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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와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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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론의 윤리철학

경험적 지각을 통한 유용성 실현

시민계급의 실용적 윤리관

시민계급 윤리관의 정당화

베이컨은 “발견과 발명을 통해 인간 생활을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 윤리학과 정치학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의 방법론이 자연철학의 완성에만 유효한 것인가, 아니면 논리학이나 윤리학이나 정치학 같은 다른 학문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 귀납적 논리학은 모든 학문 분야를 전부 포용한다.”각주1) 인간의 힘과 지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같다. 추상적 이론에 몰두하는 고질적 악습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실용적 영역과 관계가 있는 기초에서 출발해 학문을 시작하고, 실용 영역을 잣대로 이론을 규정해나가는 방법이 한결 안전하다. 그래서 자연철학에서 확립한 귀납적 · 실용적 관점을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넓혀나가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부(富)는 도덕적 삶에 지장을 주는 대표적 요소다. “부는 덕성의 방해물이다. ··· 부자가 되는 길은 많으나 대부분 추악하다. 인색함이 좋은 방법이지만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관용과 자선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각주2) 특히 부에 대한 집착이 왜곡된 결혼과 연결되었을 때는 더한 악덕을 만들어낸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사람은 운명에 담보를 맡기는 셈이다. ··· 확실히 가장 훌륭한 일로 사회에 큰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한테서 나온다. 사회와 결혼해서 사회에 애정과 재산을 주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부와 결혼이 결합되어 추악한 악덕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기에 더욱 신랄하게 비판한 것 같다. 호가스의 〈결혼 계약〉은 이와 관련된 세태를 보여준다. 〈유행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연작 중 하나다. 신랑과 신부 가족이 결혼을 위한 사전 계약서를 쓰기 위해 모여 있다. 당시 영국 상류사회에서 부와 명예의 맞교환을 전제로 빈번하게 일어난 정략결혼을 다루고 있다. 그 첫 장면으로서 결혼 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결혼 계약〉

호가스, 1743~174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른편의 백작이 신랑 아버지고, 맞은편에서 안경을 꺼내들고 계약서를 확인하는 사람이 부유한 상인인 신부 아버지다. 신부 아버지는 막대한 돈으로 결혼을 성사시켜 신분 상승을 꾀한다. 백작은 왼손에 가문의 족보를 들고 자랑하지만, 붕대를 감은 한쪽 발과 목발이 상징하듯이 사치로 몰락한 귀족에 불과하다. 아들의 정략결혼으로 돈을 마련해 창밖으로 보이는 대저택을 완성하려 한다. 왼편에는 결혼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가 있다. 화려한 복장의 신랑은 신부에게 등을 돌려 거울만 바라보고, 신부는 손수건을 꼬며 앉아 있어서 둘 사이에 아무런 애정이 없음을 보여준다. 연작의 이후 장면은 당연히 신부 머리 위에 걸린 메두사 그림이 상징하는 대로 불행으로 치닫는다.

벽면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와 고전양식 그림들이 걸려 있고, 가구는 화려한 로코코 풍으로 치장되어 있다. 호가스는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의 회화와 장식을 귀족의 추잡하고 천박한 사치 풍조의 하나로 보았던 것 같다. 귀족과 신흥 부자의 방탕한 생활을 비판함과 동시에, 영국 귀족의 미술 취향을 조롱하고 있다.

베이컨이 보기에 부의 형성 과정도 대체로 덕을 해치는 방법에 의존한다. 또한 “사회에 큰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강조했듯이, 덕의 핵심이 개인적 선을 넘어 사회에 유용하게 기여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부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바람직한 부를 얻는 과정을 몇 가지 제안한다. “세상을 버리는 은둔적 · 수도사적 경멸을 부에 대해 가져서는 안 된다. ··· 토지 개량은 부를 얻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위대한 어머니 즉 대지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 장사나 직업의 이득은 정직한 것이다. 주로 두 가지 소문에 의해 증진된다. 근면하다는 것과 훌륭하고 공정한 거래를 한다는 좋은 소문이다.”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떠오르고 있던 부르주아지의 윤리관을 대변한다. 부의 축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마찬가지로 가난이 곧 선일 수도 없다. 흄도 지적하듯이 “재산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보하는 능력이다. 재산은 긍지라는 정념에 영향을 미친다. ··· 부는 쾌락과 긍지를 일으키고 가난은 불안과 소심을 유발한다.”각주3) 베이컨이 보기에 근면하게 일해서 축적한 부는 오히려 덕에 부합한다. 특히 토지 개량을 통한 부의 축적을 축복으로 이해한 대목은 특기할 만하다. 영국에서 시민계급 대부분이 부농으로부터 즉 아래로부터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생겼음을 고려할 때 어느 세력의 윤리관을 대변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근면한 직업 노동과 공정한 거래를 중시한 내용도 시민계급의 윤리관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하는 귀납적 · 실용적 윤리관

그리스 철학에서 중세 철학에 이르기까지 주류철학의 윤리관은 사변적 이성이나 신학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선악개념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경험론은 현실로부터 귀납적 방법을 통해 윤리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중요한 기준이 현실적 행위 동기로서 쾌락과 고통의 문제다.

로크는 쾌락을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신이 준 적극적 관념이라고 한다. “창조주는 감각적 사고와 감각에 기쁨의 지각을 기꺼이 결합하려 했다. 만일 이것이 모든 외적 감각과 내적 사고에서 분리된다면, 내가 편한 대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관념에다 부수되는 쾌락을 병합했을 것이다.”각주4) 신이 인간을 위해 쾌락 관념을 주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저지르는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쾌락은 외적 감각과 내적 사고가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다른 관념에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모든 사물의 최고 배치자의 지혜와 자비에 대한 정당한 의견을 우리에게 주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신의 자비에 속한다.

버클리도 추상 관념을 윤리 기준으로 내세우는 경향을 비판한다. “정의와 덕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지니지 않고도 정의롭고 덕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낱말이 모든 개인과 개별적 행위로부터 추상된 보편적 개념을 대리한다고 하는 견해는 도덕론에 지장을 주었다.”각주5) 쾌락을 떼어버린 행복 관념이나 선 관념이 가장 문제가 되는 보편적 윤리개념이다. 추상 이론은 지식의 가장 유용한 부분을 망쳐놓은 데 공헌했기 때문에, 현실적 유용성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관을 만들어야 한다.

흄은 더욱 분명하게 쾌락을 강조한다. “도덕적 구별은 고통이나 쾌락 감정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자신이나 타인의 어떤 성질이든 목격 또는 반성을 통해 만족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유덕하다. 그러한 성질이 불쾌함을 주는 사물은 모두 부덕하다.”각주6) 시각에 의한 외적 경험이나 내적 반성을 통해 쾌락 감정을 전달하는지의 여부가 도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쾌락을 주는 성질은 항상 자부심이나 애정의 원인이지만, 불쾌함을 낳는 성질은 자기 비하나 증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자부심이나 애정은 덕으로, 자기 비하나 증오는 부덕으로 연결되므로 각각의 원인인 쾌락과 고통이 도덕의 기준일 수밖에 없다.

쾌락과 고통을 윤리 기준으로 삼고 귀납법을 통해 윤리 원칙을 만들어가는 경험론 윤리관은 근대 윤리관의 한 축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이었다. 철학을 지배하던 객관적 · 보편적 윤리관에 도전하는 것이면서, 시민계급의 실용적 윤리관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토대라는 점에서 현대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나중에 등장하게 될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를 철학적으로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쾌락과 고통이라는 기준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외적 감각인 쾌락과 내적 반성인 쾌락을 구분하는 로크와 흄의 논리는 이후 벤담의 공리주의와 밀의 공리주의로의 분화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절대론적 윤리관의 부정과 동의에 의한 일반적 윤리기준의 설정

홉스는 절대적 윤리관을 비판하면서도 상대적 윤리관을 펼치는 데는 멈칫거린다. “순수하고 절대적인 선악과 경멸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선과 악의 일반적 기준은 대상 자체의 성질에서 나오지 않고, 국가가 없는 곳에서는 개인에게서 또는 국가 안에서는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또는 서로 다투는 인간이 동의하여 설정하고, 그의 판정을 기준으로 하는 중재자나 재판관에게서 나온다.”각주7) 먼저 절대적인 선악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 역시 사변적 연역의 과정에서 나오지 않는다.

덕에는 천부적인 것과 획득된 것이 있다. 그러나 천부적인 덕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덕은 아니다. 인간에게 천부적인 것은 오직 감각인데, 감각 자체를 덕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덕은 “어떤 방법이나 교양 및 교육 없이 관용과 경험만으로 얻어진 지력”이다. 천부적인 덕이 직접 경험에 의존한다면, 교양이나 교육 등 간접 경험으로 얻는 덕이 있다. 결국 모든 덕은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연역적으로 미리 정해지는 윤리 원칙은 아예 성립할 수 없다.

절대적인 선악 기준에 명확히 반대하면서도 일반적 기준이 필요함은 부정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같지만 논의의 맥락을 잘 짚어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절대적인 선악 기준의 부정은 현실과 무관하게 연역적으로 설정된 윤리 원칙은 없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의 성질 즉 인간 세계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보편적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의 일반적 기준은 국가 안에서 구성원이 동의해서 나오는 방법밖에 없다. 홉스는 묘하게도 개인의 동의와 함께, 대표자나 중재자를 거론함으로써 개인 간의 합의와는 별도로 통치자가 설정하는 윤리 기준을 인정한다.

    • 1〈맥주의 거리〉

      호가스, 1751년

    • 2〈진의 골목〉

      호가스, 1751년

호가스의 〈맥주의 거리〉와 〈진의 골목〉은 의회가 합의해 만든 선악 기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국 의회는 18세기 중반에 진 종류의 독한 술을 법령을 내려 불법화한다. 이 그림은 호가스가 ‘진 법령’을 지지하면서 그린 판화다. 〈맥주의 거리〉는 선을, 〈진의 골목〉은 악을 상징한다. 맥주 거리에는 활기차게 일하고 그림을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건강한 일과 사랑, 예술이 꽃핀다. 반대로 진의 골목은 무능함과 추악함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가난에 찌들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며 싸움으로 소란스럽다. 심지어 계단에서는 술에 취한 어머니가 사고로 아이를 떨어뜨리고 있다.

흄도 “도덕성의 여러 규칙은 결코 이성의 결론이 아니다.”각주8) 라고 단언한다. 정신이 지각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정신에 나타날 수 없다. 지각은 보고, 듣고, 판단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생각하는 모든 작용을 말한다. 즉 감각 경험에 기초한 지각만이 정신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합리론이 주장하는 이성이 도덕을 구별하는 원천일 수 없다. “도덕성이 오직 이성의 연역을 통해서만 발견된다고 우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활동적 원리는 결코 비활동적 원리에 기초를 둘 수 없다.”

그러므로 선악 구분이나 윤리 기준은 자연적 원리나 선험적 과정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창안했다. “어떤 덕도 정의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고, 어떤 부덕도 불의 이상으로 혐오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정의나 불의만큼 어떤 성격을 사랑해야 할 것 또는 미워해야 할 것으로 확정하는 성질은 없다. 정의는 인류의 선과 복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덕이며, 정의는 이 목적을 위한 인위적 창안에 불과하다.” 정의는 사회적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구성원이 만든 원칙이다.

그러면 개인이나 집단마다 각기 다른 윤리관을 가지게 되는가? 흄도 홉스와 마찬가지로 보편 윤리관을 반대하지만, 일반적 기준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홉스가 제안한 구성원 간의 동의나 통치자의 결정 가운데, 흄은 상대적으로 동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동의를 통한 윤리 기준의 설정 근거를 공감 능력에서 찾는다. “공감이야말로 도덕적 구별의 주요 원천이다.” 공감은 강력한 인간 본성의 원리로서 도덕의 판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의 · 충성 · 순결 · 예절처럼 공감은 다른 어떠한 원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작용하는 경우에도 강력한 찬동을 얻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공감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에 동의에 기초한 일반적 윤리 기준의 설정은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추구해야 할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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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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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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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철학과 미술 생철학 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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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경험론의 윤리철학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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