유를 통해 파생되는, 더 복잡한 여러 쌍이 만들어진다. 관능/정신, 지각/지성, 감각/의미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가장 고도한 단계에 이른 헤겔의 형이상학조차 가능해진 것이다.
리오타르는 의미화가 아닌 사용에 초점을 두고 사유의 성격을 모색하는 들뢰즈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과학적 이성은 메시지/지시체의 축 위에서 참과 거짓의 인지적 기준에 따라서가 아니라, 발신자/수신자의 축 위에서 화용론적으로 발화의 수행성에 따라 문제시된다.”각주28) 대상과 기호의 일치나 연관성을 입증함으로써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화용론적 발화의 수행성이 핵심이다. 화용론이란 언어에서 기호와 대상이 갖는 관계의 적합성보다는 실제 현실에서의 사용에 주목하는 방식을 말한다. 사유가 참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이는 객관적 · 논리적 의미에서의 참이 아니라 사용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즉 자신의 말이 참이라면, 상대방의 말보다 자신의 말을 사용함으로써 수월하게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과 번역으로서의 사유
들뢰즈가 보기에 사유에 있어서 의미화가 아닌 사용이 핵심이라면, 인식의 과제는 구조의 규명이 아닌 사용된 기호의 해석이고 번역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다. ···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 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일이다.”각주29) 사유는 자체의 가능성이 아니라 기호를 통해 강제된다. 기호조차도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주어진다. 우연한 마주침에서 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처음에는 숨겨진 어두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막연하거나 혼미한 모습으로 의식에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호의 해석과 번역이 사유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지성은 기호로부터 압박을 당하고 기호를 해석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띤다.
들뢰즈의 논리대로라면 지성이나 사유는 오직 비자발적 속성만을 지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사유의 비자발성이란 자발성과 대립관계가 아니다. “자발성과 비자발성은 서로 다른 능력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능력의 다른 실행을 가리킨다.” 지성이 우리가 가진 다른 능력보다 앞서 오면서 전체 정신이라는 조화를 이루지는 않는다. 지성은 늘 기호에 뒤쳐져서 온다. 하지만 기호와의 우연한 마주침이라는 비자발성에서 시작된 사유가 해석과 번역 과정에서 자발성을 획득한다. 비자발성과 자발성은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사유에 의한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다. 오직 기호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때, 사유에 의한 창조는 이를 해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워홀의 〈코카콜라〉도 하나의 기호로서 우리에게 우연히 다가온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카콜라 병을 나열한 이 기호가 궁금한 감정을 자극하고 해석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저 외형만 보이고 해석은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 코카콜라 병 112개를 특별한 변형이나 배열 없이 가로 세로 방향으로 나열해놓았다. 변형이 있다면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는 점 정도다. 아래 부분에는 코카콜라의 유명한 붉은색 브랜드 마크도 선명하게 찍혀 있다. 언뜻 보면 생산 공장에서 완성되어 줄지어 나오는 코카콜라 병을 사진으로 찍은 느낌이다. 기호의 자극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해석과 번역 과정을 통해 자발적 지성의 사용이 이어진다.
코카콜라가 미국 소비문화의 상징이라는 점, 그림의 위와 양 옆의 끝 부분에서 모든 병이 잘려 있어 그림 밖의 공간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느낌을 줌으로써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점, 또한 같은 크기의 병이 나열되어 있어서 차이보다는 동등함을 가정한다는 점 등을 일차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부터 대량생산된 상품의 소비를 통한 평등을 이상적 평등으로 여기도록 안내하는 기호의 작용으로 해석이 나아갈 수도 있다. 실제 워홀은 작품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자들을 시기하지 마라. 그들도 당신과 같은 콜라를 마신다. ··· 미국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자도 가장 가난한 소비자와 똑같은 상품을 구입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점이다.” 유통되는 콜라는 모두 똑같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대기업 사장이라 하더라도 뒷골목 빈곤층 부랑자보다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기호 해석에 바탕을 둔 자신의 자발적 판단이다.
해석과 번역 과정에서 해석된 내용과 기호가 일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떤 경우든 내용이 기표로 환원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언어는 이질적 · 가변적 실재다.”각주30) 기호는 자체로 실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상응하는 내용을 확증하는 기능이 부여될 수 없다. “내용과 형식 양자는 그 형식의 상태에 따라 탈영토화되어 있다.” 영토화란 의미 작용이 부여된 상태를 말하고, 탈영토화란 의미 작용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기호는 이미 탈영토화 즉 의미 작용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로서 스스로 실재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호는 실재로서 자신을 새롭게 재영토화하기 때문에 본래 의미를 기호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허무한 결과에 도달한다.
보드리야르는 들뢰즈와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추상과 허구일 수밖에 없는 기호가 의식을 지배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다.”각주31) 시뮬라크르는 허구적 이미지가 실재의 위치를 차지한 상태를 말한다. 기호로서의 이미지와 사실성은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호 스스로가 순수한 사실성이 되고 실재의 위치에서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릭턴스타인의 〈미키마우스〉는 사실성과 분리된 실재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미키마우스를 통해 쥐를 접했다. 하지만 이미 사실성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키마우스는 예뻐하면서 쥐라고 하면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하게 싫어한다. 누구도 미키마우스로부터 쥐를 떠올리지 않는다. 설사 떠올려 본들 심지어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이미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미키마우스는 자신이 사실성을 지닌 실재로서 독립적 지위를 차지한다.
미키마우스는 희미한 흔적이라도 갖지만, 대부분의 기호는 매우 가변적이기에 더욱 복잡한 해석과 번역이 요구되고 결과도 언어의 유희에 머물 가능성이 커진다. “기호는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 기호는 기호로 환원되고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기호는 하나의 원환에서 다른 원환으로 비약하며, 끊임없이 중심을 바꾸는 동시에 중심에 일치시킨다.”각주32) 기호는 스스로 형식을 바꾼다.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와 연관을 맺으며 또 다른 형식을 만들고 다시 애초의 기호와는 다른 새로운 기호로 되돌아온다. 기호와 기호의 마주침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기호 역시 스스로를 영토화하면서 새로운 얼굴 즉 실재로서의 지위를 강요한다. 기호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보편적 속임수의 체제”이고, 변화 과정에서 비약이 나타나기 때문에 내용은 물론이고 애초의 기호 상태를 확인하는 일조차 어려워진다. 해석과 번역은 계통적 추적이기보다는 언어에 의한 유희 과정으로 연결된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은 단위인 단어에조차 은유 작용이 포함되어 있기에 문장 구조를 갖는 철학적 명제는 더욱 해석 불가능한 허구다. “은유는 철학 언어 전체에 편재한다. 철학 언어 모두가 수사다.”각주33) 관능/정신, 지각/지성, 감각/의미 등 대립 구조를 이루는 대표적 개념 쌍만이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철학 개념, 나아가서는 개념과 개념으로 이어지는 명제는 더욱 은유와 수사의 숲을 이룬다. 모든 철학적 표현은 은유에 기초한다. “철학이 근원적 · 구조적 · 기원적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고유 수사 범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자는 은유 개념에서 그가 투입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언어가 은유라면 은유의 본래 의미를 고정화하고 이를 통해 서로 통일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은유의 더 큰 문제는, 마주침 속에서 다른 기호로의 변화를 지적한 들뢰즈의 문제의식과 마찬가지로 수사에서도 비슷한 변화 과정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은유로 이루어진 대립구조의 구성은 수사의 이동으로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전통 철학에서 의미하는 고유성을 지닌 은유는 결코 될 수 없고, 은유는 전통적으로 믿어온 고유 언어가 될 수 없다.”
언어는 추상과 은유로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수사의 변화 과정을 겪어 왔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복합적 관계에서 생긴 수사의 이동은 물론이고 여러 번의 비약까지 포함된 상태에서 고유한 것과 비고유한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은유는 수사의 이동 과정에서 스스로를 위장하거나 심지어 파괴하기에 뿌리에 접근할 수 없다. 최종적으로 데리다는 철학의 죽음을 선언한다. “은유는 항상 자체 내에서 죽음을 운반한다. 그리고 이 죽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철학의 죽음이다.”
차이 생성으로서의 인식
들뢰즈는 주요한 인식의 과제를 동일성 거부와 차이의 생성에서 찾는다. 특히 동일성과 혼동을 불러일으킨 반복이라는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차이를 규명하는 작업에 집중한다.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 ··· 법칙은 차이의 공허한 형식, 변이의 불변적 형식이다. ··· 반복은 법칙에 반한다. 법칙의 유사한 형식과 등가적 내용에 반하는 것이다.”각주34) 서양 철학에서 일반성 혹은 법칙 도출은 동일성이라는 형식을 매개로 정당화된다. 차이를 보이는 현상에 대해 반복 속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동일성의 범주로 묶으면서 일반화된 원리의 근거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 일반성은 한 항이 다른 항과 교환되거나 대체될 수 있을 때만 성립한다. 하지만 반복은 교환과 대체가 불가능한 독특성 즉 차이를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모네(Monet)의 수련 연작은 반복이기는 하지만 일반성과는 거리가 멀다. 모네는 무려 200여 점에 이르는 수련 작품을 남겨 ‘수련의 화가’라 불릴 정도다. 2년 간격을 두고 그려진 두 점의 〈수련 연못〉을 통해 반복의 의미를 살펴보자. 수련꽃이 필 때쯤 같은 장소에서 그렸다. 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사하다. 하지만 하나의 그림으로 다른 그림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동일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까?
- 1〈수련 연못〉
모네, 1897년
- 2〈수련 연못〉
모네, 1899년
일단 겉으로 보더라도 오른쪽 그림이 연꽃 봉우리가 더 활짝 핀 상태다. 수련 연못을 비추는 태양 광선의 정도도 다르다. 일본식 다리와 수련에 비친 광선을 보면 오른편 그림이 더 밝다. 좀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오른편 그림의 연꽃이 2년 전의 그 꽃일 수도 없다. 또한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일년생 풀들은 이미 이전의 생명과는 다른 새로운 생명체다. 본질적으로는 그림을 그릴 때 화가의 감성이 각각 어떤 상태였는지도 문제가 된다. 만약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있다면 화가는 굳이 새로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오른편의 그림을 모작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대체로 일반성을 설정한 후 법칙으로 연결시킨다. 법칙은 개별 요소 사이의 등가성을 규정한다. 하지만 동일성과 유사성은 어떤 가상이나 착각에 불과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도 적어도 가치 영역에서 하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라 하더라도 등가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동일성과 유사성 개념은 차이를 재현의 범주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우리의 고질적 습관과 결부되어 있다.” 동일성에 입각한 재현적 사고가 반복과 동일성을 연결시키는 오류를 반복하게 하는 주범이다. 반복은 개념이나 재현 안의 동일성 형식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철학적 범주 구분도 마찬가지 오류에 입각해 있다. 범주는 일종의 계열화로 그 안에 속한 개념을 동일성 안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처리하는 행위다. “재현의 세계에서 범주는 존재자 사이에서 존재가 고정된 비율 규칙에 따라 할당되는 분배 형식을 구성한다.” 범주도 재현의 세계다. 개념 자체가 이미 동일성에 기초한 재현의 세계다. 특정 개념은 현실의 다양한 현상을 개념이 정한 틀 내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도록 강제한다. 개념과 현상 사이에 등가성이 요구된다. “무한은 심지어 큼과 작음의 상호 동일성, 극단들의 동일성까지 의미한다.”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하듯이 절대적으로 똑같은 두 먼지 알갱이, 똑같은 특이점을 갖는 두 손, 똑같은 방식으로 두드리는 두 대의 타자기, 심지어 똑같은 방식으로 총알을 내뿜는 두 정의 권총은 없다. 동일성이 가상이나 착각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에 기초한 개념과 범주를 주된 작업으로 삼는 철학도 같은 문제점을 지닌다.
헤겔의 변증법적 모순 관점은 동일성에서 벗어난 시도라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헤겔의 모순은 차이를 마지막까지 끌고 나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출구 없는 길이다. 이 길을 통해 차이는 다시 동일성으로 돌아간다.” 모순도 변증법적 부정의 부정 법칙을 거쳐 새로운 조화로 이행함으로써 동일성으로 돌아간다. 헤겔에게 오직 동일자에 대한 관계 안에서, 동일자를 중심에 둘 때만 모순은 차이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인식은 반복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각각 정당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성의 산물이며 동일성 원리인 개념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다.” 반복에서 차이를, 차이에서 반복을 발견하기 위해 동일률의 논리와 긴밀한 혈연관계를 지니는 이성적 사고를 넘어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 “반복은 본질상 상상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상상만이 구성의 관점에서 반복적인 힘의 계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복의 의미를 개념 없는 차이에서 구한다고 해서 개념 자체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동일성에 근거하여 강제되는 절대적 개념이다. 동일성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재현적 개념과 대비되는, 차이와 다양성을 전제로 한 개념 창조가 필요하기도 하다. “개념의 창조는 그것이 채우게 될 구도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는다. ··· 이는 회화의 경우와 같다. ··· 위대한 화가의 색채에 대한 취향은 윤곽으로 이루어진 형상과 평평함, 곡선, 아라베스크의 파상으로 이루어진 구도와 맞아떨어질 때까지 색채의 창조를 밀고 나감으로써 생긴 결과다.”각주35) 재현적 개념은 사실주의 회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대상을 반영하면서 하나는 개념으로, 다른 하나는 그림으로 나타날 뿐 동일성이라는 재현적 사고에 매달리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로운 개념의 창조는 회화에서 색채의 창조적 사용과 비슷한 맥락이다. 색채에 대한 취향이란, ‘취향’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재현을 넘어선 독창성을 의미한다. 고흐(Gogh)의 〈해바라기〉가 하나의 예다. 화병에 담긴 해바라기 꽃을 그린, 어찌 보면 평범한 정물화다. 만약 해바라기를 똑같이 그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평범함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해바라기를 닮게 그리는 데 있지 않았다. 색채 실험에 가깝다. 들뢰즈의 표현대로 “노란색을 무제한으로 밀고 나간다.” 줄기와 잎을 제외하고는 온통 노란색이다.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가진 노란색을 화폭에 쏟아 부은 느낌이 들 정도다. 자신이 설정한 전체 그림 구도에 근접할 때까지 노란색에 집중함으로써 재현을 넘어 새로운 창조에 도달한다. 상상력에 기초한 철학적 개념 창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수목모델을 거부하고 리좀모델에 주목하는 이유도 반복에서 차이를 찾아내려는 인식 과제와 맞물려 있다. 동일성에 기초한 서양 철학은 대부분 나무 중심의 수목모델 방식이었다. “모든 나무의 논리는 모사의 논리요 재생산의 논리다. ··· 그 자체로 표상적이고, 코드화된 복합체로 응결되어 있으며, 발생적 축을 따라 재분배되거나, 결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각주36) 나무의 체계적 구조 특히 뿌리를 근본 원리로 하여 몇 방향으로 뻗어나간 굵은 가지 형식으로 상위 범주를 구분하고, 가는 가지로 하위 범주를 계열화하여 연결시키고, 최종적으로는 개별 잎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사고방식은 동일성에 의한 개념화 · 범주화의 전형적 인식체계를 보여준다. 철학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재현의 세계에 현실을 꿰어 맞추는 사유의 폭력이다.
사유는 나무보다는 리좀에 가깝다. “리좀은 어떤 점이든 다른 점에 접속시키며, 각 특질은 같은 본질을 갖는 특질로 회귀되지도 않는다. 리좀은 매우 상이한 기호 체제와 비기호 상태 자체를 작동시킨다.” 리좀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되 계열화된 수직 구조를 갖는 나무와 달리 수평적이다. 또한 각 개체의 차이를 전제로 연결되기에 유사성도 재현도 없다. 그러므로 어디로도 귀속되지 않고 특정 의미화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선 사이의 횡적 소통이다. 인식이 리좀의 특징을 자신의 내적 문제의식으로 수용할 때 비로소 반복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차이와 차이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리좀 안에서 모두가 주체이자 대상이라는 점에서, 인식은 드디어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구분도 넘어선다.
공간적 차이에 시간적 차이가 더해진 데리다의 차연 개념도 비슷한 맥락이다. “차연은 전통적으로 전제해온 올바른 시작, 출발의 절대적 시점에 대한 개념을 문제시한다.”각주37) 우리는 보통 차이를 논할 때 같은 시점에서 복수의 대상 사이의 차이 즉 공시적 차이에 주목한다. 데리다는 여기에 통시적 차이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결합될 때 차이의 진정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연은 출발의 절대적 시점이라는 시간적 차원의 문제에 주목한다.
흔히 철학은 현상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는 방식으로 사유를 전개한다. 여기에서 근원은 의미에서의 근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간적으로 발생 원천을 추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떤 하나의 근원이 있어서 이로부터 계통적으로 나머지가 파생되어 나왔다는 발상을 전제로 한다. 데리다의 차연은 이러한 추적을 무의미한 시도로 규정한다. 이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호는 비약을 동반하는 변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동일성으로 묶어서 계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제거해버렸다. 파생 개념이나 현실을 통제하는 근원적 원칙 자체가 없다. 오직 차이만이 있다.
리오타르는 유사성에 근거하여 개별 지식을 거대 지식으로 통합하는 서사 지식이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대서사는 어떤 통합 양식을 사용하든, 사변적 서사인지 해방 서사인지의 문제와 무관하게 신뢰성을 상실한다.”각주38) 거대 지식은 애초에 통합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지식을 통합했기에 존재 의미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지식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다양성 인정뿐이다. 다양한 종의 동식물을 보고 놀라듯이 담론의 다양한 종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형이상학처럼 사변적 성격을 지닌 지식만 문제가 아니다. 해방 서사 즉 인류의 당면한 문제와 연관된 실천적 지식 역시 같은 운명이다.
동일성에 근거한 보편성 실현이라는 근대 기획은 비판되거나 포기된 것이 아니다. 스스로 파멸되고 청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을 통해 되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스스로 파멸에 이르렀는가?
먼저 근대 이성과 연관된 사변적 서사를 보자. 리오타르는 ‘아우슈비츠’를 거론한다. “아우슈비츠는 현실적인 것은 모두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모두 현실적이라는 사변적 교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범죄는 현실적이지만, 이성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각주39) 60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 학살은 이성의 신화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과학기술 발전, 근대적 교통망, 체계적 관료제 등과 같은 이성의 결과물, 또한 최소 투여로 최대 산출을 만들어내는 효율성 원리가 어떻게 대량 학살로 연결되는지를 확인했다. 과학기술 발전은 생화학무기라는 대량 살상무기를, 근대적 교통망은 전국에서 유태인을 신속하게 실어 나르는 역할을, 관료제 체제는 유태인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관리 · 감시하는 역할을, 효율성은 최소 인력과 재원으로 최대 인원을 살상하는 원리를 제공했다. 이성이 어떻게 괴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인류는 명백하게 확인했다.
해방 서사에 해당하는 영역도 마찬가지다. 해방이라는 거대 이야기가 지난 50년 동안 기본원리의 무효화 과정을 겪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1953년 베를린, 1956년 부다페스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80년 폴란드 사건은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모두 공산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모두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사적 유물론 교의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당에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고안된 사회주의도 노동자와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억압 도구로 전락했다. 동구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대중운동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와 민주주의 확대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이 자유와 민주주의 확대는커녕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사회주의 대의도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노동자 권력이라는 사회주의 이론과는 반대로 노동자 스스로가 공산당에 맞서는 현실이 나타났다.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론도 현실에 의해 부정되었다. “68혁명은 민주적인 것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의회 자유주의 교의를 거부한다. ··· 경제 대공황은 수요와 공급의 자유가 번영을 약속한다는 자유주의의 교의를 거절하며, ‘1974~79년의 위기’는 후기 케인스 학파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버렸다.” 유럽 68혁명은 대의제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개인의 일상적 삶이 철저히 억압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민에 의한다는 대의제가 국민의 자율성을 어떻게 부정하고 억압하는지를 적나라하게 확인시켰다. 또한 1929년 대공황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물질적 풍요는커녕 얼마나 극심한 빈곤과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대공황에 대한 교훈으로 나타난, 생산 중심의 논리에서 수요의 창출을 중시하는 케인스 이론도 얼마 가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간 나타난 스태그플레이션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제 위기는 수요 관리를 통한 경제적 번영의 허약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리오타르는 20세기 들어 인류가 만들고 제시한 거대 이론이 예외 없이 다 무너졌는데, 아직도 거대한 이론 체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무모하거나 미련한 짓이라고 질타한다. 단지 위에 열거된 개별 거대 이론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던 이성이나 계몽적 사고에 대한 확신, 과학기술에 대한 희망처럼 근본적 사고방식이 한계에 도달했다. 이성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 현상을 하나로 꿰어서 설명할 능력이 없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해체와 다양성 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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