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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와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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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낭만주의

정신적으로 충만한 개성적 자연묘사

당시 독일에서는 티슈바인(Tischbein, 1751~1829), 프리드리히(Friedrich, 1774~1840), 룽게(Runge, 1777~1810), 달(Dahl, 1788~1857) 등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대체로 자연의 단순 모방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강했다. 독일 관념론의 문제의식과 연관되면서 자연의 풍광을 담더라도 그 안에 정신성을 담아내려 했다. 이성화된 자연을 개성적 방식으로 담는다는 점에서 이후 본격적 낭만주의를 준비하는, 초기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자연의 위력을 통한 숭고의 체험

칸트에서 셸링을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경험론 미학자인 버크의 숭고 체험을 통한 미적 체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독일 미술가들도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 화가인 베르네와 루테르부르 등이 추구하던 숭고미를 풍경화에 담아내려 했다. 칸트의 구분에 따르면 “도달 불가능성을 이념적 현시로 생각하도록 규정하는 자연의 대상”을 다루는 역학적 숭고를 추구한다.

〈빙해〉

프리드리히, 1824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프리드리히의 〈빙해〉는 당시 독일 화가의 작품 중 숭고의 미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얼음으로 덮인 바다의 날카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다. 여기저기 얼음과 뒤섞인 암초가 위협적이다. 그 뒤편으로는 얼음 바다가 끝을 모를 정도로 펼쳐졌다. 오른쪽에는 빙산에 걸려 난파된 배가 마치 장난감처럼 구겨져 있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제한적인 자연의 위력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자연의 위력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일 때 사물의 형식을 뛰어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로부터 정신적 자극을 받는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자연의 숭고함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가을 · 겨울 · 새벽 · 안개 · 월광 등의 정경을 자연의 위력과 정적감 속에서 표현함으로써 모방을 뛰어넘는 미적 체험을 주려고 했다.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숭고의 체험을 시도했는데, 끝 모를 공간감을 지니는 풍경은 세계, 절벽은 죽음, 난파선은 좌절을 의미한다. 자연을 통해 내적 긴장감과 반성적 사고를 촉발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베수비오 산의 분화〉

달, 18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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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베수비오 산의 분화〉도 화산 분화를 통해 숭고함을 표현하고 있다. 앞으로는 붉은 용암이 흐르고 하늘을 삼켜버릴 듯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뒤로는 산등성이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웅장한 자연을 보여준다. 전면에 작게 묘사된 사람들은 거대한 용암과 연기에 대비되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을 드러낸다. 달은 프리드리히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는데, 태풍과 파도에 휩쓸린 난파선의 모습,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는 들판 등을 장대한 구도에 담아냈다.

빛 · 색채를 통한 인간과 자연의 정신적 교감

광대한 자연의 위력을 통해 숭고함을 체험케 할 뿐 아니라 정막감이 도는 자연 속에 인간을 배치함으로써 좀 더 적극적으로 정신적 충만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프리드리히나 달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의 정확한 형태나 동작이 아니었다. 상황과 색채가 인간과 어우러져서 풍기는 공간의 분위기야말로 정신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자연의 단순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 안에서 함께 공명하는 느낌을 살려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석양을 보는 두 사람〉

프리드리히, 18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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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의 〈석양을 보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정신적 공명을 담아내려는 전형적 시도다. 저 멀리 해는 이미 바다 속에 잠기고 구름에 비친 붉은 노을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잔잔히 물들인다. 검은 실루엣으로 남은 두 사람이 정적 속에서 노을을 응시한다. 주위는 이미 상당히 어두워져서 사물의 형체는 분명하지 않다. 노을에 물든 하늘과 이를 세로로 가르는 인물이 시선을 붙잡는다. 그림을 보는 이도 두 사람의 뒤편에서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감상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고 풍경을 향한 인물은 인생의 고뇌에 직면한 인간을 상징한다. 노을빛이 인간과 자연을 동시에 휘감으면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들의 얼굴이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노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의 눈이 아니라 말없이 자연과 자신의 내면이 교감을 나누는 중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보는 이도 이들의 뒤편에서 그 교감에 참여한다.

〈바다의 엄마와 아이〉

달, 18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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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의 엄마와 아이〉도 프리드리히 작품이 주는 감흥을 비슷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해가 구름에 가린 채 점점 바다를 향해 가라앉는 중이다. 하늘과 구름 사이로 어렴풋이 붉은 노을을 드리우고 있다. 아직은 남은 해가 구름을 뚫고 바다의 한 부분을 비춘다. 전면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와 엄마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아이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이나 작은 돛단배의 진로로 봐서는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인 듯하다.

이 그림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구체적 형태나 동작이 아니다. 캔버스 전체에서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면서 녹아 있는 듯한 빛과 색채가 흐름을 지배한다. 해를 가린 구름조차도 잔잔한 색채가 펼치는 향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멈춘 듯한 전체 공간의 분위기가 보는 이의 내적인 움직임을 자극한다. 무언가 평화 · 안정 · 균형 등과 같은 정신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그림 모두 형태의 사실적 모방을 넘어서는 화가의 개성적 시도를 보여준다. 사물의 외적 형태를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화가의 상상력과 개성을 담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사실성에 가까울수록 같은 자연을 담은 화가들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비슷한 느낌을 전달한다. 하지만 빛과 색채는 같은 대상일지라도 화가에 따라 얼마든지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만큼 정신적 상상력이 결합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 또한 빛과 색채가 중심인 화면 설정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도 쉽다. 그렇기 때문에 셸링이나 헤겔은 빛과 색채에 주목하면서 회화가 조각보다 우위에 있는 미술 단계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정한 형태와 비율 그리고 획일화된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서 화가의 상상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작품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후 본격적 낭만주의 미술을 암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창조적 영감을 통한 상징성의 강화

룽게의 〈아침〉은 풍경화를 통한 자연과 정신의 교감, 빛과 색채를 통한 정신성의 추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화가의 창조적 영감에 기초하여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화면 설정으로 또 다른 면에서 충만한 정신성을 추구한다. 인생의 네 시기를 아침 · 낮 · 저녁 · 밤으로 표현한 연작 〈네 개의 시간〉 중 첫 그림에 해당하는 〈아침〉이다. 그림은 아래의 한가운데 초원에 누워있는 벌거벗은 아기에서 시작된다. 양 옆으로는 아기 천사들이 꽃을 선사하며 탄생을 축하한다. 화면 배경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듯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아침〉, 〈아침〉 세부

룽게, 18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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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제공한다. 하늘에서 나팔을 부는 천사라든지 그림의 전체 구성은 종교화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세부로 들어가서 보면 종교화로 여기기에는 쉽지 않은 요소들이 있다. 먼저 초원의 아기는 언뜻 예수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상에 벌거벗고 누워 있는 모습, 전통적 예수 탄생 그림에 등장하는 마리아 · 요셉 · 동방박사 등이 전혀 없다는 점, 주제가 인생의 네 시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신성한 아기 즉 탄생이라는 기적의 보편적 상징인 아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중앙의 여인은 마리아일 리는 없고 생명 탄생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림 형식도 이채롭다. 형식과 각 장면을 놓고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개별 인물과 사물의 묘사는 극히 세밀하지만 화면을 지배하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통해 형이상학적 이미지를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아침 이미지를 담고 있지만, 위 · 아래와 양 옆의 각 부분이 고립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독립적 이미지를 붙여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개별성을 갖추면서도 전체의 일부분인 각 개체로서 우주적 삶의 메시지를 담은 것일 수 있다. 지상의 초원에 누워 있지만 하늘을 향한 아이의 시선은 절대성을 향한 인간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룽게는 신고전주의적 주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미술을 추구한 화가였다. 역사를 매개로 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고 통감하고 주관을 투영한 새로운 인물화와 풍경화를 구상했다. 〈아침〉에서 보여 주는 형태상의 특징은 여전히 고전주의 양식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주제나 표현방식은 매우 자유롭게 개성을 추구하고 있다. 빛의 연상효과를 이용한 환상적 · 상징적 인물화와 풍경화를 개척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기하학적 · 장식적 구도, 어린아이와 식물 등 상징을 이용하여 주관을 투영한다. 자연의 위력이 주는 숭고함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상상력과 영감을 회화에 적극 반영한다. 주제와 표현방식이 더욱 과감해진 주관적 정신성의 표출은 프리드리히와 달 등이 촉발한 낭만주의 미술을 향해 더 크게 한 발 나아가는 계기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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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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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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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철학과 미술 생철학 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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