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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를 넘어 욕망으로
들뢰즈는 선을 인간 본성과 연관시키려 하는 오랜 편견을 비판한다. “철학의 잘못은 인간이 사유하고자 하는 선의지나 본성적으로 참된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점이다.”각주1) 인간은 자연에 속한 존재로서 자연의 본성에 따라 선한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된다는 발상이다. 악은 본성에 부여되어 있던 선함이 현실에 의해 왜곡되거나 잊히면서 나타난다. 자연성을 회복함으로써 다시 선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윤리의 본질을 지독하게 오해한 것이다. “선이 어떤 법칙에 의존한다면,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의무의 법칙이다.”각주2) 도덕주의자의 자연적 윤리 감정에 대한 기대는 항상 절망으로 끝난다. 의무와 강제로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윤리학은 실패의 길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윤리가 한 일은 자연을 빌미로 진정한 자연을 몰아내는 행위였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인간에게 자연이나 본성이라는 말로 유일하게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욕망뿐이다. “어디서나 욕망은 기계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항상 연결되어 있는 기계의 기계다.”각주3) 인간은 욕망 자체다. 그것도 욕망 기계다. 기계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떠한 의미작용도 없이 사용만이 남은 상태다. 무엇이 진정한 욕망인지, 욕망의 보편적 실현 방식이 어떠해야 한다는 논의는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상태다. “욕망의 문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다. 욕망하는 기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욕망은 오직 작동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현재 욕망 상태에 있는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의 문제만을 다룬다.
욕망이 직접 사용의 문제인 한 환상이나 무의식일 수 없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처럼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욕망의 현실적 작동을 가로막는 철학적 장애물이다. 욕망의 근거가 결핍이라면 욕망은 능동적 생산 활동이 아니라 단순히 비어 있거나 부족한 곳을 채우는, 사후적 반응으로 전락한다. 욕망의 상태는 결핍에서 결핍으로 이어지는 상실의 연쇄에 머물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이 결핍 주위를 맴돌 때, 욕망을 욕망 자체로 누리지 못하고 결핍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의미의 늪으로 다시 빠져든다. 욕망은 과거의 어두운 흔적이 아닌 현재의 욕구이자 즐거운 놀이다. 의미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용을 통해 현실을 실현하고 변화시키는 문제다.
욕망은 개체에서 시작하되 개체를 넘어선다. “욕망하는 기계는 이항규칙 즉 결합체제 아래 있는 이항기계다. 언제나 다른 기계와 짝을 이루는 기계다.” 욕망은 리좀을 이루는 줄기를 타고 자신을 넘어 다른 개체와 호응한다. 그 대신 같은 욕망을 반복하거나 확대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작동시키는 에너지의 전달일 뿐 개체마다 서로 이질적인 고유 욕망으로 연결된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욕망을 보편적 원리에 가두고 공통의 기원을 추적할 때 욕망은 결정적으로 질식한다. ‘아버지-어머니-나’로 이루어진 고정된 틀 안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편적 원리로 설정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이름으로 욕망을 추방한다.
라캉이 남근의 의미를 기표로 전환시킴으로써 정신분석학에서 남성 우월주의의 장막을 벗기려 했지만, 데리다가 보기에는 본질적으로 프로이트의 오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남근은 상상도 객체나 대상도 아니며, ‘남근이 상징하고 있는 신체 기관, 남자의 음경이나 여자의 음핵’도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은 더더욱 남근이성숭배주의에 종속된다.”각주4) 라캉은 남근을 다른 요소에 우선하는 절대 기표로 삼음으로써 오히려 헤겔식 절대화의 오류로 빠져든다. 즉 기표를 현실 작용을 넘어 이상화한다. 특정 원리를 이상화하여 고유 근원을 더욱 강화한다. 그 결과 남성의 다른 이름인 이성으로 형태만 바꾼 남근이성숭배주의로 나타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이중적 차원에서 욕망을 해방시키는 데 기여해야 함을 강조한다. 벗어나야 할 대상의 하나는 이성 중심주의, 다른 하나는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이다. 두 종류의 장애물이 심어놓은 윤리학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고대국가 형성 이래 사회는 여러 차례 질적 변화를 겪었지만 적어도 욕망을 길들이고 억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 배후에는 언제나 이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정신분석은 욕망을 거론하지만 결국 승화라는 허울 좋은 말을 통해 욕망을 포기하고 기존의 사회적 · 문화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유도했다. 이제 이성적 윤리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족쇄에서 욕망을 해방시킴으로써 욕망 자체만이 아니라 사회 변화까지 추동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욕망은 어머니와 동침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적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한다.”각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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