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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가 아닌 자율적 · 실용적인 윤리관
자율적 · 실용적 윤리관
쾌락과 고통을 중심으로 한 귀납적 · 실용적 윤리관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신이 절대적 도덕률을 부여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데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몽테스키외에 의하면 도덕은 강제된 희생일 수 없다. “도덕은 우리에게 희생이나 고통을 요구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한 정의가 곧 스스로를 위한 애덕이다.”각주1) 신이 아담에게 어떤 과일을 절대 먹지 말라고 조건 붙인 것에 의문을 품는다. 아담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는 분이 어떻게 당치 않은 규율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걸 미리 아는 존재가 죄를 사하여 은총을 내린다는 설정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다. 도덕은 외부 존재가 미리 정한 규율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타인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루소도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을 기준으로 규정하는 기존의 도덕률을 비판한다. “인간은 선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본래 악하다거나, 미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악에 젖어 있다거나 ··· 하는 등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각주2) 인간은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의 강제가 필요하다는 홉스의 발상에 반대한다. 인간이 동료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한다. 오히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타인의 보존에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자연인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전제로 그 위에 이성을 통한 교육이 결합되어야 한다.
볼테르는 외적 강제가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권태와 방탕, 결핍이라는 세 가지 악을 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캉디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팡글로스는 “신이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도록 한 것은 그것을 가꿀 관리자로 있으라는 뜻이었지. 그것이 바로 인간이 휴식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캉디드는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인간의 덕은 자율적 선택에서 온다. 특히 근면한 노동이 현실의 악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다분히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하고 있는 시민계급의 윤리관을 반영하고 있다.
여성과 가족에 대한 윤리관의 변화
여성과 가족 도덕률도 한계는 많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난다. 몽테스키외는 대자연의 법칙에 의해 여자가 남자에게 구속된다고 여긴 기존의 도덕률을 비판한다. “그건 절대로 자연의 법칙이 아닙니다. 우리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휘두르는 권력은 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육 차별이 여성을 뒤처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았다면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교육을 받지 못해도 별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분야에서 여자와 남자의 능력은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혼에 대해서도 상당히 적극적 시각을 갖고 있다. “이혼에 대한 권리처럼 부부에게 서로 애착을 느끼게 만드는 건 없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는 건 자신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탱하려고 결심한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이 강한 현실에서는 이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 결혼생활이 주는 고통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간다. 끝없는 영원함으로 인해 결혼은 불유쾌한 것이 되고, 서로를 향한 혐오감 · 불화 · 무시 등이 생긴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유롭게 이혼을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행복한 가족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루소도 여성에게 강제되는 온갖 기독교적 금기를 비판한다. “기독교는 모든 의무를 지나치게 과장함으로써 의무를 실천할 수 없는 공허한 것으로 만들며, 여자에게 노래와 춤 등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금지함으로써 가정에서 침울하고 토라지기 잘하며 견딜 수 없는 여자로 만든다.”각주3) 여성을 우울한 의무에 종속시킴으로써 결혼이 주는 기쁨을 추방해버렸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숙과 엄숙의 의무가 오히려 가족을 불쾌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계몽시대의 여성 인식은 가능성과 함께 상당한 한계를 지녔다. 계몽 지식인들은 대체로 여성의 지적 활동을 옹호했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롱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지적 교류가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아직은 계몽 사상가들의 의식이 현실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지 못했다. 여성을 지적 생산자로 인정하고 작업을 독려하기보다는 살롱에서 토론을 중재하거나 조정하는 정도의 역할에 한정했다. 루소는 더 심해서 살롱에서 여성이 역할을 하는 것조차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여성 본연의 영역은 가사노동과 가정교육이었다. 다만 여성이 자신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가정에서 여성의 권한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계몽 사상가들이 가부장제적 의식에서 충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디드로, 쾌락을 옹호하다
디드로는 가장 적극적으로 덕을 즐거움, 쾌락에 연결한다. “최고의 미덕이란 즐거움과 유용함을 결합시키는 데 있는 것”각주4) 이다. 즐겁고도 유용한 행위는 미덕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완벽함이란 이 두 가지를 일치시키는 데 있다. 반대로 즐거움과 유용함 중에 어느 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행위는 최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욕의 강제는 미덕일 수 없다. “정숙함과 엄격한 금욕이 개인이나 사회에 어떤 이익이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지 당신은 내게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 ··· 그것들을 미덕의 목록에서 삭제시킬 수 있습니다.” 명백히 죄악인 행위에 대해서만 금욕이 필요하다. 정숙과 금욕만큼 더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하며, 해롭고, 경멸할 만하고, 더 나쁜 것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디드로는 번식과 무관한 성적 욕망과 성행위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는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에서 보여주는 노골적인 성 욕망과 자극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루소는 더 심했다. 〈터키 목욕탕〉에는 수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같은 포즈나 동작을 취하고 있는 여성이 거의 없다. 앵그르는 한두 명의 아름다운 자태가 아니라 전라의 여인들이 집단으로 표출하는 관능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머리 위로 팔을 올리고 있는 오른편의 여인은 요염한 포즈로 남성을 유혹하는 듯하다. 원형 캔버스에 그린 것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처음에 구상할 때는 사각형 캔버스였는데 구멍을 통해 훔쳐보는 관음적 요소를 위하여 둥글게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디드로는 “여인과 감관의 흥분을, 서로의 영혼을 뒤섞는 행복을 ··· 번식할 수 있는 행복을 금하기 때문에, 유용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이고 감미로운 한순간을 스스로 금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번식의 유용성과 상관없는 성행위,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행위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전혀 없다. 흔히 감각적 성행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라고 하지만 그런 말들이야 말로 잘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 유용성과 즐거움의 결합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번식의 유용성이 없다 해도 나쁜 행위는 아니다. 나쁜 행위는 즐거움조차 없는 것이다. 즐거움만 제공하는 쾌락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개인에게만 즐거움을 주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어 가진다. 쾌락이 목적인 성행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즐거움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다.
상대적 윤리관의 지향과 감성을 통한 도덕 교육
상대적 윤리관의 가능성
영국 경험론 철학자들은 절대적 윤리관을 비판하는 데 적극적인데 비해 상대적 윤리관의 가능성을 여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대안으로서 사회적 동의를 얻은 일반적 기준으로서의 윤리관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계몽 사상가들은 상대적 윤리관의 가능성을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선과 악 기준을 상대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한다. 악당 선장이 탄 배가 침몰한 뒤 “죄가 벌을 받습니다. 네덜란드인 선장 녀석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입니다.”라고 하자, “하지만 배에 타고 있던 승객도 함께 죽어야만 했을까요? 신은 이 사기꾼에게 벌을 주었지만 악마는 다른 사람을 물에 빠져 죽게 했어요.”라고 반박한다. 한 사람에게는 선인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 있다. 개인과 집단이 처한 위치나 이해에 따라 선과 악의 기준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 이해가 가능함을 열어 둔다.
디드로는 쾌락 문제와 마찬가지로 더 적극적으로 상대적 윤리관에 접근한다. “맹인에게 소변을 보는 사람과 신음하지 않고 피를 흘리는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 미덕은 느끼는 방법이나 외부 사물이 마음을 움직이는 정도에 좌우됩니다. ··· 맹인의 도덕은 우리의 도덕과는 다릅니다.”각주5)
맹인은 시각이 아닌 청각과 촉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소리만으로 소변과 피 중에 무엇이 떨어지는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덕은 다른 인식과 마찬가지로 외부 사물과 느끼는 주체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러므로 맹인과 일반인의 도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농아의 도덕은 우리는 물론이고 맹인의 도덕과도 다르다. 그리고 만약 한 가지 감각을 더 가진 존재가 있다면, 우리의 도덕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식이 감각에 의존하는 한 우리의 형이상학이 그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원칙이지만 우리가 보기엔 불합리하거나, 혹은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어떤 조건에서 누가 느끼느냐에 따라 도덕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윤리는 상대적이다.
도덕의 주입이 아니라 자연적 감성을 유지하는 교육
루소는 어린이에게 도덕 교육을 하지 말라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자연인의 감성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연인이 그러하듯이 어린이도 선과 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악덕으로 향하는 일이 없다. “미개인은 선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악하지도 않다.”각주6) 악덕을 모르는 것은 미덕을 아는 것보다 유익하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덕을 가르쳐야 선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뢰즈의 〈말썽꾸러기〉에서 보는 것처럼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꾸짖고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다. 아이가 먹던 밥을 강아지에게 주자, 어머니가 나무라고 있는 장면이다. 한 손은 무릎에 짚어 화가 났음을 보여주고 있고, 나머지 한 손은 강아지를 가리키면서 아이가 한 일이 적절치 못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말썽꾸러기〉 자체가 그뢰즈가 도덕 교육을 위해 제작한 연작 중 하나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르치기 위한 연작을 그리기도 했다.
루소가 보기에 어려서부터 도덕과 복종을 가르치면 오히려 아이들이 타락한다. 의존관계는 자연에 대한 종속관계와 인간에 관한 종속관계가 있다. “자연에 관한 종속관계는 아무런 도덕성도 없기 때문에 자유를 손상시키는 일도 악덕을 자아내는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 관한 종속관계는 무질서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각주7) 도덕이란 인간에 관한 종속관계에 해당한다. 이성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발달하는 것이 도덕 인식이다. “선이든 악이든 이성의 불빛에 의해서 비쳐질 때 비로소 무엇인지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성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나이다. 이성적 설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도덕 교육은 현실적으로 금지와 강제일 뿐이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 명령과 복종 즉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만들 뿐이고 이는 서로를 타락시킨다.
어린이를 자연에 대한 종속관계에만 한정해야 한다. 초기 교육은 “미덕이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악덕으로부터 또 정신을 과오로부터 지켜주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면 어린이의 교육이 진전되면서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셈이 된다. 어린이가 무모한 의지를 내세울 때도 결코 물리적 장해 외에는 제공하지 말 것이며, 자기 행위에서 저절로 비롯되는 벌 이외의 것을 가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스스로 생각해내게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식하기 이전에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바라고 악을 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사랑하고 나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적 감정에 속하므로 여기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천부적 감정 위에서 자라난 아이가 나중에 이성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을 때, 이성을 통해 도덕을 알리면 그를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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